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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란 Jul 31. 2024

삶을 위한 예술

패트릭 브링리의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를 읽고

 Y언니가 떠나고 어쩔 줄 몰라하던 나에게 S가 이런 책이 있다며 슬쩍 소개했다. 형이 죽고 나서 하던 일을 그만두고 미술관으로 숨어든 한 남자의 이야기라고 했다. 나는 희미하게 웃으며 고맙다고 말하고 그 책을 들어보지 않았다. 언니가 좋아하던 브랜드의 클렌징 제품을 욕실에서 볼 때마다 나는 아직도 언니가 이 세상에 있는 것 같아 지난겨울에 있었던 장례식 기억을 외면하고는 한다. 언니가 없는 단체 채팅방을 볼 때면 받아들일 때도 되었지만 여전히 이상하다고 생각한다. 언니는 어디 갔지? 그러니 그날 이 책을 바로 집어 들고 읽기란 쉽지 않았다. 빈자리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 같으니까. 아니, 그 책에 어떤 내용이 나올지 몰라서 읽다가 기껏 정리해 둔 감정의 둑이 무너져버릴까 봐. 


삼키는 걸 잘 못하고 제시간에 잠을 잘 못 자 멍하게 시간을 보내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시간이 좀 흐른 어느 날 이 책을 다시 찾았다. 힘들 때면 책방에 가서 길을 찾아본다는 H의 말이 생각나기도 했고, 이 책을 보면 나도 숨을 곳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어쩌면 나아질지도. 언니는 갔지만 나는 살아야 하니까. 그런 생각을 하는 내가 싫었지만, 엄마 앞에서 음식을 제대로 삼키지 못하는 모습을 보인 지 며칠이 지나니 더 이상은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렇게 집어 들었다 이 책을.


좋아하는 미술관과 예술 이야기들이 나오다가, 아팠던 그래서 지금은 이 세상에 없는 형 톰과 가족 이야기가 나오다가, 잘 나가던 직장인 시절 이야기가 나오다가. 나를 정신없이 이곳저곳으로 끌고 다녔다. 그래도 울렁거리거나 어지럽지 않았고 걸음걸음 자연스러웠다. 아픈 형과 그를 돌보는 자신, 그걸 바라보는 엄마의 모습이 옛 거장의 작품처럼 온화하고 아름답고 신비롭다는 시선이나, 예술은 단번에 요약하기 어려운 것이라는 주장, 메트처럼 엄청난 기관이라도 새로운 걸 만들어내려면 실험을 해야 하고 실패를 하기도 한다는 지극히 당연하지만 또 한 번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말들. 그가 보고 겪은 것들에서 나오는 새롭거나 당연하거나 특별한 생각을 보면서 나도 언니의 반짝이고 아름다웠던 미소를 상상했고 최근 읽은 소설의 한 구절을 떠올렸고 요즘 나의 좌절도 당연히 겪고 넘어야 할 것이라는 생각들을 했다. 책을 단번에 읽지 못하고 조금씩 아주 천천히 읽었다. 그래서 책 덕분인지 시간이 흐른 덕분인지 확실히 알기는 어렵지만, 이제는 언니를 떠올려도 옛날처럼 울컥하지는 않는다. 여전히 이 세상에 없다는 사실은 생소하지만 서서히 물들듯 받아들이고 있다. 


십 년을 미술관 경비원으로 있으며 좋아하는 예술품들을 매일같이 바라보았으니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르겠지만, 작가는 예술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그것을 탐미하는 우아한 태도와 시선을 가지고 있다. 덕분에 처음 알게 된 예술작품들도 많았는데 책 중반까지는 나오는 작품들을 책을 읽는 중간에 찾아보느라 정신이 없을 지경이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작품 찾아보는 것을 포기하고 작가의 표현에만 집중해서 상상하며 읽어보기로 했다. 언젠간 뉴욕 메츠를 가서 직접 눈으로 봐야지 하는 결심을 하면서 말이다.


좌절과 고독 그리고 일상을 찾고 앞으로 나아가는 이야기가 미술관이라는 특별한 장소를 배경으로 참 잘 정리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봤거나 보지 않았거나, 비슷하거나 다르게 느낄 다양한 예술작품에서 작가만의 추억이나 상념, 통찰 같은 것들이 설득력 있게 다가왔다. 상처를 어루만지는 공감의 시간과 지적 호기심을 채우는 시간이 적절히 섞였고, 예술은 상처를 치유해주고 있었다. 


누구에게나 좋아하는 장소가 있고 다만 그곳이라서 위로를 받고 용기를 내기도 한다. H가 서점에서 길을 찾고 브링리가 메츠에서 일상을 되찾듯, 나는 책에서 평화를 얻고 있다. 이 책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책을 통해 나는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를 찾아가고 있다. 그래서 이렇게 십 년의 세월을 통찰을 한 권의 책으로 기꺼이 내준 작가에게 고맙다. 고스란히 모두 내 속에 남기기는 어려울 테지만, 덕분에 그의 십 년의 고독을 잠시 엿보고 체험하고 이해했다. 그건 내가 다시 마땅한 곳을 찾아 작은 묘목을 심어 키우는데 작은 거름이 될 것이다. 그래서 브링리처럼 언젠가는 해진 넥타이를 떼고 중앙계단을 뛰어나가길 기도한다. 그가 말한 데로 삶은 군말 없이 살아가면서 고군분투하고, 성장하고, 새로운 것을 창조해 내는 것이니까. 



<100자 평>

슬픔과 고독, 통찰이 미술관의 작품들과 함께 그야말로 아름답게 다가온다. 그의 이야기와 예술을 통해 상처 입은 마음을 다독일 수도 있고 미처 알지 못했던 작품 세상을 탐험할 수도 있다. 그게 무엇이든 영적 지적 충만함을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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