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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란 Aug 16. 2023

서울에서 휴양하는 법

서울에서 내 방 다음으로 좋아하는 공간이 있다. 밥 먹고 요가하고 책 보고 글 쓰고 소파에 늘어지고 가끔 혼술도 할 수 있어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기에 이만한 곳이 없는 내 방 다음으로 좋아하는 곳이니, 그 마음은 어디 비할 바 없이 크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게으른 건지 아끼는 건지, 자주 간다고 닳는 것도 아닌데, 일 년에 많아야 두어 번 정도밖에 못 가는 편이다. 그래서 더 소중하고 갈 때마다 느끼는 편안함과 후련함은 나날이 더 커지고 있다. 그곳은 홍대와 합정 어딘가에 있는 헤어숍이다. 이 글을 보는 누군가는 풋 하고 웃겠지만 나는 진지하다. 주변에도 내가 정말 좋아하는 사람 외에는 여기가 어딘지 잘 공유하지 않는다. 


여기는 간판이 없다. 그렇다 보니 나처럼 이 공간을 좋아하거나 이 헤어숍의 디자이너 선생님 솜씨를 좋아하는 분들이 주변에 소개해서 다들 알음알음 온다. 엘리베이터를 내려서 문을 열고 들어서면 높은 천장이 주는 개방감이 좋다. 입구부터 선생님의 취향이 보이는 책들이 쌓여있고 그 바로 뒤로 취미로 매주 달리고 있는 자전거가 서너 대 서있다. 그 너머로 뻥 뚫린 공간이 나오는데, 이제부터 이곳은 나만의 공간이다. 혼자 있기는 덩그러니 클 정도로 여유가 있어서 처음엔 미안했지만, 갈수록 이 공간의 고요함이 편안함이 홀로 있음이 좋아졌다. 개방감은 들지만 한쪽에는 카메라나 커피드리퍼 등이 있고 이어서 크고 작은 실내용 화초와 선인장들이 겹겹이 서서 이곳에 생명감을 불어넣고 있다. 더운 여름이라 통유리문을 닫아두었지만 선선한 날엔 그 유리문을 옆으로 밀어 그 너머에 있는 테라스까지 즐길 수 있다. 그 테라스에는 키 큰 초록초록 나무들이 있어 이곳이 동남아 휴양지의 분위기 좋은 카페나 레스토랑인가 착각이 들 때가 있다. 이 공간에서 혼자 두세 시간을 텔레비전을 보거나 책을 보며 두피 케어를 받고 염색을 하고 나면 여기가 서울 한가운데인 것을 잊어버릴 만큼 호사스럽다.


공간이 주는 개방감과 편안함 외에도 곳곳에 숨은 선생님의 취향이 좋다. 쌓인 책들을 보며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점이 좋다. 새벽 자전거를 타고 동쪽으로 달려 운이 좋을 때에는 일출을 마주 보며 달리는 기분을 아는 자연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점이 좋다. 이 많은 화초들을 하나하나 관리하는 부지런함과 공간을 본인의 취향으로 꽉 채우되 여백을 둬 깔끔하게 유지하는 센스가 좋다. 제주도 동쪽에 나만 아는 숨은 해변이 있는데, 그곳을 그분도 자전거 여행하다 발견하곤 종종 간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는 취향이 겹치고 경험이 겹친다는 점이 반가웠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과 일에 대한 신념, 사람을 대하는 분위기 등에서 나랑 이어지는 점들이 종종 발견되어 좋았다. 우리는 많이 말하지 않고도 편안했지만, 가끔은 여행 이야기로 신이 나서 떠들기도 한다. 


머리가 겨우 묶일 정도 되면 고무줄로 대충 질끈 묶어 다니다 보니, 올여름 내 머리가 빗자루처럼 푸석해지고, 위에는 검정 아래는 빛바랜 붉은 머리가 되어도 그다지 불편한지 모르고 다녔다. 그러다 어깨를 만난 머리카락 끝이 휘어 드라이로도 감당이 안 되는 걸 발견한 어느 날 결국 예약을 했다. 그렇게 좋아한다면서 왜 자주 못 가는지, 나도 내가 이해가 안 된다. 예약을 했더니, 내 모발은 연약하고 건조해서 오래 걸린다며, 시간을 넉넉하게 잡으라는 배려있는 문자도 보내주신다. 그 세심한 배려에 답을 해야 할 것 같아, 나도 그날 저녁 약속을 다른 날로 미뤘다. 


많은 사람들이 머리를 하러 가면 이번엔 어떻게 해야지 하는 생각들을 하는 편인 거 같다. 그런데 나는 별로 그런 게 없다. 워낙 내 스타일을 알아서 잘해주시다 보니, 그날의 기분을 이야기하는 게 다다. '더워서 좀 깔끔했으면 좋겠어요.'라고 이야기했더니, 곧 가을이 올 거니 건조할 때를 대비해서 윤기를 많이 넣겠다고 한다. 그리고 전처럼 너무 짧은 것보다는 다소 무게감 있는 길이로 하되 뒤쪽은 깔끔하게 정리하겠다고 한다. 컬러는 '제가 알아서 깔끔하게 할게요'라고 하시더니 내가 좋아하는 말린 장미 컬러가 살짝 보이는 듯한 느낌이다. 그래서 좋다. 옛날에 갔던 미용실들은 이것저것 어떻게 하고 싶은지를 많이 물어봤다. 나는 내 얼굴에 내 체형에 내 피부색에 어울리는 헤어스타일을 전문가에게 문의하고 싶었는데, 그분들은 도리어 나에게 답을 찾으려고 했다. 그런데 이분은 그냥 알아서 다 해주신다. 몇 마디 하지 않아도 속마음을 알아내신 것처럼 결과물은 늘 대만족이었다. 신기하다. 


"와 너무 부럽다. 저도 100일 정도 쉬고 싶은데, 자영업자들이 그게 쉽지 않잖아요. 우리 인생에 언제 이렇게 또 쉬겠어요. 이왕 쉬는 거 잘 쉬세요. "

내가 지금 퇴사하고 쉬고 있다는 이야기에 부러움 섞인 목소리로 잘 쉬라고 해주는 이야기가 고맙다.

"쉬니까 제일 좋은 게 뭐예요?"

"음.. 제 의식의 흐름대로 생활하는 거요."

"와 너무 좋다!"

정말 그랬다. 책을 보다가 그 작가의 공연을 보러 가고, 양자 컴퓨터가 난리라길래 양자물리학을 밤늦게 찾아보았다. 내일 출근해야 할 부담이 없으니 오늘 멀리 드라이브를 가기도 한다. 이 글도 그런 의식의 흐름 중 하나다. 

"앞으로 잘 쉬고 그래서 또 좋은 이야기 해주세요."

헤어지면서 그가 건넨 인사이다. 참 고맙고 예쁜 말이다. 나는 좋은 이야기를 한 적 없지만, 나를 좋은 이야기해 주는 사람으로 그가 만들어주었다. 그 말에 책임감을 갖고 나는 좋은 것 보고 좋은 경험하고 좋은 생각들 많이 해야겠다. 


헤어숍을 나오니 여름 햇살이 따갑다. 갑자기 지금 내 모습을 남겨야 할 거 같아서 담벼락에 기대어 셀카를 한 장 찍고는 걸음을 옮겼다. 세 시간 안 되는 시간 동안 저 공간에서 좀 더 단정해진 헤어스타일을 만든 것뿐인데, 제주도 보롬왓에서 지평선을 볼 때처럼, 망망대해 바다를 보며 크게 한숨 쉬었을 때처럼, 내 호흡이 배꼽까지 내려가고 마음의 찌꺼기가 제거되고, 가슴 안이 맑아진 느낌이 들었다. 며칠간 사람 없는 좋은 곳에서 잘 쉬고 온 것처럼, 오늘도 나는 서울에서 잘 휴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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