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곡미술관 <프랑스 현대 사진>을 보고
일요일 아침 일찍 무거운 몸을 이끌고 집을 나섰다. 오전 10시는 일찍이라는 단어를 붙이기 민망하지만, 어제 당일치기로 친구들과 양양에 놀러 갔다가 저녁에 서울까지 운전을 했으니 나에게 일찍은 일찍인 셈이다. 강남과 성수 쪽 친구들을 집 앞에 내려주고 은평까지 왔으니 늦잠을 자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피곤한 몸상태였다. 그래도 꾸역꾸역 일어난 건 보고 싶은 전시를 놓치기 싫어서다. 그 전시는 5월 30일에 시작되어 글을 쓰는 지금은 종료된 성곡미술관의 <프랑스 현대 사진 French Photography Today>였다. 지난주 이 전시가 진행 중이란 걸 뒤늦게 알게 되었고 겨우 낸 시간이 마지막날이었다.
프랑스 사진작가들의 사진은 어떨까? 궁금했다. 프랑스 사진작가라고 뭐라고 단정 짓긴 어렵겠지만, 예전에 다녔던 프랑스 회사나 이번 프랑스 올림픽을 봤을 때, 내가 느낀 프랑스 사람들은 자유분방하고 자부심이 있고 좀 게으르고 고집이 있고 말이 많았다. 그래서 자기주장도 강했다. 뭐 나만의 편견일 수도 있다. 그래서 사진은 어떨까 궁금했다. 자유로운 발상을 옹골찬 고집을 어떻게 펼쳤을까.
프랑스 사진 전체를 알 수 있는 것은 아니고 요즘 주목받고 있는 작가들의 고전 예술을 사진으로 재해석한 작품들을 볼 수 있었다. 특히 인간, 정물, 풍경, 공간이라는 네 가지 요소로 전시는 흘러갔고, 사진만 봐서는 언뜻 의미나 목적을 이해하기 어려워 성곡미술관 인스타그램의 작품 소개글들을 보며 천천히 사진들을 따라갔다. 그러다 직원분의 적극추천으로 오후에 있었던 일정을 미루고 2시 도슨트를 듣기로 했다.
비교적 이른 시간이라, 아니면 회화나 다른 예술에 비해 조금 인기가 떨어지는 사진이라 그런가, 한가로운 편이었다. 시야를 가리는 관람객도 없었고, 귀에 거슬리는 '이거 봐바~ 뭐가 느껴지니?'라고 아이와 끊임없는 대화를 시도하는 부모의 뜨거운 교육열도 없었다. 그냥 멀리서 멍하니 보다가 가까이 다가가 사진 결을 보았다. 덧칠한 유화흔적이나 긁어낸 자국을 찾아보기도 하고, 회화처럼 두께감이 있을지 살짝 옆에서 보기도 했다.
사진이란 그저 찍어낸 결과물일 줄 알았는데, 그래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조명과 오브제를 기획한 대로 설치하고 다중노출 같은 것으로 비현실적인 감각을 만들어내는 그 정도일 줄 알았는데, 그 이상을 해낸 작품들을 보니 신기했다. 작가들은 새(bird) 사진을 조각칼로 긁어내 새를 더 강렬하게 표현했고, 수채화와 사진을 꼴라쥬 하듯 합쳐버리거나 필름을 판화처럼 찍어낸다거나 인화한 사진에 그림을 더 그리는 등 색다른 시도들을 했다. 거대한 산 아래에 사람보다 큰 종이벽을 세우고 콘크리트 벽돌 같은 착시를 일으키는 사진을 찍는 프로젝트도, 현실인 듯 아닌 듯 묘한 영상을 만들어 가상현실로 구상한 것도, 내 머릿속의 사진 예술이라는 장르를 거침없이 확장시켜주고 있었다. 어디까지가 사진이고 어디까지가 현대미술인지 그 경계가 아리송했다. 생각해 보면 현대 미술은 조각, 소묘, 회화, 영상, 행위 그 모든 것들을 활용해 작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들을 창조한다. 그러고 보면 사진도 표현할 수 있는 도구의 하나인 것이다. 사진은 이래야 해라는 고정관념이 나에게도 있었구나 싶었다. 그걸 조금이라도 흔들 수 있는 전시를 보게 된 건 행운이었다.
사진과 영상까지 꼼꼼하게 본 후 성곡미술관 앞 일본 음식점에 갔다. 실은 그 옆 스페인 요리점을 가고 싶었는데 아쉽게도 그날은 휴무였다. 스페인에서 먹은 것보다는 훨씬 비싼 값이었지만 하몽과 이네딧 담 맥주, 뽈뽀가 맛있었던 기억이 났었다. 하지만 문을 닫았고, 나는 혼자라도 대충 끼니를 때우고 싶진 않았다. 방금 본 사진들을 머릿속으로 휙휙 넘기며 여유 있게 기분 좋은 배부름을 느끼고 싶었다. 그래서 대신 옆 일본 음식점을 갔는데, 이곳도 좋았다. 일본 음악이 흐르고 토토로 인형이 의자 옆 창가에 앉아있으니 혼자 떠났던 오사카 여행이 생각났다. 혼밥이라 외롭거나 어색한 게 아니라 오히려 더 좋았다. 누구 눈치 보는 편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일행이 있으면 뭘 먹을지 어디서 먹을지를 세심하게 고민하기도 하는데, 아주 잠깐이라도 그런 생각을 할 필요가 없다는 해방감이 밀물처럼 들어와 갑자기 행복해졌다. 짭짤한 대창볶음에 고추냉이를 적당히 올려 천천히 씹어 먹었다. 맛은 더 강렬하게 느껴졌고 2시 도슨트까지 남는 시간 뭘 하지 행복한 고민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맞은편에 보이는 원두 드립카페에 갈 생각이었다. 그러다 좀 걸어도 좋겠다 싶어 발길을 돌려 경복궁 쪽으로 향했다. 서촌 골목 안쪽으로 Textbook이라는 북카페를 발견했는데 소화도 할 겸 잠시 산책하고 책을 사면 좋겠다 싶었다. 정말 탁월한 선택이라고 스스로를 칭찬하며 카메라를 오른손에 들고 길을 나섰다. 아침에 흑백필름을 넣고 나왔기 때문에 앞에 보이는 풍경들을 흑백이라고 상상해 봤다. 맑은 하늘을 올려다봤을 때 나뭇잎 실루엣이 예쁠 거 같아 찍고, 오래된 노포맛집의 간판과 작은 입구, 허리를 숙이고 들어가야 할 것 같은 작은 문과 그 옆에 툭 하고 무심히 놓여있는 화분을 찍었다. 빨래에 내려앉은 햇빛을 찍고 어지럽지만 예술적으로 보이는 전봇대와 전깃줄이 길게 뻗은 골목을 찍었다.
콧잔등과 목에 흐르는 땀을 손수건으로 닦아내며 갔더니, 세상에! 내가 전에 와봤던 곳이었다. 역시 내 기억력은 믿을게 못된다. 지도에 나오는 내부 사진도 보고 간 건데, 예전에 갔었던 곳이란 걸 전혀 몰랐다. 그래도 상관없다. 그땐 여럿이 같이 갔었고, 지금은 혼자 찾은 여름의 북카페라 그때와는 다른 곳이니까. 나는 그곳에서 사려고 마음먹었던 책을 찾지는 못했지만, 고전 1권과 제목이 맘에 드는 책 1권을 샀다. 책은 역시 충동구매가 제맛이다. 고퀄의 투명 책갈피도 하나 얻고, 룰루랄라 내리막길을 내려왔다.
도슨트가 시작하기 9분 전에 미술관에 도착했다. 전시 마지막 도슨트라, 삼십 명? 아니 사십 명은 넘을 것 같은 관람객이 모여들었고, 도슨트의 설명을 들으며 동시에 작품을 보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뒤쪽에 서서 내가 이미 봤던 작품들을 머릿속으로 떠올리며, 설명을 듣기 시작했다.
1관 도슨트를 시작하고 얼마 안 돼 누가 뒤에서 톡톡 팔을 치는 느낌에 고개를 돌렸다. 2시 도슨트를 꼭 들어보라고 추천하셨던 직원분이 서 계셨고, 은박지에 싸고 성곡미술관 스티커를 붙인 좀 어설픈 포장의 작은 물건을 손에 쥐어주고 가셨다. 그걸 주시면서 직원분은 무척이나 고마왔다고 배시시 웃으며 말씀하셨다.
아침에 관람 시작 전 안내사항을 알려주셨던 분이었는데, 그때 나와 같이 그 안내를 듣던 사람들이 일본 관광객임을 눈치채고 통역을 자처했었다. 관람객도 직원분도 당황한 듯 동그랗게 눈을 뜨고 나와 서로의 얼굴을 번갈아 보고 있는 모습을 보고 통역을 하겠다고 끼어들었던 것이다. 그냥 모른 척 지나갈 수도 있었건만. 특유의 오지랖이 또 발동한 것이었다. 나의 오지랖은 상대에게 관심이 많아서라기보다는 나도 모르게 아는 주제에 대한 것이 나오거나 혹은 모른 체하기 약간 찜찜하거나 불편한 것이 나오면 머리가 생각해서 판단 내리기 전에 몸이나 입이 먼저 움직이는 그런 것들이다. 예를 들어 엊그제 마트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친 꼬맹이가 아빠에게 엘리베이터 4인용이냐고 물어보고 있는데, 내가 먼저 8인용이야 답한 것이라거나. 백화점 한쪽 구석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카드 발급하세요라고 말씀하시는데 '아 저는 있어요'라고 답을 한 것이나. 영화 보러 갔을 때 뒤에 앉으신 분들끼리 하는 대화에 나온 질문을 나도 모르게 혼잣말처럼 대답한 그런 것들이다. 그럴 때마다 친구 H는 "대답하지 마" 라며 나 대신 창피해하곤 했다. 영화를 기다리고 있어 자리를 뜰 수 없어 그랬겠지만, 아마 길거리였다면 저 앞으로 몇 걸음 훌쩍 떨어져 가고 있었을 거다. 아무튼 그 시간도 나의 오지랖에 발동이 걸려, 1, 2관 볼 수 있고 2관에는 영상이고 화장실은 이쪽이고, QR코드를 찍으면 아티스트와 작품들 상세 설명을 볼 수 있고 등등 크게 어렵지 않은 이야기를 중간에서 전달했다.
선물은 설문조사하면 주는 작은 연필인데, 색깔별로 모아 왔다고 하셨다. 이거 탐났었는데 하나밖에 못 받아서 아쉬웠다며 너무 감사하다 했더니, 안 그래도 그 말을 다른 분께 전해 듣고 준비했다고. 지나듯 한 말을 다른 분은 또 어떻게 이 분께 전하셨을까. 별것 아닌 작은 도움이었는데, 시간을 그리 쓰지도 않았고 힘들지도 않았는데, 이분은 내 이야기를 전해 듣고 선물을 준비하고 급히 포장을 해서 나를 놓칠까 봐 따라와 건네주신 거였다. 그 모습이 고맙고 아름답고 돌아서는 뒷모습이 귀여웠다. 그 연필은 하늘색 흰색 주황색 예쁨을 뽐내며 책상 위에 가지런히 펼쳐져있다. 주황색 하나를 들어 글씨를 쓰고 지우개로 지워봤다가 아까워서 아직 두 번 쓰지는 못하고 있다. 이 연필을 볼 때마다 그날의 기분이 생각난다. 벌써부터 그분의 얼굴은 희미해지고 있지만, 그래도 안경 쓴 웃는 그 얼굴을 성곡미술관에서 다시 본다면 알아보고 인사할 수 있을 것 같다.
3시가 좀 넘어 오후 일정을 위해 집으로 돌아왔다. 인상 깊었던 사진과 이날의 좋은 감정을 인스타그램 스토리에 남겼더니, J에게서 '따라갈 걸 그랬나 봐요'라는 메시지가 왔다. 그래도 좋았을 것이다. 즐거운 수다가 넘치는 J와 함께 돌아다니는 것도 무척 신나는 일이니. 그래도 오늘은 왠지 혼자 다녀서 다행이었다.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여행을 한 것 같았다. 커피에 푹 적신 레이디핑거 과자와 그 위에 올려진 달콤한 크림과 초코 가루의 티라미수처럼 오늘 5시간이 촉촉하고 달콤하고 묵직하게 행복했다. 올해 들어 뜸했던, 서울 여행하기를 다시 시작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