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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하 May 29. 2023

우리 모두 좋아하는 군대 얘기

양심상 군대에서 축구한 얘기는 생략

외가에는 나와 비슷한 또래의 여자 사촌들이 있다. 지금이야 그들도 애엄마고 개중에는 세월을 정통으로 맞은 친구도 있긴 하지만 전성기 땐 그녀들도 꽤 준수한 미모를 가진 남부러울 것 없는 소녀들이었다. 가끔 나 전지현 닮지 않았냐는 돼먹지 않은 소릴 해서 그렇지.


한 번은 사촌 한 명이 내가 군대에 있던 시절 면회를 온 적이 있다. 그때 내 사촌을 보고 환호했던 부대원들의 얼굴을 잊을 수가 없다.


'멍상병님! 충성을 다하겠습뉘닷! 충성!'

'멍상병님! 출출하시지 말입니다? 제가 px 가서 냉동 사 오지 말입니다?'

'멍상병님! 저 여자한테 완전 자상하지 말입니다! 여자한테 완전 착한 남자이지 말입니다?'


망할.. '말입니다' 좀 그만해. 이시끼들아.

사촌이 왔던 그 시기가 내가 고참들의 갈굼으로 허덕이던 이등병 때였다면 난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예수를 팔아넘긴 유다처럼 내 사촌의 연락처를 팔아넘겼을 테지만, 난 이미 상병이 꺾여 나는 새도 떨어뜨릴 때였다. (상병이 꺾였다는 건 보통 상병 4~5개월쯤을 얘기하는 건데, 이때가 부대 안에서 가장 막강한 권력을 휘두를 때다.) 총 60여 명 되는 부대 안에서 동기들이 무려 17명이나 됐기에 우린 말 그대로 실세 중에 실세였으므로 사촌의 연락처를 누군가에게 조공할 필요 따위 전혀 없었던 것이다. 덕분에 내 사촌은 그 악마 같은 까까머리들의 위협으로부터 안전할 수 있었지만, 결국 내 군생활에 별 도움은 안 되면서 군부대에 강림한 군통령 아이돌처럼 본인 자존감만 가득 채우고 돌아갔다.


군대라는 곳은 인생의 압축본 같은 흐름이 있는데, 처음에 이등병으로 들어오면 걸음마 배우는 갓난아기처럼 모든 것이 처음부터 다시 시작된다. 밖에서 공부를 잘했든 명문대든 재벌집 막내아들이든 일단 작대기 하나 이마에 박고 들어오면 내가 그동안 살던 세상과는 전혀 다른 이상한 나라의 이등병이 되어 숟가락 잡는 법부터 병과훈련까지 모든 것을 새롭게 배우게 되는 것이다. 부대마다 케바케지만 대부분 이등병은 px도 혼자 못 간다. 이등병끼리 다니는 것도 제한된다. 일병 이상의 계급을 단 병사와 함께 다녀야만 한다. 군대에 적응하기 힘든 이등병의 탈영을 방지하기 위해 이등병을 최대한 혼자 두지 않으려는 군대의 오래된 방침이 이상한 똥군기로 변질된 거지만 이런 것들이 이곳의 사회적 합의이자 룰이고, 이런 규칙들이 규범으로 자리 잡은 세상이기 때문에 기존에 내가 살던 세상의 상식은 거의 먹히지 않는다. 난 고참되면 이러지 말아야지. 기약 없는 다짐을 하며 일단 닥치고 엄마 같은 일병의 손에 이끌려 쭐래쭐래 px를 가는 수밖에.


보통 일만 해서 일병이라는 말이 있다. 일병이 되면 말 그대로 일만 하게 된다. 이제 군대라는 세상이 어떤 곳인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고 웬만큼 적응이 되었기 때문에 이때부터 군대 내에 모든 살림을 도맡아 하며 본격적인 노동력 착취를 당하게 된다. 군대의 모든 일을 하나씩 배우게 되는 이 시기에 농땡이를 부리거나 제대로 배우지 못해 일병 5호봉쯤 됐을 때 뭔가 하나라도 잘 못하거나 어설픈 모습을 보이면,


'모르면 군생활 끝나냐?'

'이새퀴 짬밥 똥꼬로 쳐먹었네?'


군대에 가지 않은 사람들도 익히 아는 유명한 명언들을 대충 이 시기에 몰아서 듣게 된다. 고참들 눈치 보며 잡일이란 잡일은 도맡아 하는 가장 일을 많이 하고 가장 부지런해야 하며 가장 센스 있어야 하고 그 와중에 새로 들어온 이등병들도 열심히 챙겨야 하는 인류애도 발휘해야 하는 구간이다. 주변에 누가 일병이라고 하면 잘해줘라. 일병들이 있기에 군대가 돌아갈 만큼 일을 많이 하지만 그만큼 갈굼도 제일 많이 당해서 하는 일에 비해 대접이 시궁창이라 일병들은 대부분 서럽다. 곰신들이 이별을 고하는 타이밍도 주로 남친 군대 간 지 1년 정도 됐을 때라 이 역시 기가 막히게 일병 때다. 여러모로 고난과 역경이 많다. 일병은.


그러다 상병을 다는 순간 거짓말처럼 군생활이 180도 바뀐다. 고참들도 그동안 함께 고생한 사람들이거나 그간 나의 고군분투를 알아주는 사람들만 남아서 일병 생활을 성실하게 잘했다면 고참들도 나의 능력이나 고생을 인정해 주고 드디어 한 사람의 인격체로 대우를 하기 시작한다. 그동안 선임과 후임 사이로 선을 그었던 고참들과의 관계가 형동생이나 친구처럼 변하기 시작하고, 일병 때 도맡았던 수많은 업무들이 밑에 일병들에게 위임되면서 적응하기 힘든 자유를 맛본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후임들을 관리하는 입장이 되면서 사실상 군생활에서 가장 어려운 시기가 찾아온다.

관리자가 되면 통솔권이 주어지고, 권한이란 힘이 있기에 필연적으로 권력이 된다. 그래서 상병이 되었을 때 가장 잘해야 하는 것은 인간관계다. 이미 후임들이 3~40명 이상이 되기 때문에 평시 업무 (대체로 작업이다. 하루 종일 낫 들고 풀을 베거나, 삽 들고 떼를 입히거나, 눈 오면 눈 치우고, 배수로 파고.. 이런 일이 정말이지 매일 같이 산재해있다.) 는 물론 안전사고를 절대적으로 조심해야 하는 훈련 상황까지, 후임들에게 칼 같은 통솔력을 발휘해야 하는 순간이 수시로 닥친다. 훈련이든 작업이든 그렇게 30명 되는 인간들을 통솔하다 보면 알게 된다. 갈굼만으로 사람들을 지휘하는 것이 얼마나 하책인지. 엄격할 땐 엄격하다가도 나의 지휘에 적극적으로 호응할 수 있도록 하려면 결국 인간관계를 잘 형성해 두는 것이 가장 상책이다. 그래서 상병이 되면 후임들 갈굴 일도 많고, 달래줘야 할 일도 많다. 나도 그때 처음 알았는데, 누구 갈구는 것도 엄청 귀찮고 피곤한 일이다. 아끼는 후임을 갈궈야만 하는 순간이 오면 읍참마속이란 말을 실감하기도 한다.

종종 간부나 나보다 계급이 높은 선임의 부당한 조치로부터 내 직속 후임들을 보호해야 하는 순간들도 있다. 그래서 이제 친구처럼 지내게 된 선임들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그래야 협조를 요청하거나 부당한 조치에 직면했을 때도 원활하게 대응할 수 있다. 이렇듯 상병이 되었을 때 20대의 젊은 나이에 권력이란 어떤 것인지를 체험해 볼 수 있게 되고 사실상 그 사람의 인격이 판가름 난다. 권력을 손에 쥐었을 때 영향력에 집중하는 사람과 책임에 집중하는 사람이 극명하게 구분되고, 착한 고참이 되겠다던 이등병들은 악명이 자자한 상병으로 진화하기 일쑤다. 또한 일병 시절에 농땡이를 부려 평시든 훈련이든 실전업무에 미숙함이 있다면 통솔력에 큰 구멍이 생기게 되고 (일명 고문관) 후임들의 신뢰를 얻기 힘들어진다. 그럼 결국 갈굼과 괴롭힘에만 의존하는 공포정치의 악순환에 빠진다.


병장은.. 거의 둘 중 하나다. 노인네가 되거나 개그맨이 되거나. 이젠 터치하는 사람도 없고 막중한 임무도 대부분 내려놓게 된다. 뺑끼쓰는 법은 만렙이 돼서 어떻게 하면 작업에서 열외가 될 수 있는지, 아님 어떻게 꿀작업을 맡아 하루를 편하게 농땡이 칠 수 있는지, 군대 안에서 어떻게 하면 투명인간처럼 귀찮은 일없이 무사안일하게 보낼 수 있는지 귀신같이 알기 때문에 맨날 어디 알 수 없는 곳에 쳐박혀 노인네처럼 누워있거나, 기나긴 군생활을 버티다가 뇌에서 생존을 위해 분비한 도파민으로 인해 개그맨이 된다.

하지만 우리 삶에서 노인들이 맨날 누워있거나 농땡이만 부리지 않듯이 병장들도 해야 할 땐 하는 게 있다. 상병들을 돕는 일. 상병들도 때론 못하는 게 있고, 통솔에서 애를 먹을 때가 있으니까. 그때 부대 안에서 가장 경험이 많고 나름 군대에서 겪을 수 있는 대부분을 겪은 병장들이 손을 내민다. 상병들의 구멍을 메워줄 수 있는 존재는 맨날 깔깔이차림으로 누워서 tv만 보고 뽀글이나 해 먹으며 시답잖은 농담 따먹기나 하는, 이등병 눈에는 제일 부럽지만 제일 한심해 보이는 병장뿐이다. 그래서 병장은 대부분 신선 같은 존재가 된다.




이렇게 군생활을 마치고 돌아오면 우리는 이상한 나라에서 벗어나 현실로 돌아온다. 현실에서 또다시 이리 깨지고 저리 깨지다 보면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요즘도 가끔 꿈에서 나오는 그 악몽 같기도, 추억 같기도 했던 구운몽은 역사를 거듭해 계급을 본능적으로 생산해 대는, 계급을 싫어하면서도 계급 없이는 못 사는 인간 본연의 일생을 알기 쉽게 축약해 놓은 게 아니었을까. 아직 사회에 본격적으로 발을 들이기 전에 튜토리얼을 한 판 하고 나온 느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은 참 어렵다. '난 고참이 되면 이러지 말아야지' 했던 이등병 때 다짐이 잘 지켜지지 않는 이유는 인간이 너무나 계급을 싫어하고, 또 인간은 계급을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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