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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은 가까이

9부 순간의 순간

by 정수윤세

온 세상이 새하얗고 눈이 부시게 아름다운 설원이 펼쳐진 이곳에서 가족이 되기로 소현과 약속했었다.

우리는 또 이곳에서 새로운 가족이 생겼고 내년에는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 넷이 된 우리가 다시 이곳에 오게 될 모습을 상상만 해도 허공을 날아다니는 기분이 들었다. 황무지 같이 건조하던 나의 마음에 사랑이 피어날 수 있었던 건 오염되지 않은 저 하얀 눈은 소현이었다. 그녀는 내 마음이 사막이었는지도 모르게 덮어버렸기 때문에 힘들었던 과거를 덮어버릴 깨끗한 행복이 찾아온 게 아닐까?


하늘에서 내리는 것 중 가장 아름다운 건 눈이라고 생각한다. 날씨는 추워도 바람을 타고 하얀 눈꽃이 땅에 내려앉을 때면 아무 이유 없이 기분이 좋아지곤 한다. 눈은 사람을 조종하는 힘이 있다. 눈사람도 만들고 눈밭에서 마음껏 얼굴과 코가 빨개질 때까지 정신없이 놀게 만든다. 그녀의 말대로 쌓인 눈은 하얀 도화지와 같아서 마음과 비슷하다. 무엇을 그릴지 정하고 그려가다 보면 저마다의 예쁜 그림을 완성해 간다. 물론 항상 아름답지만은 않다. 누군가의 발자국에 의해 오염되듯이 힘든 순간도 있고 고통이 함께하는 순간도 있고 차라리 오지 않았으면 했을 순간도 있었다. 그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때가 되면 나타난다. 내 의도와는 전혀 상관없이 말이다. 솔직히 지금 느끼고 있는 이 감정들이 사랑인지 아닌지 정의하기는 매우 어렵다. 다만 확신할 수 있는 것은 나 자신보다 더 아끼고 함께하고 싶은 존재들을 만났다는 것이다. 이런 게 사랑이 아니라고는 설명하기 어려울 것 같다. 온갖 힘든 일을 겪을 때 내 마음의 색깔은 검은색이었다. 더는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을 것 같았다. 그녀의 깨끗한 마음을 만나기 전에는 그랬다. 그녀의 마음을 알고 하얀색 눈이 우리의 사랑이 만든 빨간색과 합쳐짐으로써 핑크빛이 만들어졌다. 그동안 세상이 나의 도화지를 검은색으로만 색칠했던 이유가 이거였을까? 핑크빛으로 물든 내 마음은 그곳에서 멈춰있다. 더 이상 어떤 색깔도 필요치 않다. 따뜻하게 우리를 감싸는 분홍색이 앞으로의 우리 인생을 장밋빛으로 물들여줄 것 같다. 정말이지 우리 세 가족과 그녀의 배 속에 있는 아이까지 네 가족은 더 바랄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이 행복이 영원하기만을 바랐다.


일상으로 돌아와 소현은 첫 임신이기에 몸 관리에 최선을 다했다. 스트레스를 최대한 받지 않으려 노력했고 균형 잡힌 식단과 영양소 공급으로 배 속의 아이를 문제없이 키우려 노력했다. 남편인 나와 우리 딸 소현이도한마음이었다. 무엇보다 진짜 내 친자녀가 생긴다는 기대감과 동생이 생긴다는 기대감을 우리 둘은 모두 품고 있었다. 산달이 가까워질수록 그녀는 유독 갑자기 눈물을 흘리는 날이 많았다. 그때마다 나는 늘 그렇듯 마음을 물었다. 그녀는 하루에도 수십 수백 번 마음이 바뀐다고 했다. 기대하는 나와 아이의 표정을 볼 때면 혹시라도 태중의 아이가 잘못되면 실망하지 않을지 하는 마음에 슬퍼지기도 했다가 넷이 함께 일상을 함께할 생각을 하면 행복하기도 했다가 반복적으로 극과 극의 기분 상태를 넘나 든다고 말했다. 아마도 호르몬의 변화가 심해서였을 것이다. 사람은 사실상 호르몬의 노예이다. 몸 곳곳에서 분비되는 호르몬에 따라 기분이 확연하게 달라진다. 그래서 최대한 그녀의 기분에 맞추어 생활하려 노력했고 안 보던 눈치도 보게 되었다. 나와 우리 부모님과 아이도 마찬가지였다. 그럴 때면 우리의 모습을 측은하게 바라보던 그녀는 울음을 터트렸다. 자신이 임신했다는 이유로 괜히 눈치를 보게 했다며 눈물을 흘렸다. 그럴 때도 아이는 의젓하게 휴지를 가져다가 엄마의 눈물을 닦아주고 옆에서 꼭 안아주곤 했다. 모녀의 모습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했다. 사랑으로 가득 찬 수영장에서 헤엄치는 나는 어디까지 행복할 수 있을지 궁금했다. 그러면서도 막연하게 마음 한구석에는 두려움도 생겼다. 넘치게 행복한 지금이 어떤 이유에서건 흔들린다면 어떻게 이겨내야 할지 생각하기도 싫은 끔찍한 일이기 때문이다.

회사에 출근해 있던 가을날 낮에 다급한 전화 한 통이 걸려 왔다. 진통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는 전화였다. 회사를 바로 조퇴하고 병원으로 향했고 부모님께 전화를 걸어 그녀를 병원으로 이동시켜 달라고 부탁했다. 너무나 극심한 진통에 119를 불러서 엠뷸런스를 타고 온 그녀와 부모님의 표정은 걱정이 가득했다. 고통에 몸부림치느라 나를 알아보지도 못한 채 그녀는 분만실로 향했다. 부모님과 나는 초조함에 분만실 앞을 계속 서성거리거나 의자에 앉아 발을 떨고 있었다. 1분 1초가 느리게 흐르는 것만 같았다. 잠시 후 간호사 선생님이 나오더니 산모가 극심한 통증으로 정신을 잃어 자연분만은 할 수 없을 것 같다며 제왕절개를 위한 동의서를 작성하도록 했다. 아이가 태어나는 순간을 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어도 그녀가 정신을 잃었다는 소식에 더 불안해져 손이 덜덜 떨렸다. 왼손으로 오른 손목을 잡고 떨림을 보정하면서 겨우 동의서를 작성했다. 서류 작성이 끝나고 분만실로 뛰어 들어가는 간호사 선생님의 등 뒤로 나와 부모님은 연신 90도로 인사했다. 그리고 얼마의 시간이 흐른 뒤 이번에는 의사 선생님이 대기실에 있는 우리를 찾아오셨다. 선생님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는 떨림을 넘어서 한층 더 두려움에 떨게 했다.


“아이의 태중의 상태와 산모의 상태를 모두 고려해서 볼 때 어느 한쪽이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최악의 경우 둘 다 위험에 빠질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산모부터 살려주세요! 제발요 선생님!”

“네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나는 단 1초의 고민도 하지 않고 부모님이 지켜보고 계시기에 최대한 태연한 척하려 애를 쓰며 말했다. 태어날 아이에게는 조금 미안하더라도 다른 선택지는 머릿속에서는 생각지도 않았던 것 같다. 의식보다는 무의식이 대답했다고 보는 것이 옳을 정도로 빠른 답변이었다. 부모님도 아무 말하지 않으시고 내 옆을 묵묵히 지켜주셨다. 수술 시간이 점점 길어질수록 손과 발이 아니라 온몸이 떨려서 가만히 앉아있지 못했다. 두 시간, 세 시간이 지나고 피가 다 마를 것만 같은 지옥이나 다름없었다. 기다리는 와중에 시계를 보니 5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아이가 어린이집에서 하원할 시간이었다. 최대한 침착하게 아버지께 부탁을 드렸다. 집에 가서 아이의 하원을 부탁드렸다. 병원으로 데려오기엔 혹시 아이가 받아들이기 힘든 순간이 있을 수 있고 무엇보다 나도 제정신이 아니기에 온전히 돌봐줄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도 내 마음을 알겠다는 듯이 어깨를 툭툭 한번 쳐주시고는 집으로 발걸음을 옮기셨다. 무슨 소식이든 전해지면 전화해 달라는 당부와 함께였다. 아버지가 집으로 떠난 이후에도 수술실에선 별다른 소식이 들려오지 않았다. 그로부터 세 시간쯤이 더 지나고 의사 선생님이 무거운 얼굴로 마스크를 풀며 우리의 앞으로 다가오셨다. 선생님을 발견하자마자 앞으로 뛰어나가 선생님의 양손을 붙잡고 산모의 상태부터 물었다. 선생님은 한숨을 크게 한번 내쉬고는 말씀하셨다.


“최선을 다했는데 현재는 의식이 없으신 상태입니다. 며칠 내로 깨어날 수도 있고 못 깨어나실 수도 있는 상태입니다. 아이도 현재는 인큐베이터에서 숨은 쉬고 있으나 경과를 지켜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어머니는 의사 선생님의 말씀을 들으시곤 바닥에 털썩 주저앉으셨다. 나도 실의에 찬 눈빛으로 붙잡고 있던 선생님의 손을 놓고 힘없이 고개를 숙였다. 선생님은 우리에게 허리를 숙여 꾸벅 인사를 하신 뒤 다시 수술실 안쪽으로 들어가셨다. 잠시 후 간호사 선생님이 나오셔서 자세한 설명을 해주셨지만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유일하게 들린 내용은 현재 그녀는 중환자실에서 수혈받으며 회복하고 있는 상태고 아이는 신생아실 인큐베이터에서 움직임은 없지만 자가 호흡은 하고 있다고 전해주었다. 불행이라고 해야 할지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몰랐다. 사람의 욕심으로는 당연히 둘 다 잃고 싶지 않은 존재들이었다. 하지만 나의 힘으론 해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무사히 깨어나길 바라며 하늘에 기도하는 수밖에는 없었다. 그녀는 수혈이 끝나고 링거를 맞으며 여전히 중환자실에서 산소호흡기를 착용한 채로 회복하고 있었다. 하루에 한 번 잠시동안 면회가 가능했다. 하얀색 모자와 방진복 같은 하얀색 옷을 입고 하얀색 라텍스 장갑은 필수였다. 그렇게 행복하게 웃으며 좋아했던 눈처럼 온통 하얀색 투성이의 침대에 소현은 잠을 자는 듯 조용히 그리고 아주 낮게 숨을 쉬고 있었다. 출혈이 많았던 탓인지 안색도 창백했고 불룩했던 배도 사라지니 왠지 살도 빠져 수척해진 듯 보였다. 일주일이 넘게 소현을 보러 왔으나 별 다른 차도가 보이지 않았다. 아이도 여전히 엄마와 똑같은 상태였다. 마치 둘은 운명공동체를 타고난 것처럼 약속한 듯이 반듯하게 누워 가느다란 호흡을 이어갔다.

기적이 있는 곳에 마음과 모두의 소망이 닿았을까 그녀의 의식이 돌아왔다는 연락을 받았다. 일반병실로 옮겨지고 나면 면회가 가능하다고 했다. 기쁜 소식을 부모님에게도 전하고 부모님은 아이를 데리고 병원으로 왔다. 일반병실로 옮겨지자마자 나, 어머니, 아버지, 소현이는 간호사 선생님께 인사를 하고 그녀를 보러 갔다. 호흡기는 떼고 힘없이 누워있는 그녀가 보였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나를 발견하자마자 눈물이 맺히더니 손을 잡자 한참을 소리 내어 울었다. 아이에 대해서 간호사 선생님께 대충 이야기를 들은 모양이었다. 아이는 여전히 인큐베이터에 있다는 말에 자신 때문에 아이가 약하게 태어난 것 같다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괜찮아 소현아, 나는 지금도 행복해 널 잃지 않은 것만으로도 내 운을 다 써버린 것 같아 그러니까 그만 울고 우리 좀 봐”

“그치만....”


아버지도, 어머니도, 아이도 우리 부부의 대화를 지켜보다가 끝나자 미소 지으며 다 같이 그녀를 다독여주었다. 모두가 따뜻한 서로의 온기를 나누며 서로를 위로하고 있을 때 다급한 목소리의 간호사 선생님이 나를 찾았다. 따라오라는 간호사 선생님의 손짓에 남은 가족들과 걱정 가득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그녀를 뒤로하고 간호사 선생님을 따라갔다. 불안했다. 저렇게까지 다급해 보이는 선생님의 태도는 드라마나 영화에서 보면 항상 비극의 순간 앞에 오는 장면이었다. 복도를 이리저리 선생님의 뒤를 따라 뛰어 들어가자 어느새 신생아실 앞의 큰 유리 앞에 선생님은 발걸음을 멈추셨다. 그러고는 손짓으로 유리창을 가리켰다. 내가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박소현 님의 아기’라는 명찰을 단 아이가 눈을 감은 채로 입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이를 보자마자 벅찬 감동이 밀려들었다. 입을 가리고 울음을 참아내려 해 봐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웃는 아이의 표정을 보고 그렇게 눈물이 흐르는 이유는 무엇인지 알기 어려웠다. 한참을 아이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그렇게 계속 눈물을 흘렸다. 간호사 선생님은 옆에서 지켜봐 주시다가 아이가 안으로 들어가고 난 뒤 상황설명을 해주셨다. 깨어난 건 30분쯤 전이고 아이가 의사 선생님을 먼저 만나고 이상이 없다는 소식을 듣고 나를 그리고 우리 가족을 위해 깜짝 이벤트를 준비했다고 하셨다. 산모님도 아이를 보고 싶으실 테니 채비를 해서 병실로 데려오겠다고 해주셨다. 나는 눈물을 흘리면서도 고개 숙여 간호사 선생님께 인사를 전하고 떨리는 두 다리로 다시 가족이 있는 병실로 향했다. 정말이지 둘은 운명공동체가 맞았나 보다. 그녀가 깨어나고 아이도 깨어난 것은 실로 기적이었다. 그리고 아이에게는 잠시 미안함이 생겼다. 그녀가 깨어난 그때 머릿속엔 아이에 대한 생각은 아주 잠시 사라졌었다.


내가 눈물을 훔치며 힘없이 병실의 문을 열고 들어서자 모두의 눈은 나를 향했다. 누구라도 먼저 입을 열어 무슨 일인지 채근하지 않고 내 입을 바라보는 8개의 눈을 보고 있자니 왜인지 모르게 귀여워서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내가 입가에 미소를 띄우자 무슨 일이 있었냐며 어머니가 먼저 조심스럽게 물었다. 나는 그녀에게로 다가가 손을 꼭 잡고 조금 있으면 우리 아이가 이리 올 것이라고 전했다. 그러자 아버지도 어머니도 아이도 기뻐하는데 그녀는 또다시 참았던 눈물을 흘렸다. 가족들의 위로로도 위안을 받긴 했지만 내심 계속 무섭고 두려웠다고 했다. 아버지와 어머니와 아이는 기대감에 가득 찬 표정으로 아이를 기다리고 나는 계속 소현의 눈물을 닦아주며 진정시키기 바빴다. 30분 정도 지난 뒤 ‘똑똑’하는 노크 소리와 함께 간호사 선생님께서 아이를 안고 병실로 들어오시더니 그녀의 옆에 아이를 가만히 눕혔다. 아주 조그맣고 건강한 딸아이였다. 아이가 침대에 놓이자 우리는 모두 머리를 한데 모으고 아이의 모습을 바라보고 그녀도 몸을 옆으로 뉘이고 아이의 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아까는 입 모양이 웃고 있었는데 어느새 잠에 들었는지 평온한 모습으로 잠을 자고 있었다. 꼬물거리는 아이가 너무 신기했다. 아버지와 어머니도 눈을 못 떼고 아이를 관찰하시다가 이내 어머니가 아버지를 쿡 찔러 잠시 빠져주자는 수신호를 하시자 두 분은 병실을 빠져나가셨다.


남겨진 우리 세 가족은 가운데 놓여있는 아이를 한참이나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아이는 새로 생긴 동생을 바라보고 나와 소현은 우리의 아이가 무사히 살아 돌아와 준 것에 감사하는 마음이 더해진 것 같았다. 아이의 이름은 사랑하는 마음이 나타났다는 뜻을 담은 이름으로 뜻 정(情) 자에 나타날 현(現)을 써서 구정현으로 지었다. 이로써 우리 넷은 사랑의 기적적인 힘으로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한데 뭉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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