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로란 Aug 31. 2024

새로운 시도는 응원받아 마땅하다

<AI 시대를 밝히는 전통의 빛> 공연을 보고

며칠 전 동대문역에 있는 전통창작마루 광무대에서 다소 특별한 연주회가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연주회의 사회를 맡았다. <AI 시대를 밝히는 전통의 빛>이라는 연주회 제목부터 좀 심상치 않은 이 공연은 수개월 전 나의 가야금 선생님의 아이디어로 기획되었다. 나는 그렇게 기억하지만, 선생님에게 이 공연은 10여 년 전부터 준비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때 남아프리카에서 밤하늘을 올려다보았을 때 쏟아지던 별빛을 보고 감동을 받았다고 했다. 그리고 그때의 감동을 언젠가는 공연으로 만들어봐야겠다는 결심을 했었다고. 우주나 별을 좋아하는 것만큼이나 미래기술에 대한 흥미도 높은 편인데, 그렇다 보니 인터스텔라 같은 SF영화를 좋아하고 AI와 같은 신기술을 알아보고 이야기 나누는 것을 좋아하신다. 그래서 선생님에게 이번 공연은 언젠가는 세상에 선보이는 것이 예정되어 있는 그러니까 새롭지만 자연스러운 수순이기도 했다.


AI는 빠르게 변화하는 앞선 기술이긴 하지만, 너무도 빨리 일상에 침투되어 어느덧 익숙해진 단어이기도 하다. 물론 그럼에도 AI가 뭐야?라고 한다면 단박에 한두 줄로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우리는 매일매일 AI를 접하고 있다. 스마트폰에서, SNS에서, OTT프로그램에서. 그렇다 보니 잘 모르는 누군가 공연제목만 본다면 AI라는 단어만 가져다 쓴 좀 뻔하거나 시시한 시도이지 않을까 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준비과정을 살짝 떨어진 옆에서 틈틈이 보던 나는 이게 된다고? 이걸 한다고? 수도 없이 물음표가 생겼던 것을 게임 퀘스트를 깨듯 하나하나 달성하더니 마침내 사람들에게 선을 보이게 된, 그저 뻔한 것은 아니었다.


이 공연은 전통과 미래 기술의 만남이라고 볼 수 있다. 더 멋지게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이보다 더 정확한 설명을 찾기 어려웠다. 국악을 포함한 전통문화를 하는 사람들은 어느 정도 기술과 실력이 쌓이면 전공이든 취미든 전통을 고수하는 것과 새로운 변화를 시도하는 것 사이에서 자신만의 균형감을 찾기 위해 고민하는 시점이 생긴다. 어디까지 전통을 고수해야 할지? 변화는 어느 선까지 용인이 될지? 얼마나 신선해야 할지? 원심력과 구심력의 균형으로 완벽한 원운동을 하듯, 그 지점을 찾기 위한 고민들이 생긴다. 국악의 경우 서양악기와 콜라보를 한다거나 서양음악을 연주해 보는 것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시도해 와서 더 이상 새로울 것도 없다. 좀 더 새로운 것이 없을지 고민해서 신곡을 만들기도 하고 색다른 악기들과 협주를 하기도 하지만 어디까지가 국악에서 인정되는 새로운 시도일지를 고민하게 된다. 그건 국악(國樂)이라는 단어에서 풍기는 견고함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새로운 시도라는 것은 가끔 과녁을 비껴간 화살처럼 안타까워지기도 하고, 시도했으되 여전한 식상함을 만들기도 하고, 드물게는 새로운 과녁을 만들어내면서 감탄을 자아내기도 한다. 


<AI 시대를 밝히는 전통의 빛> 공연은 메시지가 암전 된 무대 배경에 하얀 텍스트로 보이면서 시작했다. 텍스트는 키보드로 치는 듯한 느낌이라 사람 목소리보다 전달력은 떨어지는 듯했지만, 오히려 텍스트 치는 속도에 맞춰 더 집중하게 했다. 처음에는 텍스트가 전달하는 내용에만 집중을 했는데 이어 나오는 우주와 별이 움직이는 영상을 보며 방금 그 텍스트가 우주에서 온 메시지였다는 생각을 비로소 하게 되었다. 텍스트가 끝나니 우주 영상과 함께 행성의 고유주파수가 만들어내는 소리를 활용한 미디 음악 그리고 서정금 선생의 구음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놀랍게도 무대에는 사람이 나오지 않는다. 그저 화면과 소리로만 빈 공간을 가득 채운다. 연주자가 주인공이 되고 관객은 주변인이 되어 연주자의 행동에 집중하는 공연이 아니라, 빈 공간 속에 관객이 홀로 주인공이 된 듯한 느낌을 자아냈다. 점점 클라이맥스를 향해 가는 미디음악과 구음을 들으니 태곳적 우주의 모습을 목격하는 기분마저 들었다. 전체에 흐르는 미디음악은 매우 현대적이었지만, 구음, 사람의 목소리는 악기가 발명되기 전의 최초의 음악이라 과거로 향한 우주여행을 하는 듯한 묘한 느낌이었다.


이어 가야금, 아쟁, 대금, 미디음악의 합주가 3곡 연주되었다. AI를 활용하여 작곡한 곡을 사람이 연주한 형태였는데, 기존 산조나 민요 혹은 신곡과는 다른 흐름이라 낯설면서도 각 악기만의 특색이 보이는 독주와 가락이 섞여있었다. 그래서 낯섦과 익숙함이 밸런스를 잘 유지해 신선하다는 느낌을 만들어냈다. 특히 세 번째 곡은 모차르트의 작은 별을 샘플링하여 그저 신선하기만 할 때 생길 수 있는 지루함을 방지하고 경쾌하고 무겁지 않게 연주회를 즐길 수 있는 여유를 만들어주기도 했다. 

<AI 시대를 밝히는 전통의 빛> 앙상블 소리로의 리허설 장면과 커튼콜

곡은 내 개인적인 기대보다 너무 좋았고, 연주에는 사람의 마음이 실려있는지 소리가 정말 듣기 좋았다. 하지만 여기까지는 누구나 생각하고 시도해 볼 수 있는 정도일 수 있다. AI가 작곡하고 사람이 연주한다는 건, 어쩌면 곡이나 연주회의 퀄리티를 떠나 '그래, 그런 아이디어는 나도 낼 수 있어.'라고 누군가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마지막 연주곡 <산조 x AI>는 거기서 한 단계 더 들어간 시도였다. 보통의 가야금 산조는 가야금 연주자가 느린 장단인 진양조에서 빠른 장단 휘모리까지 한바탕 연주하는 동안 그 옆에서 고수가 장단을 치면서 추임새를 넣는다. 연주자에게 힘을 불어넣어 주고 관객들의 흥을 돋우면서 가야금 연주에 맞춰 장단을 친다. 고수의 장단이 가느다랗거나 구불구불하거나 가파른 길을 만든다면, 그 길 위에서 가야금은 춤을 덩실덩실 추는 느낌이다. (물론 매우 개인적인 느낌이다) 그러니 산조는 혼자 연주가 아닌 것이다. 고수와 함께 주거니 받거니 호흡해야 비로소 완성되는 곡이다. 그런데 이번 연주에서는 그 고수가 빠졌다 (세상에!). 대신 그 자리를 AI가 맡았다. 과연 어떻게?


AI는 가야금 산조를 듣고 학습해서, 즉흥적으로 소리를 만들어내는 역할을 했다. 진양조일 경우에는 조용하고 느린 흐름의 음악을 만들다가 중중모리 자진모리 등 빠른 장단으로 넘어가자 그에 따라 뭔가 빠른 박자의 음악을 만들어내기도 하고 갑작스럽게 퉁퉁퉁 큰 소리를 내기도 했다. 가야금 가락보다는 약간 느린 반응, 몽환적이다가 갑자기 튀어나오는 큰 소리, 전혀 기존의 국악스럽지 않은 기계가 만들어내는 멜로디. 이런 것들은 사실 연주자에게 힘을 준다거나, 듣는 관객이 산조의 흐름에 더 몰입하게 흥을 돋운다거나 하지는 못했다. 다만 이런 음악도 있을 수 있구나. 이런 산조가 있을 수 있구나 하는 매우 색다른 경험. 그건 설마 하고 먹은 김치파스타나 낫또 토스트가 꽤나 괜찮은 별미였던 것과 비슷한 경험이었다. 


관객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했다. 원래 국악이라는 게 관객과 소통하는 음악이니까. 물론 이번 공연은 추임새를 넣는다거나 마당놀이처럼 관객을 적극적으로 공연에 참여시키는 형태는 아니었지만, 어떻게 느꼈을지 궁금했다. 그래서 사회를 보다 어땠는지를 물어보았다. 일부는 원래 산조가 좋았다고 했지만, 꽤 많은 수가 지금 산조가 신선하고 좋았다고 했다. 물론 어떤 산조가 더 옳은지에 대한 정답은 없다. 각자의 취향과 선택이 있을 뿐. 다만 아직은 AI가 가야금 음악을 사람만큼 이해하지는 못했기에 즉흥적인 협연의 완성도는 고수와 한 것보다는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본공연이 시작되기 전 선생님은 이 부분을 가장 걱정했었다. 실시간으로 AI가 가야금 산조를 듣고 반응하며 협연하는 공연이기에 어떤 결과가 나올지 걱정이라고. 그간 여러 번 시도했을 때 AI가 만들어내는 음악소리가 거슬려 연주에 방해되기도 했기에 관객이 듣기에 불편하지 않을까라고. 


나는 그런 불편함 마저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얼마 전 성곡미술관에서 본 <프랑스현대사진전> 사진들이 생각났다. 브로드벡과 드바르뷔아 작가가 AI에게 원작을 학습시키고 다시 재해석한 사진을 만들어낸 작품이었는데, 뭔가 아름다운 듯하면서도 몽환적이고 기묘한 느낌이었다. 자세히 보면 손가락이 6개이거나 앉아있는 사람의 뒷모습에서 엉덩이가 없는 부자연스러운 사진들이었다. 이렇게 완벽하게 재현하지 못하는 AI의 이미지로 아직 기술은 사람이 창조하는 미학과 작품성, 예술성을 따라 하지는 못한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작품들이었다. (보러 가기 >> 1, 2


그래서 안주하지 않고 시도를 해보는 것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하지 않았으면 몰랐을 산조와 AI의 콜라보도 어떤지 직접 경험하고 나니 한편으로는 안도하기도, 한편으로는 더 도전할 거리가 남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오히려 이런 시도를 보니 전통음악을 고수하고 유지해야 할 이유도 더 단단해졌다. 여러 리메이크한 곡을 듣고 좋아하다 보면 옛날 원곡을 찾아 듣기도 하는, 그래서 결국 원곡이 좋으니 거기서 파생된 곡들도 좋았던, 곡의 감정이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고 증폭되는 그런 시너지. 그러니 그 연주를 좋아하는 것도 불편해하는 것도 다 의미가 있다. 이런 공연을 시도하는 것 자체가 가치가 있으니 준비한 데로 연주자의 노력과 생각이 전달된다면, 그것에 따라오는 다양한 반응은 필연적인 것이고 고마운 것들이다. 


나는 얼마나 좋았는지 리허설 때 곡들을 듣고 친구 S에게 부랴부랴 연락했다. 시간 되면 꼭 와서 보라고. 직장과 거리가 있어 평일 저녁 오기가 쉽진 않겠지만, 이건 시간과 노력을 들어서라도 볼 가치가 있다 생각했다. 연주회에서 느낀 감정을, 가락과 소리를 듣지 못한 사람들에게 이 감동을 텍스트로 전달하는 건 정말 쉬운 일이 아니다. 공연 실황이 있다면 영상을 플레이하고 하나하나 조곤조곤 옆에서 설명해주고 싶다. 


그러니 나도 용기를 내야겠다. 그게 뭐든. 자유롭다고 생각할 때조차 나는 주변을 의식하지 않았던가. 사람들에게 보이는 것을 전제로 글을 쓰고 사진을 올리는 건 아무래도 신경이 쓰인다. 게다가 나는 번듯한 직장도 없고 목표하던 일들이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는 것도 아니니, 나에게 닿지도 않은 시선들이 미리 신경 쓰인다. 나에게 쏟아질 것 같은 무수한 질문과 그 질문에서 받을 상처를 미리 계산하면서 어디까지 시도해 볼지를 자로 재보고 있다. 혹은 시도했는데도 반응이 없을 때, 아무런 보상이 없을 때, 그 뒤를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겁이 나는 것이다. 그래서 이 공연을 보며, 가까운 듯 먼 거리에서 준비하는 과정과 고민들을 어설프게 지켜보며, 작은 용기를 쥐어짜고 있다. 나도 이렇게 과감히 몸을 던져볼 수 있을지, 그 결과를 덤덤히 받아들일 수 있을지, 그리고 용감하게 또 시도해 볼 수 있을지. 이 글을 쓰면서 다시 물어보지만, 아직 자신이 없다. 남의 시선이라 하지만 내가 나에게 만든 껍데기를 과감히 깨고 나갈 자신. 하지만 이런 글을 쓰면서 며칠 전 공연에서의 기분을 회상해 보면서 스스로에게 용기를 내보자고 토닥여보는 거다. 그러니까 모든 글은 외부를 향하면서 내 자신을 향하는 것이다. 그러니 아무튼 계속 써야 한다는 작은 결론에 다다랐다. 공연 리뷰를 쓴다고 시작한 글이 또다시 자아성찰이 되어버렸다. 아무렴 어떤가. 그것도 고마울 따름이지. 

매거진의 이전글 혼자 잘 놀아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