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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란 Aug 21. 2023

갈 때마다 좋은 성북동 산책

에세이를 쓰지만 시를 배우러 갔습니다.  좋은 에세이라며 선물 받았던 <슬픔을 아는 사람>의 저자 유진목 시인이 시 쓰는 법을 가르쳐준다 하셔서요. 물론 저한테 하신 이야기는 아니죠. 위트앤시니컬이라는 서점을 팔로우하고 있었더니 강의 소식이 올라왔고, 시를 쓰고 싶어 했던 친구가 이야기해 줘서 다행히 놓치지 않고 함께 수강신청할 수 있었습니다. 시인은 ‘하노이 여행기’라고 짧게 이야기하셨지만, 저에게는 먹먹한 슬픔을 하노이 여행을 통해 묵묵히 견뎌내고 이겨내는 에세이입니다. 저는 하노이 여행기라기보다는 제목처럼 슬픔을 아는 사람에 대한 글이라고 생각했어요. 왜냐면 책을 다 읽고 나니 하노이가 가고 싶어진 것이 아니라 유진목 시인이 궁금해졌거든요. 위트앤시니컬은 소전서림 북토크에서 만난 김갑용 작가님이 추천해 주신 곳이라 알게 되었습니다. 북토크 마지막날 치킨에 맥주 한잔을 곁들이면서 헤어지기 아쉬운 마음을 달래었었는데요, 그때 제가 시가 어렵다, 시를 좀 더 알고 싶다고 했더니 이곳을 소개해주셨어요. 그래서 인스타그램을 팔로우하고 다행히 이런 기회도 잡았네요. 가져간 책에 사인도 받았습니다. 너무 뿌듯합니다.


막상 가보니 위트앤시니컬은 제가 글 쓰는 법을 배우기 위해 격주로 가는 성북동소행성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강의가 끝난 후 친구와 함께 성북동 쪽으로 발길을 돌렸습니다. 월요일에 소행성을 가는데 문을 닫은 카페도 많고 해서, 좀 아쉬웠거든요. 거기는 동네가 참 예뻐서 골목 구석구석 돌아다니면서 차 한잔하고 뭐라도 하나씩 사면서 여행하기 참 좋은 사랑스러운 곳입니다. 그래서 시를 배우러 갔던 일요일에는 문 연 곳이 많겠지 하고 발걸음을 옮겨봤습니다. 실은 가보고 싶었던 고양이전문 서점 책보냥이 일요일에는 문을 열어서 거길 가야지 하는 마음이 제일 컸습니다.


책보냥을 지도에 저장해 두었기에 지도앱을 켜고 찾아갔는데요, 이런 곳에 서점이 있단 말이야?라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로 좁은 골목 안쪽이었습니다. 게다가 지도가 아니었다면 그냥 지나칠 뻔했습니다. 간판이 따로 크게 있는 게 아니라 아주 작은 문패처럼 있거든요. 게다가 문도 닫혀있고, 고양이가 있으니 벨을 눌러달라고 메모가 되어있네요. 벨을 누르니 사장님이 나와 문을 열어주셨고 저희는 등과 얼굴은 까만색이지만 코부터 입, 가슴, 발은 하얀 이쁜 고양이 하동이를 마당에서 만났습니다. 이미 인스타그램에서 안면을 터서 반가웠지만 녀석은 저를 처음 보죠. 아쉬웠습니다. 참, 하동이는 사진보다 실물이 훨씬 귀엽고 이쁩니다. 그곳에는 사고 싶은 물건과 책이 너무 한가득이라 참느라 고생했습니다. 그중에 고냉이만화 <대봉이의 일기>를 고르고, 고양이 일러스트가 너무 예쁜 콩콩이 그림가게의 손수건을 하나 골랐습니다. 참, 대봉이의 일기는 출간하지 얼마 안 되어 운 좋게 제가 작가사인본을 사게 되었습니다. 사장님 양해를 구하고 필름카메라로 내부 사진도 한 장 찍고 에어컨 바람에 이것저것 구경하며 짧게 대화하다 보니, 소행성 두 선생님들과 어제 술을 같이 드셨답니다. 서로 아시는 사이시겠거니 했는데, 막상 직접 들으니 더 반가웠습니다. 처음 만나지만 그래도 인연이다 싶은 생각이 진하게 들었습니다. 다음번에 고양이 좋아하는 친구 데리고 다시 오겠다는 다짐을 하고 아쉽지만 서점을 나왔습니다.


출출했던 우리는 근처 버거집, 너의냠냠버거에서 버거와 연근, 버섯 튀김과 저는 맥주 친구는 무알콜 콜라를 먹었습니다. 인테리어가 아기자기하고 버거의 속재료가 조금 색달라서 맛있는 곳이었습니다. 저는 꽈리고추가 생으로 들어간 버거를 먹었는데, 의외지만 아삭하고 알싸한 맛이 매력적이었습니다. 저는 이번 여름이 너무 더워서 살을 조금 빼야겠다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버거에 맥주는 못 참죠. 게다가 아직 해가 중천에 떠 있는 낮이니 더더욱 맥주가 땡겼습니다.  아침에 운동을 한 시간 이상 열심히 했으니 이 정도는 나에게 선물해도 되지 않겠어요? 그리고 내일 또 운동하죠 모. 버거를 든든하게 먹은 우리는 좀 더 걸어 밀곳간으로 갔습니다. 여기는 사우어도어나 바게트 같은 식사빵들이 맛있습니다. 오늘은 바게트를 사려고 했는데 아쉽게도 품절이네요. 그래도 너무 다행이었어요. 최근 두 번 연속 품절이라 못 산 엔초비 올리브를 샀거든요! 짭조름해서 맨입에 먹어도 좋고 맥주 안주로도 좋답니다. 이 맛이 저는 너무 좋아서, 다이어트라 안 먹겠다는 친구에게도 굳이 하나 나눠줬어요.


오르막길을 어슬렁어슬렁 오르다 보니 어느새 길상사입니다. 전에는 부처님 오신 날 근처여서 화려한 연등과 북적거리는 사람들이 인상적이었는데요, 오늘은 그런 특별한 날이 아니어서 절은 매우 조용하고 하얀 등만 중앙을 가득 메우고 있었습니다. 법정스님이 계셨다는 곳 툇마루에 앉아 흐르는 땀을 좀 닦고 식히며 여름의 소리를 느꼈어요. 바로 옆을 흐르는 계곡 물소리, 매미소리, 소쩍새와 찌르레기 소리. 한참을 즐기다 나오니, 친구가 모기들에게 피를 엄청 공양했네요. 저도 손바닥이 간지러워서 모기가 손바닥을 물었나 했는데, 집에 와서 보니 멀쩡한 게, 모기 잘 물리는 친구덕에 저는 안전했던 것 같습니다. 지난번에 혼자 갔을 때는 엄청 물렸는데 말이죠. 친구에게 고맙고 미안하네요. 다음에 물파스나 하나 사다 줘야겠어요.


선선한 바람이 불기 시작한, 그러나 아직은 더운 여름 일요일에 서울 여행 참 잘했습니다. 왜 내가 이런 곳을 이제 알았지? 싶을 정도로 성북동은 작은 보물 같은 곳입니다. 참 제 글을 보고 가시려는 분들은 큰 보물을 기대하면 안 됩니다. 그런 마음이라면 천천히 산책하며 소소한 일상의 행복이 깃든 동네를 구경하는 재미를 느끼긴 어려울 거니까요.


해가 길어지는 시간 슬슬 역으로 향했습니다. 이 동네 강아지들이 산책 나오는 시간입니다. 작은 강아지뿐만 아니라 커다란 순댕이들도 많은데요, 흥겨운 강아지들 엉덩이와 그 템포에 맞춘 주인들의 발걸음이 경쾌하고 여유 있습니다. 저도 언젠간 이런 동네에서 고양이 한 마리 강아지 한 마리 키우며 해지는 저녁에 같이 산책 나와야지 하는 상상을 해봅니다. 참, 고양이는 어릴 때부터 같이 산책 가고 외출하면, 자기가 강아지인 줄 알고 산책 따라나서지 않을까요? 옛날 알던 친구 고양이가 그랬거든요. 제가 냥집사가 된다면 꼭 그런 고양이면 좋겠습니다.


친구는 한 시간 넘는 거리를 버스를 타고 왔지만, 정말 신기하게도 집 앞에서 탄 버스가 위트앤시니컬 바로 앞까지 오기 때문에 정말 편하게 왔답니다. 친구가 시를 써보려고 한건 운명인 거 같습니다. 제가 소행성을 만나고 에세이를 쓰기 시작한 것처럼요. 이렇게 운명 운운하면 뭔가 특별한 느낌도 더 강하게 들고 진득하게 이걸 계속해봐야겠다는 결심도 섭니다. 친구를 만날 때마다 네가 시를 배우는 건 운명이라고 해야겠습니다. 혹시 알아요? 시인 친구 한 명 생길지. 소전서림에서 김갑용 작가의 북토크를 가게 된 것도 절반은 이 친구 덕이거든요. 그때부터 운명의 수레바퀴가 돌기 시작한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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