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분이었어요?

1장. 실연당한 기분이었습니다 (4편)

by 니나

"와, 이렇게 제가 직접 뵙다니 정말 반갑습니다." 일요일 낮 강남, 사람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 차가운 사무실에 불이 켜졌고, 깔끔한 용모의 노무사는 환하게 웃으며 나를 널찍한 회의실로 이끌었다.


지난 목요일 아침, 회사로부터 정리해고 통보 메일을 받고 가까운 친구 A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처음 당하다 보니 당황했고 막연했다. 이내 무서워졌고, 어찌할 바를 몰라서 가까운 친구 소수에게 우선 내 소식을 알렸다. 그중 A는 이제부터 정신 똑바로 차리라며 지인을 통해 한 노무사 한 분을 소개해줬다. 전화는 바로 연결되지 않았다. ‘아차, 지금 토요일이지?’ 조급해지다 보니 오늘이 쉬는 날인지 아닌지 개념도 없었다. 그래서 아주 짧은 내 소개, 사실상 지금의 내 처지와 함께 상담받고 싶다는 문자를 보냈다. 30분 정도 지났을까? 토요일이라 테니스 연습 중이었다고, 그래서 문자 확인이 늦었다며 미안해하는 답장을 받았다. 괜찮다면 당장 내일도 본인은 좋으니 사무실로 찾아오라고 했다. '일요일에도 근무하시나? 나야 땡큐지 뭐~‘


도착한 사무실은 깔끔했고 널찍했고 아무도 출근하지 않아 썰렁했다. 주말 근무를 하는 모양새는 전혀 아니었고 나와 미팅하기 위해 깜깜한 사무실 불을 켠 상황이었다. 그 노무사는 명함과 함께 이력서 비슷한 경력 소개서를 한 장 프린트하여 내주면서 이렇게 인사하셨다.

"제가 매주 금요일마다 파트너사 담당들에게 한 주간의 HR 관련 기사를 모아 뉴스레터를 보내드리거든요? 지난주의 가장 큰 이슈는 바로 OO의 글로벌 Lay off (정리해고)였어요. 그 기사를 보면서 생각했죠. 야~ 이분들 이제 거리로 나앉겠구나. 그런데 그분이 바로 다음 날 저한테 연락을 주셔서 정말 깜짝 놀랐어요. 당장 만나고 싶었죠. 그래서 일요일이지만 사무실을 열었습니다. 와, 이렇게 제가 기사에서 보던 분을 직접 뵙게 되니 정말 반갑습니다."

"아, 네네…. 반갑습니다."

마치 내가 무슨 셀럽이라도 된 양 노무사는 약간 상기된 목소리로 반갑다고 인사를 했다. 주말이지만 나를 만나기 위해 사무실을 열고 출근했다며 생색을 냈다. 얼떨떨해진 나도 반갑다고 인사했다. 그러나 사실 하나도 반갑지 않았다. 이 일이 아니었으면 굳이 만날 필요가 없는 사람이니까. 게다가 거리로 나앉을 사람이라니! 그의 뼈 때리는 직설화법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리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 양반아, 진짜 거리로 나앉을 사람을 앞에 두고 그렇게 이야기하면 어떡하나?‘ 그러면서도 묘하게 흥분되었는데, '맞아 내가 그 사람이야. 신기하지?'라며 정말로 내가 셀럽이라도 된 느낌이 들기도 했고, 신문 기사에 나온 사람이라고 하니 뭔가 특별해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동시에 누군가는 평생 겪어보지 않을 일을 나는 '체험'해본다고 생각하니 신기하고 즐거운 경험치를 획득한다는 묘한 자부심도 들었다.


틈틈이 한국 노동법과 최근 기업의 정리해고 및 구조조정, 그리고 다양한 판례를 꾸준히 검색하고 공부했다. 낮에는 회사에서 하던 업무를 평소처럼 계속하고, 퇴근 후에는 집에서 노동법을 알아봤다. 그 과정이 짜증 나거나 힘들다기보다는 새로운 것을 공부한다는 기분에 약간은 들뜨기도 했고, 처음 알게 된 지식 덕분에 신이 나기도 했다. '이런 기회가 아니면 또 언제 이런 걸 알아보겠어? 후후 이건 나의 경험치 부스트!' 그렇지만 내가 생각해도 이건 좀 변태 같아서 내가 그런 생각을 했었다는 이야기를 차마 아무에게도 하지 못했다.


노무사를 만나는 시간은 일 분도 허투루 쓸 수가 없었다. 시간당 비용이 꽤 나가기 때문이었다. 생각해 간 질문을 우르르 쏟아냈고, 특히 앞으로 회사가 어떤 조치를 취할지, 나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문의했다. 내 입장에서는 꽤 많은 돈이 나간 비싼 노무사였지만, 기대보다 꽤 현실적인 조언과 팁을 구할 수 있었다. 그 팁들이 다 먹혀들어 갈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내 머릿속이 정리되고 안심이 되었다. 역시 모르는 것보다는 아는 것이 훨씬 유리하다. 문제 해결에 필요한 정보를 얻었기 때문이 아니라 좀 더 알았다는 생각에 스스로가 좀 더 단단해진다. 이래서 전문가가 필요하구나 싶었던 순간이었다. 물론 내가 만난 노무사가 모두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현실적인 조언과 예리한 팁을 준 사람도 있었지만, 아무래도 외국계 회사에 관한 사례가 부족해서 그다지 도움 되는 이야기를 할 수 없었던 사람들도 있었다. 소송과 같은 머리 아픈 이야기만 계속하다가 본인 유튜브랑 책을 홍보하는 것으로 끝난 사람도 있었다. 그분은 상담비 대신 유튜브 좋아요와 팔로우를 부탁하셨다.


이때 나는 회사 출근과 함께 따로 알아보고 공부하느라, 하루를 족히 이틀은 되는 것처럼 쪼개어 썼다. 그래도 피곤한 줄도 몰랐다. 지나고 보면 그렇게까지 나를 몰아세우고 알아보고 바쁠 필요가 있었을까 싶지만, 그래도 그렇게 공부하던 시간이 나에게 매일 아침 출근을 준비하고 사무실로 나갈 수 있는 힘을 만들어 주었다. 나 스스로가 무장이 되어야 자신감이 생기고 어딜 가도 꿀리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그 난리를 겪고도 월요일 아무 일 없다는 듯 웃으며 괜찮은 척 출근할 수 있었다.



정리해고 과정의 후반부, 보통의 한국 회사라면 결국 퇴사 동의서에 사인할 수밖에 없게 만들기 위해 직원들을 애매하게 괴롭힌다. 물론 이 괴롭힘은 법적으로 문제가 될 정도는 아닐 수 있지만, 당하는 입장에서는 매우 괴롭고, 치사해서 회사에서 버티기 힘들 수 있다. 가령 내 업무가 회사에서 없어졌으니 이상한 팀으로 발령을 내서 내 커리어를 망가뜨린다거나, 아무 일도 주지 않아 몸과 마음을 지치게 하는 것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한국에서는 회사가 직원을 함부로 해고하기 어렵다. 회사가 재정적으로 매우 힘들다는 등의 몇 가지 특별한 이유가 있지 않으면 직원을 내보낼 수 없다. 그러나 발령은 법원에서 회사의 손을 들어줄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직장 내 괴롭힘이 아닌, 경영을 위해 필요한 조치라고 볼 수 있다는 뜻이다.


내가 당시 선택할 수 있는 것은 크게 두 가지였다.

1. 더럽고 치사하지만, 회사에서 버틴다.

2. 적당한 수준에서 퇴직위로금을 잘 협의하고 퇴사한다.


여러 노무사를 만났었다. 회사의 정리해고 과정에 다소 이슈가 될 만한 요소는 있으나, 법적으로 완전히 문제 될 수준은 아니라는 의견이 팽배했다. 내가 참고 버티다 보면 회사가 실수할 수 있는 순간이 올 수도 있는데, 그때를 놓치지 않고 비집고 들어가는 방법도 있다고 한다. 소송을 대비해야 할 수도 있고, 소송까지는 아니더라도 법정대리인을 지정하고 회사와 협의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게 바로 1번인데, 그 과정에서 노동자들은 마음을 많이 다치고, 시간을 질질 끌다 보니 경력은 망가진다.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우리나라 특성상 주변을 많이 의식하다 보니 스트레스는 더 커지고 자존감은 바닥을 치게 된다.


힘든 것은 둘째 치고, 나는 회사의 통보 방식 등의 과정을 겪으면서 정나미가 뚝 떨어졌다. 그래서 오래 버틸 생각은 없었고, 당연히 2번을 선택하게 되었다. 이 선택에 두 가지 문제가 있었는데, 첫 번째는 그 적당한 수준의 퇴직위로금이 얼마일지를 도통 알 수 없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회사에서 봤을 때 한국은 아시아 변방의 작은 국가라는 점이었다. 회사는 이 작은 국가인 한국 노동법이 프랑스 노동법만큼 혹은 그보다 더 엄격하다는 것을 몰랐고, 당연히 나 같은 직원들의 분노를 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미국에서는 다들 Thank you(고맙다)라고 하는데, 너네는 왜 이래?'라는 게 그들의 첫 번째 반응이었으니깐 말이다. 게다가 작은 국가이기 때문에 더 이해하고 해결해 보려는 노력도 적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HR과의 미팅을 위해, 엑셀에 회사와 내가 협의할 수 있는 적정 수준의 퇴직위로금의 규모를 이리저리 계산해 보았고, 업계 유사 사례들을 모았고, 한국 직원들의 반응이 왜 미국이나 다른 국가와 다른지를 설명하는 자료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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