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리의 <토지> 1부 1~4권을 읽고
작년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중간 즈음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고전 책 읽기 모임에서 선정한 에밀졸라의 책을 보기 위해 경복궁역 근처 카페에서 모인 우리는 선선한 바람을 즐기면서 책 이야기를 나눴다. 생각보다 바람이 쌀쌀해서 주문한 따뜻한 라테가 금방 식어 아쉬웠던 기억이 난다. 그때 나는 에밀졸라에게 반해버렸고, 루공마카르총서를 될 수 있는 한 (출판한 번역본을) 다 읽어봐야겠다 생각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프랑스 19세기를 배경으로 한 방대한 가족서사를 읽을 거라면 박경리의 <토지>를 먼저 봐야 하는 거 아닐까? 개인주의자인 나에게 민족주의 같은 것이 있을 리도 없지만, 그래도 뭔가 의리를 지켜야지 라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책을 읽고 글을 쓴다는 사람이 아직 토지를 읽지 못했다는 건 장롱 밑 먼지가 덩어리가 되어 굴러다니지만 어둠 속에 밀어 넣고 외면하고 있는 부끄러움 같은 거였다. 그래서 토지를 읽기 시작했다.
토지를 펼쳤을 때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아차, 전집을 산 것은 실수였을까?'였다. 배경이 되는 하동 평사리의 모습을 묘사한 몇 페이지와 경상도와 전라도 사투리가 섞인 듯한 사람들의 대화를 영 따라가지 못했던 것이다. 평소 세세한 풍경이나 화면 묘사를 읽고 머릿속에서 펼쳐 상상하는 걸 좋아한다고 할 정도로 나름 자부심이 넘쳤었는데, 또 한 번 부끄러워졌다. 보통 이 정도면 일단 덮고 다른 책을 펼치기 마련인데, 아무도 뭐라 하지 않았지만 이 책에 대해서는 자존심이 상하면서 오기 같은 것이 생겼다. 올해 안에 다 읽고 말겠다는 목표를 세우면서 말이다.
초반의 걱정과는 사뭇 다르게 글은 갈수록 술술 읽혔고 등장인물들의 사투리는 그저 길고 지루할 수 있는 서사를 감칠맛 나게 도와주는 감초 같은 것이 되어갔다. 따라 읽다 보니 그냥 내용이 들어온다기보다는 각 인물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착각이 들기도 했다. 톱니바퀴가 맞물려 돌아가듯 등장인물들의 이야기들을 착착 아귀가 맞아떨어져 가며 시원시원하다가, 생각지도 못한 전개로 화들짝 놀라다가, 결국 중단할 수 없어 새벽해가 뜰 때까지 책을 들고 있기도 했다. 그래서 정한 원칙이 평일에는 절대 읽지 말고 금, 토요일에만 읽을 것.
(스포 포함 주의)
아무튼 가속도가 붙어 달려가듯 숨 가쁘게 읽어가던 토지는 어느새 최치수가 죽고 조준구가 집안 재산을 장악하고 평사리 동네 사람들을 압박한 후부터 뭔가 좀 지루해졌다. 러시아냐 일본이냐 를 두고 하는 벌이는 논쟁들, 조준구가 서울에서 나눈 대화들, 조준구와 김훈장의 대화들이 답답하달까, 재미가 없었다. 그전까지는 주말드라마나 아침드라마처럼 매 장마다 '헉 이럴 수가'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흥미진진했는데. 인물들의 갈등이 빚어질 때는, '대하소설이 막장드라마보다 더 자극적이고 재미있다니!'라는 생각을 할 정도였다.
하지만 박경리는 박경리였다. 약간의 지루함, 사실은 나의 무지 혹은 취향에서 비롯된 지루함이겠지만, 그 위기를 조금 넘으니 너무도 흥미진진하게 이야기는 흘러갔다. 서희와 평사리 주민들의 대탈출 작전이 시작되었는데, 몇몇 예상치 못한 전개에 또 한 번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며 속도를 낼 수밖에 없었다. 속으로 응원하던 곰보 목수 윤보가 의병활동 중 전사했다는 소식과 길상의 마음을 알아챈 봉순이가 결국 부산에 나타나지 않고 사라진 장면이 특히나 그랬다. 누구든 만난다면 헤어지기 마련이지만, 그 헤어짐을 받아들이는 데는 많은 인내와 가슴아픔이 수반될 수도. 겨우 책 속의 인물들이었지만, 나는 책을 덮고도 안타까움이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사라진 인물 몇몇 들에게, 그래봐야 겨우 소설 속 인물들이지만, 나도 모르게 진심 어린 애정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박경리 작가의 글은 따뜻하고 정겹다가도 스치는 바람에 뺨이 베일정도로 날카롭고 차갑게 아름답기도 하다. 인물들은 괴롭고 억울하고 답답했고, 매일 묵묵히 쌓아 올린 그들의 일상은 켜켜이 한이 서려 안타까웠다. 하지만 그 또한 잘 이겨내리라는 믿음과 응원이 책을 읽는 내내 계속 흘러나왔다. 아마도 그런 응원 속에서 잘 살아내길 바라는 애정이 생긴 것이리라. 토지를 읽고 있으니, 교과서로 그저 역사의 흐름으로만 알고 있던 동학농민운동이나 한일합병 같은 사건들에 몸을 깊숙이 담그게 되었다. 시간의 흐름 안에서 생명력 넘치는 인물을 옆에서 지켜보게 되고 같이 호흡하고 일상을 살게 되었다. 역사책에서는 언급되지 않지만 그 시대를 꽉 채우고 살아낸 아주 평범하고 힘없는 개개인들의 이야기를 알게 되었다. 흡사 계곡과 강, 바다 같은 물 안의 세계는 밖에서 보기에 단조롭고 흐릿하고 뭉뚱그려 있지만, 기꺼이 몸을 담그고 다가가면 자갈 하나도 똑같은 것이 없는 것처럼. 흐르는 물결에 몸을 맡긴 듯 그러나 지금의 자리를 뜨지 않으려는 듯 이리저리 흔들리고 구르고 그래서 닳아 작아지거나 동그래지는 그네들의 인생 같다. 그래서 책을 읽는 내내 지금의 삶을 감사하고 겸허히 받아들이게 된다.
1부 4권을 덮으면서 평사리에서 간도로 이동한 만큼이나 더 커지고 넓어질 그들의 이야기가 기대되었다. 그러나 겨우 20권 중 1/5을 지나는 시점이니, 이 기대감 설렘을 놓치지 않고 쭉 가져갈 수 있도록 잘 달래 봐야겠다.
<100자 평>
책의 두께와 권수에 조금 겁이 나지만, 흥미진진하고 속도감 있게 읽히는 책이다. 역시 박경리 작가구나 싶은 필력과 서사, 그 안에 살아가는 짠내 나는 인간들의 살아 숨 쉬는 이야기에 울다 웃다 정신없이 끌려다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