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 아이가 베푼 선의
아이는 자라면서 성격이 조금씩 달라진다. 초등학교 입학하고 첫 공개수업, 수줍음 많은 성격에 몇 번씩 연습했던 발표를 한사코 하고 싶지 않다고 회피하더니, 2학기가 거의 마치는 지금에서는 갑자기 손을 들고 '김장'이라는 주제로 발표를 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아이가 무던히 꺼낸 이야기에 설거지하던 나는 뒤돌아 아이를 다시 봤다. 네 작은 존재감 속에 얼마나 많은 가능성이 숨어있는 거냐? 하루하루 달라지는 아이의 모습이 참 낯설고 새롭다. 그 말속엔, 아이의 모습에 영향을 주는 주변 모든 것이 참 중요하다는 것일 수도.
서너 해 전, 코로나가 도래하기 직전 크리스마스에 나는 아이 둘에게 빨간 옷을 입히고 간식을 포장해 옆집, 아랫집, 도서관, 빵집 등 동네 자주 가는 가게 아주머니 아저씨들께 나눠드리는 시간을 가졌다. 아이들이 가벼운 것부터 나눌 수 있는 그릇이 큰 사람으로 자랐으면 하는 마음과, 나눔을 통해 더 안전하고 즐거운 삶의 울타리를 만들어가길 바랐던 마음이었다. 당시 다섯 살 난 큰 아이는 부끄러워하면서도 고맙게 엄마의 미션을 순순히 잘 따라주었다. 그 뒤론 바쁜 일상에 자주는 못하고, 연말이나 명절이 되면 그렇게 우리만 즐겁지 않고 함께 즐거움을 누릴 수 있도록 해보려고 했다.
이런저런 소소한 나눔들이 아이의 마음에 가랑비 젖듯 스며들었던 것일까?
며칠 전, 집으로 귤 한 박스가 배달되었다. 우리 네 가족이 먹는 양보다 많아서 작은 봉지에 조금 나눠 담아 옆집에, 자주 가는 빵집에 나눠드리기로 했다. 큰 아이는 한 봉지를 들더니 망설임 없이 옆집 문을 똑똑 두드렸다. 남편은 살짝 걱정이 되는지 그 뒤를 따라 서있었다. 아저씨가 나오자 아이는 반갑게 인사를 하시더니, 맛있게 드시라고 건네드렸다. 아이에게 넉살이 있을 줄이야... 키가 자란 만큼 아이에게 담담한 용기가 생겼구나 기특했다.
다음날인 토요일, 나는 아이와 부랴부랴 집을 나섰다. 오랫동안 멘토로 활동했던 한 기관 커뮤니티 모임에 참여하기 위해서였다. 연말 모임을 주말에 할 때면 참여하기 힘들었는데, 이번엔 아이 돌봄 서비스를 준비해 주신다고 하셔서 배려받는 감사함으로 아이를 데리고 갈 수 있었다. 매서운 바람을 이길 오렌지색 비니를 쓰고 길을 나선 아이. 언제 이렇게 자랐나 싶을 만큼 아이랑 데이트하는 설렘으로 하루를 보냈다. 반가운 만남과 인사이트 가득한 대화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해가 벌써 진 저녁, 아이와 간단한 케이터링으로 저녁을 먹고 다시 집으로 향했다. 이모삼촌과 뛰고 놀고 게임하면서 재미있었는지, 지하철에서 엄마한테 기대 쉬었다.
지하철 방송에서 기관사 아저씨가 "지하철에서 구걸행위는 불법입니다. 당장 내리세요"라고 말했다. 방송이 마치자, 우리 호칸에 문이 열리면서 낯익은 한 분이 노래를 튼 채 지팡이를 의지해 한 걸음씩 한 걸음씩 걸어 들어왔다. 종종 지하철에서 자주 마주친 할머니 었다. 그때마다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잔돈을 드리곤 했는데, 오늘따라 가방을 뒤져보니 만 원짜리만 보였다. 흠... 오늘은 드리기 그렇겠구나 싶어, 아이의 의사도 물어봤다. 혹시 아이가 드리기 부끄러워하면 그냥 이대로 넘어가야지. 엄마의 잔머리 굴러가는 소리가 아이한테 들린 걸까?
"엄마 도와 드리고 싶어요"
한 치의 고민 없이 단호하게 하는 아이의 말에 나는 부끄러워졌지만, 만원을 서둘러 내어 주었다. 아이는 뚜벅뚜벅 할머니를 뒤따라잡더니 바구니에 돈을 넣어드리고 자리로 돌아왔다. 부끄러운 내 생각을 지우려 아이의 손을 꼭 잡았다. 그 순간 우리와 맞은편에 앉아계시던 할아버지 한 분이 아이를 향해 엄지 척을 해주셨다. 누군가의 마음을 울린 아이의 '용기'. 이 아이의 마음에 굳건하게 자리 잡고 있는 베풂의 마음은 내가 예전부터 바라왔던 것보다 훨씬 커져버린 것 같았다. 대견한 마음에 아이의 손을 잡고 집을 향해 걸었다.
"엄마! 제 비니 어디 있어요?"
아이는 추위에 귀가 찢어질 것 같다며 엄마한테 비니를 달라고 했다. 엇? 그건 엄마한테 있지 않아. 생각해 보니 아이가 지하철 의자에 앉아 들고 있었는데, 자리에 두고 내렸거나 어디선가 떨어뜨린 것 같았다. 아이를 혼내지 않았다. 뭐 그럴 수 있지만, 추운 걸 감내하는 것도 네 몫이야. 우리는 전속력으로 집을 향해 뛰었다. 오늘 있었던 일을 아빠와 동생에게 이야기하고 있는데 갑자기 초인종이 울렸다.
"옆집이에요"
남편이 나갔다 들어오더니 백화점 쇼핑백을 2개나 들고 왔다. 옆집 아저씨의 크리스마스 선물이라며, 아이들에게 하나씩 건넸다. 일주일 전부터 이른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는 건가? 아이들은 환호를 지르며 선물을 뜯어봤다. 소. 오. 름. 순간 온몸이 떨릴 정도로 깜짝 놀랐다.
거기엔 아주 예쁜 곰돌이가 그려진 신상 비니가 있었다. 애들이 좋아하는 색으로 말이다. 우리가 베푼 선의가 돌고 돌아 아주 빠르게 돌아오는 것을 경험하는 순간이었다. 아이는 해맑게 머리에 써보더니 한마디를 꺼냈다. "와! 이거 정말 예쁜데요?!" 아이의 예쁜 마음을 칭찬해 주는 하늘의 선물 같았다.
세상을 넓게 품고 그 아름다움을 누리며 사는 아이로 자라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