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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란 Sep 04. 2023

책을 읽으려고 사나, 사두고 읽는 거지

좋은 여행 기념품, 책 

오늘은 유진목시인에게서 시를 배우는 두 번째 시간이다. 전일 고전 읽기 모임에서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월든> 발제자로 준비하느라 잠을 설치고, 경기도 이천까지 왕복 운전을 했더니 피로해서 늦잠을 자버렸다. 부랴부랴 점심을 챙겨 먹고 대충 치우고 뛰쳐나오다시피 했지만 10분을 늦어버렸다. 죄송합니다~ 라며 들어가니, 돌아가며 지난번 수업의 과제였던 시놉시스를 발표하고 있었다. '발표시키지 않을게요'라고 했던 유진목 시인의 말을 찰떡같이 믿고 지질하고 못된 내 속마음의 바닥을 박박 긁어 정리했는데, 발표라니! '발표 안 시키시기로 하셨었는데'라고 우물쭈물 중얼거렸더니, '그럼 왜 그렇게 쓰셨는지 배경은 안 물어볼게요.'라고 나와 타협하기를 요구하셨다. 역시 선생님의 말은 믿는 게 아니다. 


강의가 끝나고 유진목 시인의 <연애의 책>을 샀다. 지난번에 찾았지만 없었던 책이라, 어디 꽂혀있을지를 알고 있어서 정말 1초 만에 책장에서 그 얇은 책을 찾았다. '나 좀 사가요' 라며 그 책만 미세한 빛이 나고 있었다. 온라인 서점에서도 살 수 있었겠지만, 왠지 나는 강의를 듣는 위트 앤 시니컬에서 꼭 이 책을 사고 싶었다. 그리고 책을 1초 만에 번개처럼 찾아낸 내 눈썰미와 능력에 속으로 감탄했다.  wic라는 서점 도장이 찍힌 책을 당당하게 가방에 넣었다. 그래서 내 가방에는 오는 길에 읽으려고 가지고 나온 유진목 시인의 <식물원>과 함께 두 권의 책이 자리하게 되었다. 


지난번 수업이 끝나고 성북동 산책을 갔듯, 오늘은 어디를 놀러 갈까 잠시 궁리하다가 경복궁역에서부터 서촌을 쭉 훑어 청운문학도서관을 가기로 했다. 친구와 시를 배우고 시집을 가방에 넣고 한옥 거리를 걷는 기분은 내가 흡사 진짜 문인이라도 된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그런 착각은 우리가 서촌을 돌아다닐 때도 예쁜 카페나 맛집, 네컷사진 스튜디오 같은 곳보다는 또 어디 새로운 책방은 없나, 문인들의 흔적은 없나, 하며 두리번거리게 만든다. 그래서 우연하게 들른 곳이 '이상의집' 이었다. 천재 시인 이상이 생전 머물렀던 곳, 그곳에서 이상의 작품과 초상화, 영상 자료들을 둘러보았는데, 마침 이상의 부인이었던 변동림 (김향안)을 주인공으로 한 뮤지컬을 엊그제 본 참이어서, 이거 참 기막힌 타이밍이다 싶었다. 이런 곳을 유지하고 관리하는 데에 후원까지는 못해도, 내가 책은 한 권 사야지 싶어 문화유산국민신탁에서 발간한 <날개>를 샀다. 책을 뒤집어보니 ISBN도 없어서 시중 서점에서는 사고 싶어도 못하는 귀한 책이라는 점이 맘에 들었다. 가방을 열고 유진목 시인의 두 책 앞에 이상 시인의 책을 넣었다. 오늘은 시집으로 가방이 배가 부른 날이었다. 그래도 책이 두껍지 않아 어깨가 무겁진 않았다. 그래서 돌아다닐 때에는, 종일 밖에서 볼일을 볼 때에는, 시집이 제격이다. 짬이 날 때마다 한편씩 곱씹어 보기도 좋고, 무엇보다도 책이 가벼워서 좋다.


이상의집을 나와서 '서촌 그 책방'으로 향했다. 작은 골목 안쪽이라 모르고 지나쳤다가 다시 돌아 찾아 들어갔다. 역시나 기대만큼 작고 아늑한 곳이었고, 소문대로 책방 사장님의 짧은 리뷰 메모가 많은 책들의 앞에 추천사로 붙여져 있었다. 그 책에는 메모들과 하이라이트 한 글귀, 포스트잇 플래그 스티커들이 빼곡히 있어, 이 책을 얼마나 정성스럽게 깊게 읽었는지 보여서 멋있었다. 시집이 들고 다니기 좋다고는 했지만, 여전히 시를 볼 때마다 무슨 내용인지, 어떻게 소화해야 할지가 어려워 머리가 뱅글뱅글 돌던 참이라, 나는 재미있고 웃기고 기분전환되는 아무튼 시리즈 중 한 권을 골랐다. 습관적 혼술을 자제하려고 무척이나 노력 중인 내가 <아무튼, 술>이라는 책을 집어든 것은 매우 위험한 행동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사장님의 '너무 웃기고 재미있다는' 메모를 본 순간 집어 들지 않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더 사고 싶은 책이 한가득이었지만, 이미 가지고 있던 책뿐만 아니라 카메라, 우산, 지갑, 노트, 필통까지 책가방이 터지기 직전이어서, 오늘은 이걸로 만족하자 가슴을 쓰다듬으며 그곳을 나왔다. 


우리는 서촌을 더 서성이다가 서촌의 문인들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제주 오겹살에 테라 병맥주를 한잔 하고, 배부른 소크라테스가 되어 근처 조병수 건축가의 공간이라고 할 수 있는 카페에서 못다 나눈 책이야기를 이어갔다. 이 책은 너무 사실적이다 얼마나 취재를 한 걸까, 내가 아닌 타인에 얼마나 감정이입을 할 수 있을까, 나는 이런 이야기 좋아하는데 너무 동화 같으냐 식의 책이라는 사물 안에 들어있는 서사와 작가, 사유들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사고 싶었던 책이 절판되고 중고 가격이 두 배이상이다, 로란님은 책 사는 거 정말 습관이다, 우리 집에 책 많다 갖다 주겠다,라고 결국 책 사모으는 이야기로 흘러갔다. 


누가 책을 읽으려고 사나. 사 뒀다가 그냥 읽는 거지. 그래서 책장은 미어터지고, 아직 안 읽은 책과 읽다만 책이 점점 쌓여가고 있지만, 어딜 쏘다니면 꼭 한 권씩 책을 사게 되는 이 습관은 쉬이 버릴 수가 없다. 어느 동네를 가든 작고 귀엽고 사장님 취향이 가득한 책방이 하나쯤은 있기 마련이고, 그곳의 큐레이션 메모들을 보면 도저히 안 살래야 안 살 수가 없기 때문이다. 작가들의 일상이, 슬픔이, 기쁨이, 사유가 궁금했고, 그 책들을 보며 내 일상이 또 어떻게 달라질까 궁금하기 때문이다. 좋은 책 신나는 책이 이렇게 많은데, 그 유혹을 어떻게 뿌리칠 수 있겠는가. 나는 그렇게 냉정하고 매몰찬 사람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귀엽고 예쁜 미니백도, 핸드백도 가지고 다닐 수가 없다. 책 한두 권과 카메라, 필통이 들어가는 넉넉한 백팩을 거북이 등껍질처럼 메고 다닐 수밖에 없는 사정이다. 


결국 우리는 청운문학도서관까지 가지 못했다. 그건 아무래도 다음번 서울 여행에서 들러봐야겠다. 이렇게 계획한 것을 다 못하고 한두 가지 남겨두는 건, 내일 먹고 싶을까 봐 치킨 한두 조각이나 피자 한 조각 남겨두는 마음이다. 다음에 마음 출출해질 때 읽으려고 미리 사두는 책 한두 권 같은 마음이다. 다 해치우면 이 좋은 곳을 다시 안 올 수도 있으니, 다음에 이곳을 꼭 다시 찾기 위해 못다 한 숙제처럼 못 만난 미련을 슬쩍 남겨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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