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펙충에게 드리는 답변
0.
'스펙충'이라는 말을 아시는가.
모든 맥락 따위 상관없이 '닥치고 스펙'과 '가격'을 외치며 모든 것을 판단하는 답답한 분들을 칭하는 용어다.
자동차 산업은 전통적으로 첨단기술이 집약되는 산업이다 보니, 바이크와 자동차를 타는 분들 중에는 유감스럽게도 '스펙충'이 너무나 많다.
같은 취미를 공유하는데도 불구하고 스펙충과의 대화는 매우 제한적이고 지루하다. 거의 대부분의 경우 이들이 타고 있는 (혹은 추천하는) 바이크는 하늘에서 뚝 떨어져도 타기 싫을 만큼 촌스러운 바이크이거나, 아니면 넉넉한 집안찬스가 없다면 타는 게 불가능한 비싼 바이크들이라 딱히 대꾸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데도, 그들은 스펙과는 거리가 먼 바이크를 타는 사람들이 도무지 이해가 안 되나 보다. 그래서 꼭 충고 비스무리한 애매한 질문으로 오지랖을 시전한다. 오래되고 느린 클래식 바이크를 타는 나 역시도 수도 없이 스펙충들의 오지랖을 만나게 된다.
그 돈이면 ***타지, 그거 왜 타세요...
계속 정비에 돈 쓰면서 그거 타는 거보다 그냥 깔끔하게 ***만원짜리 ***타는 게 괜찮지 않나요?
몇 마력이세요? 시속 몇까지 나오나요?
제로백은 몇이세요? 부산까지 몇 시간만에 가세요?
헐 그 정도면 ***만원짜리 ***보다도 느린데요?
이모빌라이져 있으세요? ABS 달려 있으세요? ***기술 탑재되어 있나요?
그래서 그 바이크 얼마? 그 파츠 얼마?
헐 근데 ***기능도 안된다고요? ***키로도 안 나온다고요? 에이 저라면 안 탈래요.
지겹다. 이런 질문들이 지겹고, 그 태도가 지겹고, 매번 대답하기가 지겨워서 쓰는 글이다.
1.
모든 면에서 스펙을 추구하며 스스로 대단히 현명한 소비를 하고 있다고 믿는 그들은, 도대체 10년 전, 5년 전, 아니 불과 1-2년 전에는 당시 바이크들의 스펙 수준이 후져서 어떻게 타고 다녔을까. 또 1-2년 뒤에 새로운 기술을 달고 최신 스펙의 바이크가 나오면 본인들이 지금껏 자랑스럽게 타오던 바이크는 어떻게 바라볼까. 나아가 스스로는 '유럽파'라고 굳게 믿고 있는 그 태도가 특유의 헬조선 사고방식이라는 걸 스스로 깨닫게 되면 어떻게 반응할까.
내 나름의 위험한 결론은, 멋이나 미감 따위 모르고 살아온 사람들이 자동차나 바이크를 타게 되면 그런 태도를 갖기 쉽다는 것이고, 이건 매우 한국적인 특수한 맥락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유럽에는 여전히 60-90년대에 생산된 클래식/올드바이크가 일상에 넘쳐나고, 창고 개러지 문화가 있는 미국 역시도 오래된 차들을 물려받고 정비해가며 타는 문화에 익숙하다. 일본은 말할 것도 없고, 그 외에 수많은 동남아의 바이크 문화에서도 '스펙충'을 찾아보기는 대단히 어렵다.
한국에서 유별나게 자동차와 바이크에 '스펙충'이 많은 이유는, (당연하게도) 자본주의와 결합된 한국의 뿌리 깊은 가부장제와 맞물려 있다. '남자는 바깥일!'이라는 후진 인식이 일상에 퍼지면서, 한국의 도로는 비싸고 크고 좋은 차를 통해 '집 바깥'에서의 자신의 가부장적인 신분을 드러내는 위계의 장소가 되었다. 작고 합리적인 가격의 차들을 보면 자연스럽게 '여자가 타기 좋은 차'라고 말을 하고, 비싸고 좋은 차를 탈수록 도로에서 낼 수 있는 목소리는 높아진다. '어딜 감히 똥차가!'. 혹여라도 여성이 비싸고 좋은 차를 타면 가부장제 도로의 룰과 어긋나기 때문에 욕먹기 일쑤이다. '아오 역시 김 여사! 김치녀!'.
2.
스펙충의 사고방식 아래에는 이처럼 조선 특유의 가부장제가 짙게 깔려있음에도, 이들은 유럽의 비싼 바이크를 한국에서 탄다는 이유만으로 자칭 '유럽파'라고 착각을 하고 살아가거나, 최신 스펙의 바이크를 탄다는 이유만으로 '스마트한' 소비자라고 착각을 하고 살아간다.
말 그대로 착각이다. 애초 바이크는 수많은 라이딩 환경들에 맞춰서 다양하게 개발된다. 장거리 투어에 적합한 바이크가 있고, 서킷 레이스용이나 속도만을 추구하면서 개발된 바이크가 있고, 디자인과 유지비에 중점을 둔 바이크도 있으며, 도심의 비즈니스 용이나 시내 주행에 적합한 바이크도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매우 애석하게도, 스펙충이 선호하는 많은 바이크들은 한국의 도로 상황에는 딱히 맞지 않다. 워낙에 작은 땅덩어리인 데다가 고속도로마저도 바이크에겐 허용되지 않으며, 속력을 내거나 그 잘난 최신식 기술들을 써먹을만한 도심의 도로가 별로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최신 스펙의 기술을 써먹으면서 스마트한 소비를 스스로 확인해야 하기 때문에 늘 속도에 목숨 건다. 앞서가는 차와 바이크를 제끼는 걸로 그 스펙을 확인하고, 도로 위에서의 가부장스러운 지위와 자신의 스마트한 선택을 확인한다.
그들의 난폭운전을 충고하거나 촌스러움을 지적하면 오히려 몹쓸 말이 되돌아온다.
'역시 한국은 바이크만 타면 양아치처럼 본다니까. 인식이 미개해!'
'흐 이래서 바이크 타려면 유럽 가야 된다니까!' '내 삶의 방식은 역시 유럽에 맞는 듯 훗'
3.
그래서 무척이나 답답하고 지겹다는 거다. 그들이 늘 물어대는 '고물바이크 왜 타세요?'라는 강력한 질문에는 이미 문화에 대한 몰이해가 전제되어 있기 때문에, 효과적인 대답이 딱히 없다. 이 정도 대답이면 적당하지 않을까 한다. '적어도 스펙충으로 보이지는 않을 테니까요.'
본인이 타고 계시는 스펙 빵빵한 바이크가 최고이고, 자신의 소비는 스마트하다고 생각하는 스펙충들에게 되묻고 싶다. 자신이 만들어 내는 바이크 문화는 어떤 모습인지를. 스마트한 소비자가 아니라, 개성 따위는 없어진 지 오래인 흔하디 흔한 호갱은 아니었는가를. 스펙과 돈 빼면 별다른 얘기를 못하는 지루한 대화만을 해오고 있지는 않았는가를. 그게 주변의 누군가에게는 매우 전형적인 촌스러움과 오지랖으로 보이지는 않았을가를. 더불어, 한국에서 바이크에 대한 시선과 인식이 촌스럽고, 한국의 도로가 바이크에게 적대적인 게 누구 때문인지 한 번만 더 고려해보시길!
SLOW
SAFE
ENJO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