運命
운명은 가끔 한 사람의 인생이 인간이 아닌 존재가 만들어 놓은 하나의 각본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러면서도 사람은 또 본능적 이기심에 좋은 일이 있을 때는 원래 가진 복이 발현되었거나 평소에 선행이나 좋은 일을 많이 해서 생기는 기쁜 일이라고 생각한다. 기쁨의 감정보다 보이지 않는 누군가에게 먼저 감사함을 표현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종교를 가진 사람이라면 기쁜 감정을 만끽하면서 믿는 신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표현한다. 종교를 믿지 않는 사람은 자신의 능력에 의해 일어난 일이라 여기기 때문에 자랑스럽거나 대견하게 생각한다. 운명이란 종교를 믿든 믿지 않든 중요하지 않다.
사람의 생명은 아무리 사회적 지위가 높거나 돈이 많아도 누구에게나 단 하나가 주어진다. 그렇기에 이미 정해진 운명을 살고 있는지 사람이 아닌 존재가 실재하는지도 전혀 알 수 없다. 죽고 나면 알 수도 있다고 하지만 어쩌면 죽어서도 모를 수도 있다. 주어진 생명을 다한 사람은 다시 돌아오거나 말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운명이란 여러 분야에서 쓰인다. 사람과 사람의 인연에서도, 직업이나 취미생활 등 많은 분야에서 사용이 되는데 처음에는 ‘운명’이라는 달콤한 사탕 같은 단어를 믿지 않았다.
일단 사람의 생김새부터 인생의 방향이 단 하나도 똑같지 않고 모두 다른데 어떻게 인간이 아닌 존재라고 한들 60억 명이 넘는 지구의 사람들의 인생을 정해놓는단 사실이 믿기 어려웠다. 물론 인간의 논리에서 생각하니 한계가 있다고 여기는 선입견이 작용한 탓도 있다. 살면서 고난의 순간을 겪다가 빠져나와 환희의 순간에 접어들 때 이런 게 운명이 아닐까 생각했었다. 정말 간절히 바라던 일이 성사되지 못했는데 그에 상응하거나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새로운 길이 열리는 상황이나 아니면 좋아하는 마음만 간직했던 사람이 생각지도 못한 때에 호감을 표시한다거나 하는 기분 좋은 일을 경험할 때마다 운명은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은 점점 긍정적인 확신이 되어주었다.
그럼에도 과거보다 강한 고통이나 고난을 안겨주는 일이 있을 때면 다시 운명을 믿지 않았다. 참 간사한 마음이었다. 원할 때는 운명이라고 찬양하고 원하지 않을 때는 마치 손에 쥐고 있던 물건을 손가락의 힘을 풀어 쉽게 내려놓는 듯이 그렇게 운명을 대했다. 혹자는 운명은 정해져 있다고 해도 사람의 의지로 바꿀 힘이 있다고 한다. 완벽한 운명론자는 아니지만 정해진 삶을 사는 것이 개인적으로 기분이 썩 좋지만은 않은데 어렴풋한 과거의 기억을 더듬어보면 퍼즐이 맞춰지듯 맞춰지고 깨달음의 순간처럼 소름이 돋는 일이 생겼다.
가장 가까운 실제적인 사례는 약 16년 전 짝사랑했던 친구가 있었는데 오 씨 성을 가지고 있었고 생일이 7월이었다. 그래서 그때부터 내가 기억하기 쉽게 인터넷이나 사용할 수 있는 비밀번호를 그 사람의 생일로 해두고 다녔다. 실제로 사귄 적은 없이 썸만 타던 관계에서 흐지부지되었던 관계임에도 어렸을 때라 그런지 기억이 꽤 강렬했다. 중간중간 연애를 하긴 했지만 엄청나게 오래 만난 사람은 2년이 최대였고 결혼 생활을 하던 전 아내와는 총 3년의 시간을 함께했었다. 이혼 후 마치 나를 기다린 운명의 사람처럼 나와 취미가 같으면서 2살 연상의 사람이 내게 힘이 되어 주고 싶다며 나타났다. 정말 어둡고 어둡던 과거의 나에게 무엇이 보였는지 의아했어도 힘이 되어 주고 싶다는 사람에게 의지했고 실제로 이혼의 아픔을 치유하는데 너무 큰 힘이 되어준 그 사람에게는 감사한 마음뿐이다. 함께 미래를 그릴 수 있다면 좋았겠으나 한 번 이혼을 겪고 나니 다시 결혼이라는 제도에 묶인다는 사실이 당시에는 무서웠다. 내 의견을 이해해 주면서도 본인이 그리는 인생이 있었던 사람이어서 그렇게 이별을 선택했다. 이별 뒤에도 한때는 그저 친구처럼 연락하곤 했었는데 지금은 물론 서로 다른 인생을 살고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인생을 놓아버리려 했던 나에게 운명처럼 나타난 사람이라는 사실이다.
또한 지금의 인생에도 사용하는 비밀번호를 정해준 그 사람과 같은 성에 같은 생일을 가진 사람을 작년에 만났다. 오 씨 성을 가진 사람이 우리나라에 76만 명이라고 하는데 적은 수는 아니어도 많은 수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또한 남자와 여자가 섞인 비율이고 연령대도 매우 다양할 것이기에 확률은 더 낮다고 보고 있다. 생일은 같고 나이는 같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오 씨 성을 가지고 생일이 같은 사람을 만난다는 확률은 운명이 아니고서는 표현할 길이 없어 보였다. 그래서인지 더 쉽게 더 깊이 빠져들었는데 그녀는 만난 지 1개월도 되지 않은 시점부터 평범한 사람과 뭔가 달랐다. 7개월을 만나고 이별을 내가 선택했는데 헤어지고 난 후 알게 된 사실은 나르시시스트였다는 점이다. 그녀는 사귀기로 하기 전까지는 대화가 잘 통하고 취향도 맞고 심지어 가치관까지 미래를 보는 관념도 비슷했다. 운명이라고 여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사귀기로 한 날부터 변한 그녀는 다른 사람이었다. 쉴 새 없이 남과 비교하며 비난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자신이 원하지 않는 메뉴라면 밥도 마음대로 먹지 못했는데 심지어는 모두 다 내 주머니에서 나온 돈이었다. 7개월을 만나며 그녀의 돈을 사용해 본 적은 단 한 번뿐이다. 숨 쉬듯 하는 가스라이팅은 연애의 감정을 느끼게 하지 못했고 가슴을 옥죄어오는 고통뿐이었다. 억압된 고통에서 벗어날 때도 쉽지 않았는데 3번의 시도 끝에 자유의 몸이 될 수 있었다.
내 모든 비밀번호를 차지하고 있는 그녀와 같은 생일과 성씨를 공유하는 사람은 운명이 맞았다. 운명은 내게 가르쳐준 것이다. 그때의 내가 좋아했던 사람도 미래를 함께 할 사람이 아니었음을 말이다. 비밀번호를 사용하되 과거를 회상하며 사귀자고 하지 못했던 아쉬움을 후회로 남길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 같았다. 소름이 돋았다. 제3자의 시선에서 보기에 억지로 끼워 맞추는 합리화의 일종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극히 낮은 확률에서 나타나는 고난 뒤에 숨어있는 찬란한 빛은 운명이 말해주는 이정표가 아닐까 싶었다.
정해진 운명대로 잘 흘러가고 있음을 말해주고 사람의 힘으로 운명을 바꾸려는 행동조차 이미 정해진 운명이 아닐는지 생각해 보게 되었다. 힘든 일을 겪을 때면 운명의 장난이라고 이야기하는 것 또한 나중에 추억할 기억의 조각들을 장난인 듯 에피소드를 만들어내고 있다고 느껴졌다. 전처럼 정해진 운명을 산다는 게 힘 빠지거나 시무룩해지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은 긍정적인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글을 쓰고 과거의 수많은 경험들이 있어서 앞으로의 인생사에 마음으로 좋아하는 일을 처음 찾았다는 자체도 운명의 이정표가 가리키는 대로 순항하고 있음을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인생을 살다 보면 불현듯 ‘이건 운명이 아닐까?’하는 순간들이 찾아오곤 한다. 그때가 비로소 운명의 이정표가 주어진 길을 잘 가고 있음을 확인시켜 주는 선물 같은 시간이 아닐까?
좋아하는 가수인 심규선 님의 콘서트의 멘트를 하나 공유해드리고 싶습니다.
너의 가느다란 손끝으로 운명을 선택해 남의 이해를 바라지 않아도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