박경리의 <김약국의 딸들>을 읽고
독서라는 바퀴는 한번 돌기 시작하면 그 톱니에 낀 크고 작은 바퀴들이 같이 돌기 시작하여 어느 순간 내 의지와 상관없이 여기저기 움직이기 시작해서 걷잡을 수 없게 된다. 모든 책을 놔버리고 어딘가로 도망치지 않는 한 그 바퀴 중 내가 맘에 드는 것만 몇 개 골라서 돌릴 수는 없다. 어느 순간 내가 시작한 첫 번째 바퀴는 어디 갔는지 찾을 수가 없고, 수없이 많은 바퀴들이 굴러 커다란 성을 만들고 도시를 만들고 나라를 만든다. 그러다 시들해지면 나라를 움직이게 하던 에너지 넘치는 바퀴들이 일제히 멈추고 적막이 시작된다. 그 적막을 채우기 위해 여기저기를 기웃거리겠지만, 결국 배고픈 이리처럼 바퀴 주변으로 모일 수밖에 없다. 어딘가 허기가 질 때면 책을 찾는 나의 습관이고, 그러다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되는 병렬독서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직렬독서들이다.
이번달 박경리작가의 <김약국의 딸들>을 읽은 것도 그 톱니바퀴 중 125번에서 155번 사이쯤이 아닐까 싶다. (대충 아무 숫자나 갖다 붙인 거다) 다산북스에서 진행하는 박경리 작가 책 읽기 챌린지를 SNS에서 발견했고 신청했다. 무슨 책을 읽을지 정하는 것도 구매하거나 대여하는 것도 내가 하니 챌린지라는 가벼운 강제성에 기대어 장편소설을 몇 권 읽어나가는 것이다. 그 챌린지가 눈에 띄어서 신청하게 된 건, 올해 <토지>를 읽고 있기 때문이었다. <토지>를 읽기 시작한 건 에밀졸라의 책을 읽다가 그리 되었고, 에밀졸라의 책은 고전독서모임에서 읽게 된 것이고, 그 모임은 전 직장 북클럽의 한 분이 리드하는 곳이고, 그 북클럽은 그러니까 어떻게 시작되었냐면... 뭐 그런 톱니바퀴가 돌고 돌아 여기까지 온 것이다. 그러니 독서는 정말 대단하다. 며칠 혹은 몇 주 전이었다면 전혀 몰랐을 세상이나 생각에 흠뻑 빠지게 하니 말이다. 게다가 내가 좋아하지 않는 비극성이 극화된 책을 결국 완독 하게 될 줄이야. 사람의 행동과 생각을 변화시키는 데에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독서가 아닐지 모르겠다.
이 책이 이런 내용인지는 책을 읽기 시작할 때는 전혀 몰랐다. 아니 끝날 때까지 몰랐다. 누군가에게 줄거리를 들어본 적도 없고, 책리뷰를 찾아본 적도 없으니. 책을 읽는 내내 가슴에 품은 희망 같은, 등장인물들의 해피엔딩을 기원하는 나의 작은 바람은 결국 마지막장을 읽으며 산산이 부서졌다. 이토록 비극적일 줄이야. 그래도 순수한 용란이가 사랑받았으면, 성실하고 착한 용옥이가 잘 살았으면, 냉랭한 남편 때문에 외로웠을 한실댁이 말년엔 행복했으면. 그런 생각을 하며 그래도 그래도라는 말을 되풀이하며 책장을 넘겼지만, 결국 김약국과 한실댁, 그리고 딸들은 각자에게 닥친 비극을 피하지 못한다. 중요한 건 그 비극들을 온몸으로 받아냈다는 것이다. 비겁하게 도망가거나 피하는 게 아니라, 그 비극을 원망하느라 주저앉는 것이 아니라, 그래도 기어코 행동하고 감내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용빈을 배신한 홍섭이와는 반대되는 인물들이었다.
온몸으로 막아서고 받아내는 건 성수(김약국)가 고향을 등지려다가 결국 주저앉고, 누이 연순을 보내고 약국을 이어받는 것부터 시작된다. 삶이란 톱니바퀴는 어디선가 얽히고설켜 뭐가 원인인지 결과인지 알 수 없게 돌아간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듯 일부만 선택할 수도 없고 내 손을 떠나 흘러가다가 그 톱니에 손가락이 끼고 옷자락이 끼어, 생채기가 나고 아파도 인내하고 그저 지켜볼 수밖에. 좀 더 적극적으로 톱니를 추가하기도 빼기도 조정해보기도 하지만 피하기는 쉽지 않다. 순수한 용란이 시대를 잘못 타고나 사랑에 몸과 마음을 던진 것처럼, 풍랑에 남해환이 난파된 것처럼, 배신하고 떠난 홍섭에게 용빈이 상처받는 것처럼, 어쩔 수 없이 눈앞에 닥치는 운명 같은 비극은 김약국의 딸들을 할퀴고 지나간다. 게다가 곧 죽을 거라는 무당의 말에 죽을병을 선고받은 마음임에도 쓰러진 아편쟁이 사위 연학이를 살리는 한실댁을 보는 것은 힘들었다. 그냥 죽게 내버려 두었으면 연학이 휘두르는 도끼에 맞아 죽지는 않았을 것을. 과부가 된 여편네와 동네 아이를 보고 떡을 사주고 주머니를 털어 돈을 내어주는 한실댁이니 사위를 살리려는 것은 당연했을 것이다. 그러나 결국 자기를 죽일 살인자의 목숨을 구해준 격이니 그 아이러니가, 그 어이없는 톱니바퀴가 그저 이야기이지만 황당하고 괴로웠다.
박경리 작가가 이 책을 통해 이러한 비극을 통해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는 뭐였을까. 그럼에도 살아내라는 것일까. 정국주나 홍섭이나 서영감이나 연학이처럼 비겁하거나 악하지 말고 대쪽 같은 김약국처럼 묵묵히 감내하라는 것일까. 그렇다고 김약국이란 캐릭터에게 애정이 생기는 것도 아니었다. 부모의 비극적인 죽음으로 인한 트라우마와 어두움이 있었지만, 한실댁에게 마음 한 칸 내주지 않은 것을 이해할 만큼은 아니었다. 더군다나 한실댁의 비극적인 결말을 보면 더더욱.
그보다는 오히려 다섯 딸들로 대변하는 다양한 인간상, 억울함, 비극성을 보여주며 삶이 만만치 않고 원하는 데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당연한 사실을 보여준다. 선하고 착하지만 비극적인 죽음을 맞게 되는 용옥과 한실댁, 악착같고 이기적이지만 결국 미쳐버린 용란이를 책임지는 용숙이, 한평생 외롭게 살다 죽은 김약국, 그 사이 비교적 중심을 잘 잡고 선 용빈이. 이야기에서 당연하게 기대하기 되는 권선징악이나 해피엔딩, 주인공의 성장, 그런 것들은 이 책에 없다. 그래서 어쩌라는 거지?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나 다시 돌아보면 운명 같은 비극을 당당히 맞설 수밖에 없는, 살아내야 하는, 지켜야 할 생명력과 인간성 같은 것들을 생각하게 만든다. 돌아오는 보상은 용옥이와 아이 시체 사이에서 떨어진 십자가 하나처럼 미비하고 보잘것없는 것이라 할지라도. 작가는 강극의 입을 빌려 처절한 인생을 살아내는 독자에게 냉정하게 충고한다. "용빈 씨 혼자만 이 비극을 짊어지고 있는 건 아니죠." 그러면서 동시에 미스케이트의 입을 빌려 따뜻한 위로를 건넨다. "용빈이, 믿음을 잃지 말아요!"
박경리작가가 존경받는 작가이며 그의 책이 사랑받는 이유를 조금씩 알아가기 시작했다. 마음이 흔들릴 때마다 서점을 찾고 책장을 기웃거리는 마음을 이해하듯, 상처받은 영혼을 다독거리고 그래도 괜찮다고 말해주고 있었다. 읽는 내내 가슴 아픈 비극이지만, 오히려 그렇게라도 살아내라는 절절한 위로. 그게 바로 요즘처럼 출판사업이 어려운 시대에, 한국인 평균 독서량이 연간 9권 (그것도 대부분 학습 위주)인, 넷플릭스와 유튜브 같은 영상 매체가 장악한 시대에, 그럼에도 책을 놓지 못하는 이유인 것 같다. 책이 만들어낸 톱니바퀴들을 바라보며 그것에 압도당하다가도 그것들이 만들어내는 에너지를 느낀다. 거장들이 만들어낸 소설 속 세상을 며칠에 걸쳐 살고 나면, 구운몽의 성진이 팔선녀를 거닐고 살았단 인생이 한낱 춘몽에 불과한 것처럼, 거대한 인생 담벼락 아래에서 겸손해지기도 하고 시커먼 파도가 발아래에서 별것 아닌 것 같아 보이는 용기가 생기기도 한다.
<100자 평>
답답하고 화가나지만 받아들이게 된다. 나 혼자 비극을 짊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그러니 용기와 믿음을 잃지 말라고. 끊임없는 비극속에서 당당히 살아가는 인물들과 비겁한 본색을 보이는 인물을 보며 나는 어떻게 살아야할까 고민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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