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내일은 머리맡에

by 코뿔소

격투기를 배우겠다고 하면, 대개 세 가지 선택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주짓수나 유도처럼 상대를 꺾거나 던지는 그래플링, 또 하나는 킥복싱이나 무에타이 같은 타격, 마지막은 이 둘을 섞은 종합격투기입니다.


처음엔 종합격투기를 배우기로 했습니다. 이론상, 두 가지를 함께 배우는 것이 가장 좋기 때문입니다. 타격을 먼저 익히면 몸이 타격에 익숙해져서 그래플링에 취약해지고, 반대로 그래플링만 배우면 얻어맞기 딱 좋은 자세로 돌진하게 된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종합격투기였습니다.


의욕적으로 시작했지만, 골프처럼 숙련되기 전까진 재미를 느끼기 어려웠습니다. “팔을 90도로 들어보세요, 왼쪽으로 꺾어주세요. 잘하셨어요.” 일련의 동작들을 따라가다 보면 이게 연습인지 예식인지 모를 정도로 영혼이 움직이지 않았고, 타격도 어쩐지 맛만 보다가 마는 듯했습니다.


그러다 킥복싱으로 방향을 틀었습니다. 줄넘기로 몸을 풀고, 자세를 잡고, 팔을 휘둘렀습니다. 하루 종일 훅 하나만 반복해도 이상하게 재미있었습니다. 물론 관장님은 오셔서 “아니 이렇게 허리로 딱”하며, 가볍지만 온몸을 써서 강하게 치는 법을 알려주셨습니다. 가르쳐주신 대로 치자 샌드백에서 ‘펑, 펑’ 소리가 났습니다. 고수들 눈엔 우습게 보일 테지만, 저는 속으로 초강력 롤링썬더 필살 펀치를 연마 중입니다.


*체육관 분위기에 따라, 본인의 흥미에 따라 상이한 감상일겁니다. 더 재밌는 시작을 찾으시길.



어쩌다 본 연애프로가 생각납니다. 하트뭐였는데요. 다들 점잖고 멋진 모습으로 나타나죠. 마치 홍콩 무협영화처럼, 짜여진 합을 맞추듯 사회인 다운 질문에, 흠 없는 답을 주고받습니다. 얼마나 괜찮은 사람인지, 그러면서도 얼마나 겸손한지 내보이며, 서로의 멀쩡함을 겨룹니다. 그러다 문득, 미처 숨기지 못한 본모습의 조각을 보고 반하거나, 혹은 실망하죠.


나이스하게 끄덕이지만, 속으로는 ‘음~ 인정 킹정’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저도 사실 낄낄- 케케- 웃고 있지만, 겉으로는 허허 웃습니다.
맛도리다 싶어도 “맛있네요” 정도로 표현하겠죠.


아이러니하게도, 그 대화 속 긴장의 목적은 결국 긴장 없는 관계를 향합니다.

‘잘 보이지 않아도 괜찮은, 그런 우리가 되고 싶어요.’
‘그래서 최선을 다해 잘 보이려 하고 있습니다.’


그 긴장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누구나 마음속엔 이기적이고 흔들리기 쉬운, 작고 여린 자신을 품고 있기 때문이죠. 그 모습을 드러냈을 때 사랑받을 수 있을까, 자신이 없는 겁니다. 동시에, 상대 역시 그런 모습을 품고 있는지를 엿보려 서로의 겉모습을 살피게 되죠. 그렇게 우리는 ‘나는 어른입니다’ 가면을 쓰고 서로를 향합니다.


하지만 실수 없이, 완벽하게 시작하려다 보면 중요한 것을 놓치곤 합니다. 운동이라면, 가장 중요한 건 흥미겠죠. 훗날 킥복싱부터 시작한 탓에 그래플링 고수에게 목이 졸릴 날이 오겠지만, ‘아, 주짓수 먼저 할 걸’ 하고 후회는 하겠지만, 그땐 그 날에 맞게 움직이고 있을 겁니다. 제대로 해야지, 실수하면 안 돼하고 종합격투기에 매달렸다면, 아마 지금쯤 운동 자체를 놓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래플링 고수를 이겨보겠다는 투지 역시 피어나지 않았을 거고요.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실수 없이 괜찮은 모습만 보여주다 보면, 사랑의 아름다움을 잃게 됩니다. 결국 상대 역시 긴장을 내려놓지 못하고, 전 애인보다 별로일까 걱정하며 조심스럽기만 하겠죠. 걱정은 긴장을 낳고, 긴장은 또 걱정을 낳습니다.


연애 초반의 역할극은 역할극으로 남겨두고, 적당한 시점엔 우리 안의 꼬맹이를 꺼낼 필요가 있습니다. 사랑은 그 이후부터가 진짜니까요. 사랑이 깊어지면 마치 말티즈처럼 배를 까고 누워, 까만 눈을 깜빡일지도 모릅니다. 처음엔 도베르만처럼 멋졌는데, 어느새 뽀얀 배를 보이는 모습에 실망한다면 인연은 아닐 테고, 배를 긁어준다면 인연일 겁니다.


다만, 상처받은 기억이 있으면 그 역할극을 내려놓는 게 쉽지 않습니다. 본모습을 드러낸 만큼 상처는 깊고, 그 상처는 결국 내 본모습에 대한 회의로 이어집니다. 그래서 다음 사랑에서는 더욱 꽁꽁 숨기게 되죠.


하지만 우리가 진심으로 찾는 사람은, 바로 그 모습을 사랑해 줄 사람입니다. 영원히 감춰두는 건 좋은 방법이 아닐 겁니다. 그 모습이 연애의 어느 한 계절을 힘들게 하더라도, 남은 계절들을 함께할 사람이라면 기꺼이 꺼내는 게 좋겠죠.



운동과 연애를 주제로 시작한 글이었지만, 쓰다 보니 이상하게 마음이 다른 곳에 머물러 덧붙입니다.


운동을 마치고 집에 와 몸을 식히며 글을 썼습니다. 생각이 이리 멀리 튄 걸 보니, 오늘은 꽤 고된 하루였나 봅니다. 선수도 키우셨다는 관장님이 컨디션 좋은 날엔 수업 시간을 좀 넘기시곤 합니다. 몸은 고됐지만, 침대 옆에는 내일 입을 운동복과 글러브를 챙겨두었습니다. 그리고 거실에 두었던 화이트보드는 이제 베란다 구석으로 옮겨두었습니다. 소파에 앉아도 일 생각은 안 하겠지요.


무엇을 창고에, 무엇을 머리맡에 두는가에 따라 하루는 조금씩 달라지는 것 같습니다. 지나간 일들은 천천히, 하나씩 창고로 옮겨두세요. 버릴 필요는 없습니다. 잘 매듭지어 보관해 주세요. 그리고 머리맡엔 아주 조금이라도 기다려지는, 내일의 장면 하나 놓아두시길 바랍니다. 계절이 바뀔 즈음에는 머리맡에 좋은 것들이 가득하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