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진하 May 03. 2023

자유와 방치. 그 위태로운 경계

루틴의 필요성

대본을 쓰다 보면 어제는 분명 재밌었는데 오늘은 터무니없이 유치한 순간들이 있다. 아마 대본뿐만 아니라 모든 글쓰기가 비슷한 사정일 것이다. 이상하다. 어제는 배꼽 빠지는 줄 알았는데 오늘은 왜 손가락이 오그라들고 있는 거지.


글을 쓰다가 도저히 머리가 굴러가지 않을 때, 궁지에 몰린 기분이 들면 난 종종 안 하던 짓을 한다. 그 안 하던 짓이라는 게 대단한 일탈을 얘기하는 것은 아니다. 매일 출근 도장을 찍는 집 앞 별다방의 내가 자주 앉는 지정석을 거부하고 다른 자리에 앉아본다든지, 항상 지나다니던 별다방으로 가는 가장 짧은 루트가 아닌 다른 길로 돌아서 가본다든지, 아예 별다방이 아닌 다른 카페로 간다든지, 얼어 죽어도 아이스 아메리카노였던 메뉴를 바닐라 콜드브루로 바꿔본다든지. (다양하게 먹어봤지만 개인적으로 아아보다 만족스러운 선택지는 없는 거 같다.) 그렇게 매일 반복되는 루틴을 여기저기 깨 보는 것이다. 이래저래 답답하면 그날 작업을 째고 어디 공원에 놀러 가거나, 낮술을 질러버리거나, 본격 게임에 돌입하거나 하는 일탈을 벌이기도 하지만 그런 날은 많지 않다. 사소하게 루틴을 깨는 것은 일상을 다르게 겪어보는 시도가 될 수 있지만, 일탈은 가끔 일어나야 일탈이지 쌓이게 되면 컨트롤하기 힘들 정도로 삶이 돌아서버리기 때문이다.


'아이에게 자유의 귀함과 기쁨을 가르쳐주고 싶다면 먼저 제대로 된 틀을 줘야 한다.'


기타노 다케시가 어느 책에 써놓은 말이다. 기타노 다케시에 대한 개인적 호불호를 떠나 저 말에는 격하게 동의하는데 자유라는 것 자체가 틀이 없으면 애초에 성립되지 않는 말이라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있고,  오랜 프리랜서의 삶을 살다 보니 어쩐지 더 그렇게 된 거 같다.


배우들은 기본적으로 어딘가 캐스팅이 되어야 일이 생긴다. 그게 무대든 영화 드라마든 CF든 어쨌든 여기 배우 있어요. 라며 자기 존재를 알려야 하고, 그래서 영화사나 제작 사무실을 돌며 프로필도 돌리고, 캐스팅 디렉터들한테 연락도 돌리고, 에이전시를 찾아가 카메라 테스트도 받고, 그렇게 어떻게든 일감을 모아 와서 마침내 오디션으로 검증을 받아야 일이 생긴다. 다른 프리랜서들도 사정이 다르지 않다. 여기저기 자신의 쓸모가 필요한 공고들을 찾아보고, 알고 지내던 거래처도 찔러보고, 포트폴리오도 보내고, 면접도 보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그야말로 아무 일도 안 생기는 프리랜서는 혼자서 자신의 능력을 기획하고 자기 존재를 홍보하고 인맥을 쌓아 영업도 하면서 1인 기획사가 된다. 이렇게 해도 일이 좀처럼 들어오지 않을 때가 허다한데, 그렇게 일이 없을 때 자신의 시간을 마음대로 활용할 수 있다는 게 프리랜서의 자유로움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이 자유가 기약 없이 오랜 시간 계속된다면 속도에 차이가 있을 뿐, 대부분 삶이 피폐해져 버리기 십상이다.


나 역시 자취를 하던 시절, 작품도 안 되고 알바도 안 구해지고 모아둔 돈은 얼마 없고 초조한 마음에 여기저기 발로 뛰어보지만 별 수 없이 원치 않는 자유의 시간 속에서 허우적거렸던 나날들이 있었다. 월세나 생활비 걱정 같은 일상적인 두려움과 앞으로 난 어떻게 될까 미래에 대한 막연한 절망감을 외면하려 술이나 퍼마시던 순간, 난 아찔할 정도로 명징한 공포를 느꼈다. 이건 자유가 아니구나. 그냥 방치된 거구나.


회사나 가게와 같이 특정 집단에 소속이 되어 있는 사람이라면 출근이나 퇴근, 쉬는 시간, 휴무일 등 집단에서 정한 룰에 따라 전반적인 삶의 루틴이 짜여질 것이다. 하지만 프리랜서는 다르다. 아무도 내게 룰을 지정해 주거나 강요하지 않는다. 그래서 대단히 자유롭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바로 그렇기 때문에 프리랜서는 자신의 자유를 통제할 수 있는 자기만의 루틴이 반드시 필요하다. 삶에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은 자유가 아니다. 방치다. 세상이 날 방치하더라도 나는 나를 방치해서는 안 된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나날들이 계속된다 하더라도 일상이 무너지지 않을 수 있게. 절망과 공포가 머릿속을 좀먹어 들어가는 순간 속에서도 삶이 굳건하게 버텨낼 수 있게. 그래야 가끔 루틴을 깨면서 일상을 신선하게 바라보기도 하고, 때로는 일탈도 하면서 삶을 환기시키며 자신을 돌아볼 수도 있는 것이다. 자유는 틀이 있을 때 비로소 성립이 된다.


그럼 프리랜서가 아니면 뭔가 다르려나. 직업에 따라 다르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마도 하루의 3분의 1 이상의 시간을 집단이 정해준 룰에 스스로를 맞추며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하루종일 타인이 지정해 준 루틴에 시달리다 돌아와 오롯이 내가 맘껏 누릴 수 있는 시간 앞에서 해방감을 느끼고 있다면, 이제부터 쇼타임. 당신의 시간이다. 루틴의 지향성이 오직 자기 계발이자 목표를 향한 숙제일 필요는 없으니까. 뭘 하면 내 시간을 즐겁게 보낼 수 있지? 라는 물음에서 우리는 조금씩 나에게 손을 내밀게 된다. 내가 뭘 좋아하는지. 어떻게 하면 내가 행복해질 수 있을지. 그렇게 나는 나와 친해진다.




친구와 간만에 술을 마시고 있었다.


'내 루틴은 말이지. 퇴근하고 돌아와서 애랑 놀다가, 와이프랑 저녁 먹고 설거지하고 애랑 놀다가, 와이프 샤워 끝나면 나도 들어가서 샤워하고 애랑 놀다가, 애들 잘 때 되면 와이프랑 같이 재우는 거거든.'

'...'

'와이프 루틴은 말이지. 아침에 애 밥 먹이고 어린이집 보내고 와서 집에 오면 설거지하고 청소하고 다시 어린이집 가서 애 데리고 오고 빨래하고 애랑 놀다가 나 퇴근하고 돌아오면 같이 저녁 먹고 샤워하고 애들 잘 때 되면 나랑 같이 재우는데.'

'...'

'큰 애를 재우면 작은 애가 안 자. 작은 애를 재우면 큰 애가 일어나거든. 다시 큰 애를 재우면 작은 애가 일어나고, 다시 작은 재를 재우면.....'

'...'

'왜 루틴이 안 끝나지.'


작가의 이전글 한줄평에 대한 평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