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 전당에서 <베르나르 뷔페> 전시를 보고
"사람은 왜 사는 걸까?" 로란은 오른손으로 턱을 괴고 왼쪽으로 고개를 돌린 채 깨끗하게 닦여진 카페 통창 밖으로 말간 풍경을 보며 무심한 듯 질문을 툭 던졌다. "글쎄.." 맞은편에 앉아 커피를 마시는 H는 알 수 없는 나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질문을 던진 로란은 바로 앉아 앞에 놓인 투명한 유리잔에 담긴 식혜를 한 모금 빨았다. 턱 끝과 귀 아래쪽이 조금 저리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달았다. 갈증과 피로를 한 번에 날려버릴 기새의 차가운 단물이지만, 목구멍을 넘어가고 나자 이내 더한 갈증이 찾아왔다. 창밖은 34도에 육박하고 후덥지근해서 5분도 채 걷기 힘들지만, 선선한 에어컨 밑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그저 시원시원했다. 머릿속으로 짐작하여 알고 있는 것과 수정체를 통해 들어오는 풍경을 피부에 닿는 온도와 함께 다각면으로 해석한 결과는 상당한 괴리감이 있었다. 시원하게 흔들리는 초록색 나무이파리를 보니 당장에 나가고 싶은 생각이 들다가도, 저긴 34도 땡볕이야 라고 이성은 엉덩이를 붙잡고 놓지 않았다.
로란은 주절거리듯 이야기를 시작했다.
4차원의 세계는 우리가 지금 경험하고 있는 이 3차원에 시간이 추가된 거잖아? 그러니까 시공간. 그럼 지금 나는 여기서 (시계를 잠시 보고) 세시 십오 분 이러고 있지만, 5분 후 나는 다른 모습일 거잖아. 그리고 우리는 3차원밖에 인지하지 못하니까 4차원의 세계를 알 수가 없고. 그런데 말이야 4차원을 인지할 수 있는 존재는 나의 지금 이 순간, 10초 후, 1분 후, 5분 후도 알고 있는 거 아냐. 동시에 보기도 하고.
그렇지.
그럼 나의 10초 후, 1분 후, 5분 후는 정해져 있는 거야? 내가 A냐 B냐 고민하다 A로 결정을 했더라도, 그건 나의 자유의지라기보다는 그렇게 흘러갈 것으로 이미 정해졌다는?
그렇게 생각하면 그렇지. 이미 정해진거지.
그럼 우리는 왜 의식이 있지? 생각이 있고? 그건 좀 이상하지 않아?
생각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면, 실시간으로 다른 시간대의 '나'도 달라지는 건 아닐까?
그것 또한 흐른다는 시간의 개념으로 생각할 수 있는 거 아냐? 시간이 흐른다는 3차원적인 생각이지 않나?
유기적으로 그렇다는 거지. 유기적으로 서로 바뀌는 거야. 영향을 주고.
어렵다. 근데 만일 미래가 정해져 있다면 그건 좀 우울할 거 같아. 근데 말이야 무당은 그 시공간을 넘나드는 존재와 접선하는 건가? 미래도 막 맞추고 그러니까.
음.. 내가 본 점집은 그런 곳은 없었던 것 같아. 현재 상황과 심리를 꿰뚫는 것 같긴 했는데, 시공간을 넘나드는 거 같지는.. 않았어.
로란은 H와 이런 시답잖은 질문과 이야기를 할 수 있어서 좋았다. 같이 있을 때 끊임없이 수다가 이어지다가, 어느 순간 적막이 흐르듯 조용하다가, 열띤 논쟁을 하다가 (그럴 때 가끔 싸우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다), 결국 어느 한쪽이 지쳐 떨어지기도 하지만, 아무튼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상한 이야기들을 의식의 흐름대로 격의 없이 할 수 있다는 게 좋았다.
로란이 이런 이야기를 한 건 오늘 오전에 본 베르나르 뷔페 전시 때문이었을 것이다. 슬픈 피에로 그림이 생각나는 작가인데 제대로 작품들을 보고 생애를 알게 된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어찌 보면 무서울 정도로 삐죽삐죽 튀어나오고 신경질적으로 보이는 검정 테두리는 슬픈 표정의 광대나 무표정한 말라깽이 인간들과 어울렸다. 그들의 감정 같았다. 다가오지 마. 더 이상 가까이 오면 가시에 찔릴지도 몰라. 라며 두려워 도망치는 그래서 외롭고 힘든 존재들. 슬퍼 보이기도 하다가 노여워 보이기도 하다가 체념한 것처럼 보이는 자화상도 마찬가지였다. 중간중간에 세워진 커다란 전신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과 맞은 편의 벌거벗고 깡마르고 슬프고 지친 표정의 사람 그림(방안의 벌거벗은 남자)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로란은 나란히 선 그 두 모습의 괴리감에 알 수 없는 불편함을 느끼다가, 그림의 멍한 표정의 눈동자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비슷한 곳이 하나도 없는 듯한 존재이지만, 내 속에도 저런 것이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로란은 전시를 다 보고도 여전히 '실존주의 작가' 그게 뭔지 잘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대충 이런 거겠지. '나'라는 존재가 실존하려면 '너'와 다른 개별성이 존재해야 하고 그건 자유와 주체적 의지 같은 걸로 만들어지지 않을까. 어떤 목적인지 이유인지 우리는 아무것도 모른 채 이 땅에 생겨났지만, 각자가 그것들을 찾아가고 정립해야 하는 그런 것이 아닐까.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자 라는 삶의 모토를 가진 로란에게 이 철학은 매력적이었다. 후회하지 않기 위해 치열한 고민 끝에 자신이 결정을 내리고, 결정한 후엔 후회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살고자 노력하니까. 왜 태어났는지는 여전히 모르겠지만 어떻게 살아갈지는 내가 결정할 수 있으니 최선을 다해 살아가야 한다고, 요즘 그런 말을 입에 달고 다니는 로란이었다. 그렇다 보니 갑자기 든 4차원에 대한 생각은 흥미로우면서도 조금 답답해지는 문제였다. 내 생각과 의지에 따라 미래는 정녕 바뀌는 것일까? 유기적으로? 그럼 서로서로 간섭을 만들고? 그렇지 않고 만일 정해진 거라면 이 얼마나 허무하고 답답한 삶인가.
전시에서 로란의 눈길을 끌었던 것은 광대 그림도 풍경화도 아니었다. 자화상 섹션에 있던 아내 아나벨 뷔페의 코멘트였다 '... 내가 이토록 외롭고 쓸모없게 느껴진 적은 없었다....' 베르나르 뷔페의 외로움과 고통이 튀어나온 듯한 자화상들은 뮤즈이자 동반자인 그녀에게 무력감을 안겨주었을 것이다.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그의 고통, 그걸 작업실에서 한눈에 목격하게 되었으니. 로란은 그 글을 보고 전시 내내 꽤 오래전 그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너는 나의 진통제야. 네가 있어서 아픔이 느껴지지 않아. 넌 쓸모없는 게 아니야. 나를 살게 하니까. 그때의 외로움, 무력감은 그런 말을 들으면서도 완전하게 사라지진 않았다. 그래도 그 말은 상당히 도움은 되어 로란은 불안감을 조금 밀어낼 수 있었다. 아픔에 몸무림 치는 너보다 그 곁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내가 쓸모없어질까 봐 불안해했던, 존재 이유를 고민하던, 힘든 시기였다.
베르나르 뷔페는 파킨슨병으로 그림을 그릴 수 없는 지경이 되자, 홀로 조용히 검정봉지를 머리에 쓰고 스스로 생을 마감한다. 그에게 그림을 그리는 행위는 삶을 이어온 존재 이유였을 것이다. 죽음마저도 운명과 시간의 흐름에 맡기기보다 자유의지로 선택한다. 평생 그림을 그려온 아티스트들은 당연히 그림이 그들의 전부이겠지만, 이런 죽음으로 인해 그는 좀 더 특별해진 느낌이다. 그래서 베르나르 뷔페가 글자로 이루어져 있다면 그건 '그림 그리다'라는 문장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글자로 이루어져 있을까, 몇 가지 단어가 들어있을까, 어떤 말들일 지를 내가 결정할 수 있을까. 로란은 그런 생각에 빠져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