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이루고 있는 것들
로아나 여왕의 신비한 불꽃을 드디어 다 읽었다. 처음 이 책을 구매하기로 마음을 먹었을 때부터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라는 예상은 했지만 그래도 이렇게까지 많은 시간이 걸리게 될 줄은 생각도 못했다. 역시 영어로 된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많은 시간과 집중력을 요하는 일임에 틀림없다. 평소에 독서하는 속도로 한국어판을 읽었다면 이런 정도의 양은 아무리 길어도 일주일을 넘기지 않았을 것이다. 마음먹고 읽는다면 출퇴근길의 지하철에서 읽는 것만으로도 3일이면 충분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책을 천천히 읽다보니 전체적인 흐름이 머리에 잘 들어오지 않아서 새로 책을 펼 때마다 지난번까지 읽었던 부분을 떠올려야만 했다. 그래서 한 번 책을 폈을 때 읽을 수 있는 분량이 줄어들게 된 것 같다.
이 책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 주인공이 자신과 관련된 기억은 잃어버리게 되고 자신이 책에서 읽은 것은 모두 기억할 수 있게 된 상황, 할아버지 때부터 모아온 장서들과 음반, 잡지 등의 매체를 통해 자신의 기억을 찾아나가고자 하는 여정, 그리고 다시 한 번 쓰러지게 되면서 지난 기억이 모두 살아나는 상황
자신의 부하 직원과의 관계를 기억해낼 수 없어서 당혹해 하는 얌보의 모습. 기억이 없는 사랑이란 무엇일까? 기억이 전제되지 않는 사랑이란 어떤 것일까? 오늘 지금 이 순간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내일 아무런 기억이 없이 다시 만난다면 지금과 같은 마음으로 사랑할 수 있을까? 그렇게 된다면 매일매일 떨리는 마음으로 상대에게 다가갈 수 있을까? 어느 순간 내가 모든 기억을 잃어버리게 되었다면, 내 아내를 다시 봤을 때 그녀를 이전처럼 사랑하게 될 수 있을까? 내가 아무도 모르게 몰래 사랑했던 사람을 보면서 ‘내가 저 사람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했었나? 저 사람과 나 사이에는 어떤 일이 있었을까?’하고 자문하게 된다면 어떤 기분일까? 아무리 생각을 해 봐도 기억이 뒷받침되지 않는 사랑이란 뭔가 빠진 듯한, 아니 본질적인 무엇인가가 결여되어 있는 듯한 느낌이다.
움베르트 에코 자신의 이야기가 아니라고는 상상할수조차 없는 자전적인 소설이다보니, 그가 어려서부터 겪어온 모든 생활의 단면들, 그리고 그의 사상적인 기반에 대해 잘 알 수 있게 되는 동시에 어린 시절에 전쟁을 겪은 세대들이 가지고 있는 지난날의 추억에 대해 많이 알게 된다. 특히, 전쟁을 겪은, 그것도 파시즘의 준동을 경험한 패전국인 이탈리아의 국민으로서 그가 회상하는 지난날의 추억은 자못 흥미롭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위태위태하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자신이 어려서 접했던 만화, 잡지, 라디오 등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가 나올 때는 그런 부분에 대한 배경 지식이 없는만큼 지루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지만 이 부분을 읽으면서 내가 어릴 적에 읽었던 책, 만화, TV에서 봤던 것들… 등등을 떠올려볼 수 있었고, 사실 딱히 떠오르는게 많지는 않았다. 떠오른다고 해도 에코가 묘사한 이런 정도의 묘사는 절대 불가능할 것 같고 다만 어렴풋한 기억과 빛바랜 이미지 뿐이었다.
캐산, 철인 28호, 독수리 오형제, 우주소년 아톰, 그랜다이저, 이상한 나라의 폴, 요술공주 밍키, 모래요정 바람돌이, 84 태권브이, 그리고 무엇보다 은하철도 999! 에어울프와 제트카, 에이특공대, 말괄량이 삐삐, 600백만불의 사나이, 바야바, 그리고 무엇보다 브이! 고교야구의 인기와 프로야구의 시작, 땡전뉴스, 조용필과 전영록, 이용, 이은하, 혜은이. 86 아시안게임과 88 올림픽. 앙드레 지드의 좁은문과 추코프스키의 은빛 시절, 그리고 정비석의 삼국지. 선데이서울과 건강다이제스트.
중학교 시절의 애국조회. 교련복을 입은 연대장 (학생회장이 아닌). 무지막지한 구타. 한 반에 60명 한 학년 18반이었던 남자중학교. 전교조 사태와 학생들의 시위. 황순원의 소나기를 읽어주시던 미술 선생님. 광야에서와 아침이슬. 클래식 크롬 테이프와 황인용, 요요 카세트로 듣던 별이 빛나는 밤에. 그렇지만 무엇보다 중학 시절의 나를 사로잡았던 것은 주찬양 선교단, 그리고 첫 사랑…
20년 전의 기억을 떠올리면서 ‘벌써 20년?’하고 놀라게 되지만 소설 속의 얌보와 같이 60이 넘은 나이에 그 시절의 추억을 옛 자료로부터 찾아나가야 하는 상황이 된다면? 아마도 추억의 먹거리, 혹은 남이섬에 있는 추억의 박물관 같이 70년대 후반과 80년대의 물건들을 보며 느끼는 어떤 느낌들을 받게 될 것이다. 나는 그런 느낌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 편이어서 그런 장소가 있어도 잘 들어가보지도 않지만 그런 문화들이 지금의 나를 형성해오고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을 터이다.
얌보가 안개에 대해 가지고 있는 생각들의 근원을 알 수 있는 어릴적 경험. 아무래도 내게는 생소한 이야기일 수 밖에 없지만, 우리 부모님 세대에게 이야기를 듣는다면 이것보다 훨씬 더 영화같은 이야기들을 많이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전쟁이 무엇인지 모르는 세대는 전쟁에 대해 이야기를 할 수 없을 터. 나라를 잃은 경험과 전쟁에 대한 경험은 영화보다 더 영화같은 이야기거리일 수 밖에 없지만, 그것이 사람의 삶을 얼마나 극적으로 그리고 크게 바꿔놓는지에 대해서 새삼 말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남자가 작가인 이상 여자의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고, 얌보의 기억에서 마지막까지 흐릿하게 남아있었던 것은 바로 첫사랑의 얼굴이었다. 첫사랑이라는 것이 정말 존재하는걸까? 누구나 첫사랑의 아픔 혹은 사연을 가지고 있겠지만, 첫사랑의 상대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란 거의 없을 것이다. 내 경우에도 그랬지만, 첫사랑의 대상은 그야말로 그 때까지 자신이 만들어온 가장 이상적인 이성의 모습을 상상속에서 그리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본질을 알지 못하고 하는 사랑이란 항상 공허할 수 밖에 없고, 아름답게 기억될 수는 있을지언정 깊이있게 기억될 수는 없는 법이다. 그래서 첫사랑은 잘 이루어지지 않고,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더욱더 상대를 상상 속의 존재로 만들게 된다. 아무리 노력해도 가질 수 없는 존재라면, 아예 가질 수 없어서 아름다운 것이라고 생각하는 편이 훨씬 빠르니까. 그래서 상대에 대해 무엇인가를 알게 되는 것, 상대방이 나의 상상 속에 존재하는 이상적인 존재에서 현실적인 존재로 바뀌게 되는 일은 피할 수 밖에 없게 된다. 갈 수 없는 섬이 아름답고, 가질 수 없는 것이 가치있는 것이다.
첫사랑? 어디 그 뿐이겠는가. 나를 둘러싸고 있는 욕망과 타협을 하는 순간 그것은 관념의 존재가 되어 버리는 것을. 그것은 나를 아름답게 만들어주기도 하고, 때로는 답답하게 만들어주기도 하지만, 그런 정도의 욕망의 대상조차 가지고 있지 않다면 도대체 그 삶이 얼마나 무미건조한 것이 되겠는가!
2008년 10월 8일 https://lordmiss.com/journal/archives/3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