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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하 Oct 29.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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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은 열린 결말이지만.

두려움이 막아서는 밤들이 있다. 어제도 그런 밤이었다. 눈을 감아도, 아무 생각하지 않아도, 평온한 공기 속에서 불쑥 제 집 찾아오듯 익숙한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잠들어도 되겠어? 잠을 잔다는 것은 죽음을 연습하는 거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이젠 연기하다 안 되니까 글 쓰냐? 왜 배우들은 연기하다 안 되면 글 쓰네 연출합네 하는지 모르겠어.

포기할 용기가 없었던 거 아니야? 나이 그만큼 먹었으면 포기할 줄도 알아야지.

꿈이 아니잖아. 도망치는 중이잖아.


가시처럼 박혀있는 말들이. 정곡을 찔러서 차마 뽑아낼 엄두조차 내지 못했던 말들이 두려움의 시간을 먹고 자라 자아가 된다. 뽑아낼 방도를 모르고, 바라볼 배짱이 없어 손 놓고 무력하게 내버려 뒀던 순간들이 혈관을 타고 돌아 나와 함께 숨을 쉰다. 뽑아낼 수 없겠구나. 이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구나.

실패로 점철된 삶에서 가장 내세울 수 있는 것은 실패였다. 너희들이 내가 가진 재능이구나. 너희들을 내 삶의 주인공으로 만들 수는 없어. 아직 내 삶을 실패작으로 만들 순 없어. 하지만 내가 만든 세상이라면 너희들에게 역할을 줄 수 있겠지. 너희들을 전면에 내세워 나를 증명하겠다. 내 안에 박혀있는 가시들에게 배역을 준다. 너는 주인공. 너는 빌런. 하지만 끝내 너희들조차 빛을 보지 못한다면. 내가 그조차도 실패한다면. 내가 실패를 실패한다면. 어쩌지. 난 어쩌면 좋지.


태어날 가치를 증명받지 못해 오직 글쓴이인 나만 재밌고 나만 감동받는, 내 노트북 안에서만 살아 숨 쉬는 글. 난 무능한 신이다. 싸구려 글들을 박리다매하듯이 무식하게 생산만. 매일매일 생산만. 팔리지도 않는 쓰레기를 덕지덕지 진열하는 나의 무능은 실패가 주는 교훈에 대한 모독이자 죄악이었다. 난 무능한 신이자 죄악이다.


진실하게 말한다면 꿈이 있으면 좋아. 라고만 말해줄 수는 없다. 꿈이 있어서 불리한 순간들은 늘 존재하고, 꿈은 때때로 삶에 치명적인 균열을 만들기도 한다. 브런치에 작가 신청을 할 때 내가 썼던 문장 중에 그런 문장이 있었다. 마흔으로서 응당 가지고 있어야 할 모든 것이 없습니다. 가진 거라고는 꿈밖에 없는데요? 꿈을 꾸는 것을 두려워하는 이들에게 나를 보여주겠다고 했다. 나를 보여주며 희망을 주겠다고 했다. 거짓말이다. 난 나의 브런치가 어떤 결말을 맺게 될지 모른다. 꿈을 꾸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는 인생역전 희망 에세이쯤 될 수도 있겠지만, 한평생 꿈에게 처절하게 유린당한 어리석은 몽상가 1로 엔딩을 칠 수도 있다. 에세이가 작가의 주제의식에 부합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기에 꿈에게 저당 잡힌 순간들의 기록을 적는다.

꿈을 좇는 사람은 언젠가 자신보다 꿈을 더 사랑하게 된다. 그렇게 꿈에게 나의 시간을, 노력을, 열정을, 영혼을. 모든 것을 가져다 바친다. 그래도 꿈은 늘 허기지다. 꿈이란 그렇게나 탐욕스럽다. 나는 꿈을 꾸는 삶의 기쁨을 이야기하는 행복전도사가 아니다. 오히려 끊을 수 없는 중독성을 파는 마약상에 가깝다. 꿈을 꾸는 것은 마냥 동화처럼 행복한 것이 아니다. 삶을 돌이킬 수 없이 망가뜨릴 수도 있다는 꿈에 대한 나의 양심적 기록을 남긴다.


잠을 잔다는 것은 죽음을 연습하는 거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피터팬은 늙지 않고 죽었으려나. 진실이 원래 엉망진창이란 것을 알고 나면, 피터팬에 대한 판타지가 끔찍할 수도 있다는 가정을 하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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