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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결혼

8부 2막의 시작

by 정수윤세

시간이 흘러가는지도 모르는 새 무더운 여름이 지나 노란 은행잎이 바닥에 떨어지고 곧 칼바람이 피부를 찢을듯한 겨울이 찾아왔다. 크리스마스가 지나고 새로운 해를 맞이한 지 며칠 되지 않은 주말에 소현과 나는 강원도 인제의 자작나무숲으로 여행을 떠났다. 하얀 설원 중간 곳곳에 높이 솟아있는 하얀 자작나무들은 마치 제 피부가 눈인 것처럼 길쭉하고 반짝이는 자태를 뽐내었다. 숲에서 조금 걸어 내려오면 동화 속 산장처럼 생긴 펜션을 예약해 하룻밤을 묵었다. 그곳은 숲 속에 건물이 단 하나 있는 곳이어서 하얀 도화지의 중간에 그려진 집 한 채처럼 느껴졌다. 나무로 된 계단을 두 계단 오르면 통나무 껍질 색깔의 현관문이 나오고 문을 열고 들어가면 아담하지만 따뜻함을 잔뜩 품은 거실이 눈에 보인다. 바로 오른쪽에는 화목난로가 있고 그 옆에는 바깥을 내다볼 수 있는 통창이 있었고 동그란 테이블 양쪽으로는 꽃무늬가 수 놓인 흔들의자가 두 개 놓여 있었다. 신발을 벗고 거실을 걸을 때마다 삐그덕거리는 나무 소리가 정겹게 느껴졌다. 안방에는 조금 어울리지 않는 현대식 화장실이 딸린 침실이 있었다. 마치 원목처럼 보이는 프레임 위에 매트리스가 깔려 있었고 서랍이 두 개인 서랍장 위에 노란빛을 내는 고급스러운 스탠드 조명도 함께였다. 무엇보다 그 산장의 백미는 꽤 세월을 지나온 듯한 턴테이블과 LP 들이었다. 비록 아는 가수는 없었어도 겨울과 어울리는 음악을 틀어놓고 하얗게 눈 덮인 설원을 흔들의자에서 보고 있노라면 마음마저 하얗게 정화되는 느낌이 들었다.


화목난로를 쬐며 음악을 듣고 도란도란 이야기하다가 어느새 잠에 들었다. 침대에서 눈을 떠보니 옆에 있어야 할 소현이 보이지 않았다. 삐걱거리는 소리를 배경음악 삼아 거실로 나와보니 그녀는 검은색 실크 잠옷을 입은 채로 서서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이미 쌓여있는 눈도 많았는데 수없이 흩날리며 내리는 눈을 집중해서 보고 있었다. 내가 옆에 다가와있다는 사실도 모르는 듯했다. 그녀를 조용히 뒤에서 지켜보다 천천히 다가가 그녀의 뒤에서 어깨를 안았다. 깜짝 놀란 그녀는 언제 일어났냐며 창밖을 가리키며 천진난만한 아이처럼 웃었다. 지리적 특성상 아랫지방에 사는 탓에 눈이 내리기는 해도 많은 눈을 보기는 어렵고 오늘처럼 온 세상이 하얀 느낌은 처음 본다고 했다. 그녀는 나중에 언제라도 나이가 들면 이런 곳에서 살고 싶다는 소망을 내비쳤다. 나도 언젠간 나이가 들고 은퇴하고 나면 시골에 집을 지어 강아지를 기르며 살고 싶다는 마음은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이유는 그런 단순한 이유가 아니었다.


“이렇게 온 세상이 하얀 걸 보고 있으면 더러워졌던 내 마음속 도화지가 다시 깨끗해지는 기분이 들어! 1년 동안 해지고 찢어졌던 내 마음이 치료되고 다시 새것이 된 것 같잖아!”


정말이지 도시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는 풍경이었다. 나뭇가지 위로 소복하게 쌓인 눈과 사람과 동물들의 발자국 하나 없는 드넓은 새하얀 설원은 서편으로 넘어가는 햇볕에 반사되어 눈이 부실 정도로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우리는 화목난로를 켜고 잔잔한 음악을 들으며 따뜻한 차를 사이에 두고 흔들의자에 걸터앉았다. 그녀의 시선은 계속 밖을 바라봤다. 따뜻한 차를 양손으로 움켜쥐고 마시는 내내 입꼬리가 내려오지 않았다. 그렇게 좋으냐는 내 질문에도 고개만 끄덕이며 잠시도 바깥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왠지 모르게 문득 그런 순수한 마음을 내가 곁에서 평생 지켜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1년 하고도 6개월을 넘게 만나 오면서 소소하게 다툴 때도 있었지만 얼굴을 보면 항상 마음이 눈 녹듯 녹아내리곤 했었다. 무엇보다 내가 진심으로 마음을 묻고 내 마음을 물어 봐주고 공감해주는 사람과 험난한 세상을 함께 살아가는 건 큰 도움이 될 것 같았다. 내심 기대감을 품고 가볍게 툭 던지듯 그녀에게 이야기했다.


“소현아.. 우리 같이 살까?”

“헤헤 지금도 같이 살고 있잖아!”

“아니 그런 거 말고 앞으로 평생 같이 살자고”


소현은 창밖을 바라보던 시선을 거두고 동그란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내 입에서 나온 말이 진심인지 묻고 싶은 표정이었다. 잠시 후 양손에 쥐고 있던 차가 담긴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더니 내가 앉아있던 의자로 걸어와 내 허벅다리에 앉아한 손으로 내 목을 감싸고 나의 눈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우리는 눈싸움을 하듯 서로의 눈빛을 거두지 않았다. 우리는 그렇게 삼계탕으로 시작한 인연에서 부부의 연을 맺게 되었다. 나는 사실 재혼이었지만 처음과는 확연히 달랐다. 여자의 평생 한 번 있을 로망인 결혼식을 그녀는 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대신에 우리는 조그만 숲 속에서 손가락을 걸고 약속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서로에게 털어놓고 함께 짐을 짊어지겠다고.


내 부모님은 얼마 전에 다시 결혼이라는 제도에 묶이지 않으면서 같이 살게 되셨다. 각자의 인생을 10년 넘게 살아보니 본처나 남편의 소중함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부모님의 각자 인생에는 서로 침범하지 않기로 합의를 보셨다고 했다. 아마 노년을 즐기는 방법으로 적절한 방법으로 보였다. 자식인 나에게도 긍정적이었다. 따로 사는 부모님을 서로의 눈치를 보며 챙기지 않아도 되고 혹여 가끔 몸이 안 좋으실 때도 서로 챙겨드릴 수 있으니 인생 말년에 더없이 좋은 관계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우리 부모님께 소현을 처음 소개해 드리던 날이 기억이 난다. 활짝 웃으며 인사를 건네는 소현을 보자마자 한 번도 본 적 없는 함박웃음을 지으실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아니 본인의 아들보다 더 좋아하셨다. 마치 내가 사위고 소현이 친딸 같았다. 그녀는 내 부모님에게 시아버님, 시어머님이 아니라 엄마, 아빠라 부르고 부모님도 더 기쁘게 받아 주셨다. 특히 어머니는 그녀를 만나기 전에 나를 통해 보육원에서 자란 아이라는 사실을 들었을 때만 해도 반대하는 쪽에 가까웠으나 직접 만나본 뒤로는 자신이 반대했다는 사실마저 잊으신 것 같았다. 시간이 갈수록 넷이 함께하면 오히려 내가 질투심을 느낄 정도로 가까워져 있었다. 행복했지만 부모님은 아무래도 어른들이시라서 그런지 내심 손자 혹은 손녀가 보고 싶다며 넌지시 말을 하기도 했는데 그때마다 우리는 노력하는 중이라는 말로 핑계를 대신했다.


실제로 금슬도 나쁘지 않았고 주기에 맞춰 아이를 갖고자 시도를 해보았음에도 좀처럼 아이가 생기지 않았다. 아이는 삼신할머니께서 점지해주신다더니 우리에겐 아직 점지를 해주실 때가 아니라고 생각하셨던 걸까? 부모님을 만나 뵙고 와도 항상 표정이 밝던 소현인데 그 말을 들은 뒤로는 약간 부담을 느끼는 것 같았다. 나는 그때마다 부담 가질 필요 없다며 다독여 주었다. 결혼생활이 6개월을 넘어 1년이 지나도 특별한 소식이 들려오지 않았다. 그녀를 대할 때 부모님의 태도는 변함없으셨지만 내심 바라던 손녀 손자에 대한 기대는 많이 내려놓으신 듯했다. 그녀가 자리에 없을 때 아버지는 어디서 아이라도 하나 데려오라며 웃으며 농담처럼 내게 말씀하시곤 했다. 나도 웃고 넘겼었는데 세월이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잊고 살았던 보육원에 있던 그녀가 사랑하는 소현이의 존재가 떠올랐다. 바로 그녀에게로 달려가 생각이 어떤지 묻고 싶었다. 지금은 6살쯤 되었을 아이를 우리의 아이로 데려다 키우는 일은 그녀도 기뻐할 거라 생각했다. 그날 밤 퇴근하고 돌아온 후 식탁에 앉아 저녁 식사를 한 후 언제나 그렇듯 소파에서 내 어깨에 기대어 TV를 보고 있던 그녀에게 물었다.


“소현아 우리 애 말이야..”

“응.. 오늘은 주기가 아닌데..”

“아, 그게 아니라, 우리.. 소현이를 데려오는 건 어떻게 생각해?”


그녀는 내 말을 듣더니 깜짝 놀란 듯 내 어깨에 기대 있던 얼굴을 떼더니 금세 눈물이 그렁그렁 해졌다. 순간적으로 자신이 아이를 못 낳아서 데려오자고 해서 오해했나 싶어 다독여주려 안으려 하자 그녀는 내 손을 붙잡더니 고맙다며 눈물을 흘렸다. 사실 그녀는 예전부터 소현이를 볼 때마다 자신이 결혼하게 되면 같은 집에서 살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지만 나에게 미안해서 그리고 친손자나 손녀를 보고 싶어 하는 우리 부모님에게 죄송한 마음이 들어 직접적으로 말하지 못하고 있었다고 했다. 심지어 혹시 소현이를 자신이 낳은 아이라고 부모님이 오해하실까 두려웠다고 했다. 또한 그런 마음을 가져선지 우리가 아무리 금슬이 좋더라도 아이가 생기지 않는다고 생각해 자책한 적도 많았다고 했다.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고 토닥여주었다. 모두 털어놓고 살자고 했음에도 역시 말하지 못할 비밀은 있구나 싶었다. 우리의 마음은 정해졌음에도 한 가지 난관이 남아있었다. 바로 부모님의 허락이었다. 우리가 아무리 좋다고 해도 가족이라는 현실이나 관계는 어른이신 부모님의 의견을 아예 무시하긴 어려웠다. 장난으로 던졌을 아버지의 말에 진심으로 덤비는 아들 내외의 행동에 조금 충격을 받으신 것 같았다. 아직 나이가 많지도 않은데 굳이 그럴 필요가 있냐며 우리를 타이르듯이 말씀하셨다. 그래서 나는 부모님도 그녀를 만나기 전엔 안 좋아하셨던 것처럼 아이 소현이도 보면 좋아하실 거라고 말씀을 드려도 쉽게 설득이 되진 않았다. 어렵게 보육원의 외출 동의를 얻어 그녀와 나는 소현이를 데리고 우리 집으로 찾아갔다. 아이 소현이는 시간이 지나도 그대로 예뻤다. 내가 낳은 딸이 아닌데도 내 자식같이 예쁘고 편안했다. 몸만 조금 커졌을 뿐 조잘대는 말이나 행동에는 변함이 없었다. 우리가 함께 가보지 않을래? 하는 제안에도 고민하지 않고 고맙게도 마음을 열어주었다. 부모님이 계신 집 앞에 도착해 우리는 심호흡을 하고 소현이의 양손을 붙잡고 집으로 들어갔다. 우리 부모님은 웃으며 우리를 맞아주시다가 아이를 보고는 살짝 표정을 굳히셨다. 어머니는 실망이 크셨는지 아예 방문을 닫고 들어가셨다. 여전히 소현이는 그녀의 옆에 붙어서 조그만 입으로 오물거리며 식사하고 있었다. 그때 조용히 아버지가 나를 옆방으로 불러내어 말씀하셨다.


“네 엄마가 저렇게 싫어하는데 기어코 입양을 하겠다고? 갓난애도 아니고 저만큼 큰애를?”

“네.. 아버지께서 원하셨었잖아요”

“아니 그건! 장난처럼 해본 말이었지 진짜로 그러란 얘기가 아니었지 않느냐!?”

“저희한테는 직접 낳은 아이처럼 소중한 아이예요 그러니 아버지가 힘 좀 써주세요”

아버지는 짧게 혀를 쯧 하고 차시더니 고개를 내저으며 어머니가 있는 안방으로 들어가셨다. 그녀도 눈치로 무슨 이야기들을 했는지 알겠다는 듯 눈빛으로 메시지를 보내었다. 식사를 마친 후 거실에 둘러앉아 사과와 포도를 먹으며 TV를 보고 있었다. 아버지가 설득을 좀 하셨는지 무표정한 얼굴로 두 분도 나와서 거실에 앉아 조용히 과일을 드시며 TV를 쳐다보았다. 숨 막히는 정적 속에 아이도 어른들의 분위기를 살폈다. 아이는 우리 부모님의 눈치를 조심스럽게 보더니 그녀의 귀에 귓속말로 뭐라고 말을 하고 나한테로 와서 내 귀에도 속삭였다. 근데 너무 작은 소리로 말하는 바람에 무슨 말을 했는지 명확하게 알 수는 없었는데 그건 그녀도 마찬가지인 눈치였다. 그저 아이가 말하니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다.


아이는 내게 말을 끝내고 벌떡 일어나 배시시 웃더니 어머니께 다가가서는 아주 당당하게 말했다. “할머니 저 안아주세요”라고 했다. 어머니는 당황한 눈빛으로 우리를 살짝 쳐다보시더니 이내 팔을 벌려 아이를 안아 자신의 무릎에 앉혔다. 어머니의 품에 안긴 아이는 조그마한 손을 펼쳐 포도알 한 송이를 어머니께 내밀었다. 어머니도 나도, 그녀도, 아버지도 예상치 못한 아이의 행동에 살짝 미소 지으시곤 입으로 포도를 받아 드셨다.


“맛있어요~?”


어머니와 눈을 맞추고 배시시 웃으며 묻는 아이의 물음에 어머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도 활짝 웃었다. 포도를 우물우물 씹으시던 어머니의 표정이 갑자기 울상이 되셨다. 그러더니 아이를 품에 꽉 껴안고는 눈물을 흘리셨다. 잠시 품에 안겨있다가 어머니가 팔에 힘을 풀자 아이는 내게 휴지를 달라고 하더니 작은 손으로 네모나게 접어서 직접 어머니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아버지와 나, 그리고 소현이는 그 모습을 말없이 바라보고만 있었다. 아이는 어머니의 눈물을 닦아주고 그 작은 양팔을 벌려 어머니의 목을 감싸 안았다. 그러자 어머니도 아이를 다시 껴안고 펑펑 우셨다. 눈물은 전염이 된다고 했던가 나도 눈물이 차올랐다. 그녀도 몰래 눈물을 훔치고 아버지도 눈가가 빨개지셔서 참으시려는 듯이 화장실로 달려가셨다. 아이를 보면 맘에 들어하실 것이란 걸 분명히 알고는 있었지만 이런 상황이 될 거라곤 상상하지 못했다. 내가 처음 보육원에 방문했던 날 아이가 내게 알려주었던 진심 어린 마음과 사랑이 순식간에 우리 모두를 동화시켰다.


보육원 입양 절차는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법적 절차도 필요했고 입양에 관련한 교육도 이수해야 했으며 아이의 정보에 대해서도 자세히 알고 있어야 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드디어 소현이가 정식으로 우리 가족이 되었다. 피는 섞이지 않았어도 전혀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다. 심지어는 외모도 소현이가 직접 낳은 딸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닮아있었다. 이름도 바꾸지 않고 성만 우리나라 법에 따라 나의 성을 따라가기로 했다. 처음에 아이는 우리를 엄마, 아빠, 할아버지, 할머니라 부르는 것을 굉장히 어색해했다. 할아버지 할머니는 오히려 조금 익숙한 데 반해 엄마, 아빠라는 존재는 아이에게는 없었던 일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잊지 않았다. 충분히 적응할 시간을 주고 절대 채근하지 않았다. 아저씨, 선생님으로 불려도 그저 행복하기만 했다. 같이 손잡고 공원을 산책하고 키즈카페에 가서 뛰어놀고 놀이터에 가서 미끄럼틀도 타고 소소한 일상들이 우리 가족 모두를 행복하게 했다. 부모님도 우리 집에 자주 왕래하셨다. 반대하셨던 분들이 맞기나 한지 그녀를 딸로 맞던 때와 똑 닮아있었다. 현관문을 여시는 순간부터 아이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셨다. 우리 부부는 밥을 먹든 말든 무엇을 하든 상관도 하지 않으시고 심지어는 아이를 맡기고 둘이 여행 좀 다녀오라며 여행까지 장려하셨다.

빨갛게 물들었던 단풍이 낙엽이 되어 떨어지던 가을이 지나고 다시 추운 겨울을 맞았다. 우리 가족은 소현과 함께 결혼을 약속했던 강원도 인제의 펜션을 찾았다. 이번엔 셋이었다. 결혼을 약속하던 그때 그날만큼 눈이 많이 오지는 않았지만 이미 쌓인 눈으로 온 세상이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소현이 둘은 날씨가 추운지도 모르고 눈밭에서 뒹굴며 재밌는 한때를 보냈다. 나는 그녀들을 위한 따뜻한 음료를 마련해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두 모녀는 얼굴과 코와 광대뼈가 빨개진 채로 눈을 털며 거실로 들어왔다. 아이의 외투를 벗겨주고 따뜻한 물로 같이 씻고 나오는 시간에 맞추어 따뜻한 코코아 두 잔을 준비했다. 아이는 욕실에서 나와 입혀주는 옷을 입고는 방으로 달려 들어가더니 조그만 자신의 가방에서 무엇을 찾는 듯 뒤적거리더니 반듯하게 두 번 접힌 하얀 종이 한 장을 들고 나왔다. 그러곤 무심한 듯한 태도와 표정으로 종이를 나에게 말없이 전해주더니 잔에 담긴 따뜻한 코코아를 받아 들더니 그녀의 옆에 앉아 마셨다. 나는 영문을 모르고 있다가 아이가 전해준 종이를 가만히 펴 보았다. 그곳에는 그림과 한 줄의 메시지가 적혀있었다. 우리 부부가 양손을 잡고 산책하던 그림인 것 같았다. 밑에는 삐뚤거리는 글씨로 ‘아빠 엄마 사랑해요. 행복해요. 나를 데려와 줘서 고마워요’라고 적혀있었다.


나는 말없이 뚫어지게 종이만 바라보았다. 온갖 감정들이 내 몸속에 솟구쳤다. 내가 가진 단어나 말로 표현 못할 감정들이었다. 아무것도 모를 때 결혼했다가 이혼하고 지금까지 사람들을 만나오고 소현이를 만나 다시 결혼을 해서 입양을 한 이 순간까지 모두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작은 아이가 나에게 ‘아빠’라는 이름으로 불러준다는 것이 왠지 모르게 북받쳐 올랐다. 내가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종이만 쳐다보고 있으니 그녀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내 옆으로 다가와 종이의 내용을 함께 보았다. 아이는 반대편 흔들의자에 앉아 쑥스럽다는 듯 배시시 웃고만 있었다. 그녀도 나와 같은 감정의 소용돌이에 휩싸인 듯했다. 잠시 말없이 종이를 쳐다보고 있다가 의자에 앉아있던 아이를 번쩍 들어 올려 꼭 안아주었다. 나도 그 모습을 보고 두 소현이를 양팔을 벌려 있는 힘껏 꽉 안아주었다. 우리가 처음 보육원에서 함께 누워서 서로를 안아주던 그때의 기억처럼 그리고 바깥에 펼쳐진 하얀 설원처럼 앞으로 깨끗한 도화지에 행복한 그림을 그려갈 우리를 떠올렸다.


예상치 못한 경사는 하나 더 있었다. 그녀도 그동안 조심스러워 나에게 조차 말하지 못했었지만 배 속에 작은 천사가 찾아왔다고 했다. 혹시나 잘못되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다가 여행을 오게 된 오늘에서야 전해주려 했다며 웃는지 우는지 모르는 표정으로 내게 전했다. 아이도 동생이 생긴다고 하자 너무 기뻐했다. 항상 이곳을 찾으면 행복한 일이 생긴다며 소현이 두 명과 함께 뛰놀던 설원에 넷이 되어서도 꼭 함께 오자고 우리 세 식구는 새끼손가락을 걸고 약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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