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금요일 오펜하이머를 봤다. 인터스텔라를 흥미진진하게 봤던 터라 이번엔 어떤 놀라움을 놀란감독이 전해줄까 기대하며 봤었다. 영화가 끝나고 나오면서 친구가 어땠어?라고 물어보는데, 뭐라고 답할까 잠시 고민하다가 이렇게 말했다. ”정치인과 과학자의 진흙탕 정치“ 거기에 ’천재라는 것 빼고는 평범하고 불안전한 인간 과학자의 끊임없는 고통‘이라는 내용을 덧붙이고 싶다.
그간 놀란감독의 영화를 통해 볼 수 있었던 신기한 과학세계는 이번 영화에서는 그 비중이 좀 적다. 좀 더 인간에 초점이 맞춰 있기 때문이다. 과학 발견과 대량살상 사이의 고뇌, 이를 이용하고 팽하는 미국정부와 정치인, 자격지심과 복수심에서 시작된 한 인간 죽이기를 볼 수 있다. 이야기는 직선으로 흘러가지 않고, 그 안에 느껴지는 정서와 메시지도 일원화되지 않는다. 보는 사람마다 다른 것들을 보고 다르게 느낄 것이다. 영화라는 게 그렇지만 이번에는 좀 더 심할 수도 있겠다. 혹자는 3시간이 너무 길어 힘들었다는데, 나는 체감시간 2시간 정도였다.
신기한 과학세계가 짜잔 펼쳐지는 것은 아니지만, 과학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장면들이 여기저기 나오니 실망하지 말기를. 맨해튼 프로젝트와 양자역학 이야기에서 빠지면 서운했을 리처드 파인만이 트리니티 핵실험 장면에서 잠깐 나온다. 애처가인 파인만이 핵무기 개발을 하면서도 아내를 보기 위해 매일 수십 킬로 운전을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래서인지 그 장면에서 파인만은 차에 앉은 채로 보안경을 끼지 않고 핵폭발 장면을 목도한다. 게다가 영화 오프닝에서 오펜하이머의 꿈과 환상 같은 몽환적인 영상이나 빗방울이 물 위에서 원을 그리며 퍼지는 영상은 양자물리학의 양자, 파동 등을 이미지화한 것으로 보이는데, 그런 장면들을 알아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과학이 싫다면, 그것도 문제없다. 어차피 골치 아픈 이야기는 안 나온다. 게다가 트리니티 핵실험 장면은 CG를 쓰지 않고 촬영했다는 것을 알고 본다면, 흥미진진하다. 날씨로 인해 앞을 예측할 수 없지만 준비할 수밖에 없는 과정의 긴장감, 결국 성공하는 핵실험, 화면이 하얗게 번진 후 뒤따라 오는 거대한 굉음(소리가 너무 커서 귀가 아프긴 하다) 등 볼거리도 있다. 아인슈타인, 부시 등 역사에 실존했던 인물과 똑 닮은 배우들을 보는 소소한 재미도 있다.
깊이 곱씹어 보면서 영화 보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추천한다. 감독이 메시지를 숨겨둔 장면들이 여기저기 흩어져있다. 오펜하이머의 입장과 스트로스 제독의 입장에 따라 영화가 컬러, 흑백으로 바뀌는 장면도 음미하면서 보길 바란다. 같은 시간 같은 이벤트에도 둘의 생각과 감정이 달랐음이 극명하게 보여서 그 둘 각각의 심리를 이해하기 좋을 것이다. 22만 명의 일본인들이 한마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사라졌는데, 미국인들은 승리를 축하하며 ‘아들들이 돌아왔다’라고 한다. 사람은 나와 친밀도가 낮은 것에 대해서, 내가 보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무서울 정도로 무감각하고 이기적이다. 여러 생각이 드는 장면이었다. 결국 오펜하이머의 삶에도, 그의 감정에도, 스트로스 제독의 복수에도, 미국과 주변 강국과의 관계에도, 그리고 모든 인간과 역사에 대기 연쇄폭발은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었다.
영화가 끝나고 내 머릿속에도 끊임없이 크고 작은 생각과 감정의 폭발이 일어났다. 집에 가면서 조만간 놀란감독의 영화 테넷을 봐야겠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