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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하 May 07. 2023

나이가 드니까 말이지

아재들을 위한 항변

30대인 여친을 데리고 40대 천국인 내 친구들을 만났다. 같이 우적우적 양꼬치를 씹으며 이런저런 얘기들을 나누다가 문득 서글픈 문장들이 자꾸 반복되는 게 느껴졌다. 아니나 다를까, 자리가 끝나고 여친이 물었다.


‘다들, 나이가 드니까 말이지, 라는 말을 왜 이렇게 많이 해? 그게 제일 재밌었음 ㅋㅋㅋ’


어쩔 수 없이 우리의 서글픈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정말 기이한 일이다. 다른 40대들은 어떤지 모르겠는데, 나를 포함한 내 주변 사람들은 정말 다 같이 짠 것처럼 마흔이 되면서부터 어딘가 아프기 시작했다. 나만 해도 마흔이 되자 고지혈증과 목디스크에 시달리기 시작했는데, 고지혈증으로 인해 난 앞으로 죽을 때까지 콜레스테롤 수치를 낮추는 약을 매일마다 먹게 되었고, 겨울이 되어 날이 추워지면 계절 내내 글을 쓸 때마다 목디스크와 씨름을 해야 했다. 내 친구들은 어떤가. 보통 배가 아파, 머리가 아파, 이런 말은 흔하게 들어도 신장이 아파라든가. 쓸개가 아파라는 말은 듣지 않았던 거 같은데. 누구는 결석이 생기고, 누구는 쓸개를 떼어내고, 누구는 간경화 위험이 있어서 소주는 안 된다며 맥주는 마시고, 누구는 통풍이 왔다며 맥주는 안 되는데 소주는 마시고, 누구는 당뇨가 왔다며 혈당 주사 맞고 와서 술 마시기도 하고 (너희들 진짜 이래도 되는 거냐.) 암튼 처참한 지경이다.


이 모든 질환들이 기가 막히게 40살이 되자 나와 내 친구들에게 찾아왔는데, 그러다 보니 우리가 만나면 가장 먼저, 가장 많이, 가장 길게 하는 대화 주제가 자연스레 건강이 되었다. 나이가 드니까 말이지, 몸이 이런데 넌 어떠냐. 나이가 드니까 말이지, 몸이 저런데 넌 어떠냐. 나도 이상해. 너도 이상해?

어디 병원에서 수술받았는데 역시 신장질환에는 이 병원이 최고다. 내가 요새 밀크씨슬을 먹는데 어디 제품이 제일 좋은 거 같다. 내가 이것저것 한 7가지 먹어보다가 양배추즙 진짜 기가 막힌 거 찾았는데 추천해 줄까? 나 흰머리 너무 많이 나서 매달 염색하는데 여기 제품이 두피에도 좋고 색깔도 잘 먹는다. 에피타이저처럼 건강 얘기 실컷 하고 나서 모두의 건강을 염원하며 양배추즙마냥 술을 마신다.


예전에 나이가 드니까 말이지, 라는 말에는 인생을 살아보며 내가 통달한 세상의 깨달음을 얘기해 주마. 라든가, 라떼는 세상살이 겁나 힘들었는데 요즘 것들 참 편하게 산다. 라든가 어떤 허세가 담겨 있었던 거 같다. 근데 요새는 그 의미가 많이 달라졌다. 나이가 들고 있음을, 내가 노화되고 있음을 내 신체가 아주 실질적으로 느끼게 되는데 그게 마흔이 되면 너무 티 나게 체감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노골적인 신체적 변화는 사춘기 때 2차 성징 이후로 처음이라 스스로도 놀라고, 무섭기도 하고, 서글프기도 하다.


이 서글픈 3차 성징과 관련한 ‘나이가 드니까 말이지’는 대화가 흐르면서 자연스레 전반적인 삶의 변화로 확장된다. 과장이었던 직급이 차장, 부장으로 바뀌고, 평사원이었던 직위가 팀장으로 바뀌고, 혹은 직원에서 개인 사업자로 바뀌기도 하고, 남의 눈치를 보던 생활이 남을 관리하는 생활로 바뀌고, 내 한 몸 건사하기 바쁘던 시절을 지나 가정을 꾸려야 하는 가장이 되고, 그렇게 나도 모르게 삶이 변하면서 봇물처럼 맞닥뜨리는 변화들 앞에 허세가 아니라 어리둥절한 우리들은 나이가 드니까 말이지, 세상은 이런 거더라. 가 아니라 나이가 드니까 말이지, 세상이 이런 거였냐? 라는 의문문으로 바뀌는 것이다. 딱히 어른이 될 준비를 하지 않았던 우리들은 그렇게 얼떨결에 어른이 되어버린 모양이다.


소녀시대의 모든 멤버들을 꿰고 다녔던 나는 이제 뉴진스와 아이브 멤버들을 구분 못하는 아재가 되었다. 개인주의와 주관적 행복의 가치가 날로 커지면서 사상적 트렌드도 복잡 다양하게 흘러가고, 꼰대소리를 피하고픈 아재들은 요새 이게 유행이래. 아 그래? 그럼 나도. 요새 저게 유행이래. 아 그래? 그럼 나도. 요새 코로나가 유행이래. 아 그래? 그럼 나도. 그렇게 병약해지기 시작하는 몸을 이끌고 뒤뚱뒤뚱 비틀댄다. 누가 마흔을 불혹이라 했을까. 마흔이 되어도 세상에 유혹은 차고 넘치고, 40대가 되어도 인간은 별 수 없이 흔들리며 산다. 아마 지천명이 되어도 그렇지 않을까. 그러니 나이가 드니까 말이지에 대한 관대함을 품어보시길. 당신도 언젠가 한 번은 하게 될 말이다.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노화가 노골적으로 내 몸과 내 삶에 파고든 그 순간, 나이가 드니까 말이지. 세상이 이런 거였냐? 화들짝 놀라면서.




‘나 벨소리 바꿨어.’

‘웬일?’

‘뉴진스의 디토’

‘뉴진스도 알아?’

‘당연하지. 나 아이브도 알아. 르세라핌도 알고.‘

‘디토 그거 아재들이 좋아한다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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