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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션뷰 Nov 06. 2024

우리는 모두 생물이잖아(上)

간절함과 초연함 그 사이

대학시절부터 지금까지 10년간 자취를 해서 부모님을 자주 뵙지 못했다. 내가 사는 곳은 판교고 부모님은 포항에 계신다. 그래서 그런지 가족에 대한 꿈을 종종 꾼다.

한번은 꿈속에서 엄마한테 전화가 왔다.
아빠가 많이 아픈데 상황이 많이 안 좋아서 병원에 있다고. 빨리 와봐야 할 것 같은데 마음 단단히 먹으라고.
나는 새벽 4시에 눈물이 줄줄 흐르는 채로 잠에서 깼다. 모든 게 꿈이었단 사실에 깊은 안도감을 느껴야 했지만, 꿈에서부터 현실로 이어진 슬픈 감정과 충격은 쉽사리 없어지지 않아 한동안 누운 채로 서럽게 울었다. 다시 잠들면 뒷 이야기가 이어질까 두려워 한참 뒤척였다.


그날 밤 아빠에게 전화를 걸어 무슨 일 없냐고 물어봤다. 이런 내용의 꿈을 꾸었는데 걱정이 된다는 말과 함께 건강검진을 해보자는 이야기를 꺼내었다. 그러나 아빠는 아직 나름 작지 않은 회사에서 엔지니어로 일하고 있기 때문에 건강검진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엄마도 항상 같이 가서 검사를 받는데, 지금까지 큰 문제없다고 말씀하셨다. 그 말을 듣고서야 소심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로부터 한 달 뒤, 아빠한테 전화가 왔다.
 참고로 우리 아빠는 참 경상도 남자라 특별한 일이 없으면 아들에게 전화를 걸지 않는다. 전화가 온다는 것은, 무슨 일이 있다는 것이다.

”용준아, 엄마가 많이 아프거든, 배가 많이 아파서 지금 중환자실에 있다. 의사 말로는 상황이 많이 안 좋다고 하는데 올 수 있겠니?”
나는 이게 또 한 번의 꿈인가 싶었지만, 아니 그러길 간절히 바랐지만 이번에는 꿈이 아니었다. 꿈에서는 아빠가 아팠지만, 현실에서는 엄마가 아팠다. 나는 그날 4시간에 걸쳐 곧바로 엄마가 있는 경북대학병원까지 달려갔다. 응급실로 가는 길에는 커다란 장례식장이 보이는데, 그게 초조한 내 마음을 더 짙게 했다.


그렇게 도착한 병원 1층에서 아빠를 만났다. 엄마는 본인의 통제를 벗어나 제멋대로 요동치는 혈압을 진정시키기 위해 중환자실에서 고군분투 중이었기에 당장 찾아 뵐 수는 없었다. 아빠에게 들은 말로는, 며칠 전부터 엄마가 계속 배가 아팠는데 그저 장염인 줄 알았다고 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낫질 않고 점점 더 참을 수 없이 아파져 동네 병원에 갔는데, 작은 병원에서는 고통의 원인을 잘 알 수 없다고 했단다. 더 큰 병원에서 정밀 검사를 받아봐야 할 것 같다 하여 2시간가량 응급차를 타고 경북대병원으로 이송되었다. 후에 엄마가 말하기를 격하게 흔들리는
 응급차에서의 2시간은 정말 지옥이었다고 한다.


검사를 받기 위해 CT를 찍어야 하는데 CT를 찍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배 전체가 염증으로 가득 뒤덮여있었기 때문이다. 의사 선생님 말로는 수술을 꼭 해야만 하는데, 당장 뒤덮인 염증 때문에 수술을 할 수가 없는 상황이라고 하셨다. 지금 상태로 수술을 하려면, 거의 모든 장기를 다덜어내야 하 그래서 우선은 배에 호스를 꽂고 자연스럽게 염증이 흘러나오기를 바랄 수밖에 없다고 하셨다.
엄마는 그렇게 2주 넘도록 응급실 병동에서 배에 호스와 소변줄을 꽂고 누운 채로 계셨다. 오랜 기간 몸에 호스를 꽂고 있다는 것은, 겪어보지 않고는 모를 고통인 듯했다. 목소리에는 힘이 하나도 없었고 생기도 없었다. 몸을 아주 조금 비트는 것조차 엄청난 고통이었으며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더 최악인 것은 그렇게 하더라도 염증이 얼마나 많이 빠져줄지 모른다는 것이었고, 염증을 걷어낸 후 수술대에서 배를 갈라봐야 진짜 고통의 원인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는 것이었다. 2주가 넘는 동안 6인실 병동에는 엄마 자리를 제외한 모든 자리에 입원과 퇴원이 반복되었다. 마치 창가 옆 엄마 자리만 시간이 멈춘 듯 했고, 그게 상황의 심각함을 더 와닿게 했다.


2주가 좀 더 지난 후 경과를 보았을 때, 염증이 어느 정도 빠지긴 했으나 의사가 만족할 만큼 빠지진 못한 것 같았다. 그러나 계속 이렇게 호스를 꽂고 생활하다간 수술도 받지 못하고 쓰러질 것 같았기에 이 정도로 타협하고 수술대에 오르기로 결정했다. 어떤 병이 퍼져있는지, 치료가 가능한 상황인지 확인하기 위해.
종교가 없는 나는 내 기도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기도했다. 왠지 모르게 착하게 살아왔던 사람의 기도만 들어줄 것 같았기에 내 기도는 멀리멀리 하늘 위로 휘발되어 소실될 수 있겠다 생각했다. 착하게 살걸 지금 후회해봤자 늦었지 싶었다.


수술이 끝나고 엄마는 또 한 번 중환자실로 이동했다. 워낙 큰 수술이었기에 엄마는 마취에서 반쯤 겨우겨우 깬 후 홀로 옆을 지키고 있던 아빠에게 마치 마지막 힘을 쏟아붓듯이 속삭였다.
“내 죽는다 카더나..?”
참 경상도인이신 우리 아빠는 내게 한 편생 보여주지 않았던 울음을 참지 못하고 말한다.
“아니 죽기는 뭘 죽어. 내가 니 어떻게든 살리고 만다. 걱정 마라”
어느 글에서 읽은 바로는, 어떤 죽음 보다도 배우자의 죽음이 가장 슬프다고 한다. 그만큼 사랑과 정의 크기가 거대하기 때문일 것이다. 엄마와 아빠는 이미 각자 살아온 시간보다 함께 살아온 세월이 더 긴 부부다. 그 세월 동안 쌓아온 무언가는 참경상도인은 물론 참경상도인 할아버지가 온다 한들 얼마든 눈물 흘리게 할 수 있다.


의사 선생님은 수술 과정 중에 엄마의 장기들 일부를 덜어내야만 했다. 그 중에는 직장의 일부도 포함되어 있어 장루를 달아야만 했다. 그리고 조직검사를 위해 일부 조직을 때 내었다. 워낙 큰 수술이었기에 조직 결과가 나오는 동안 계속해서 병원 신세를 져야 했다. 조직 검사는 대략 2주가 걸린다고 한다.
부디 별거 아니길 바라는 간절한 마음과, 혹여나 기대가 크면 상심이 클까봐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고 받아들일 초연함이 동시에 존재했다. 겉으로 티는 내지 않으시지만 누구보다 가장 무서움에 떨고 있을 사람은 엄마인걸 우리는 알고 있다. 그렇기에 나와 누나, 그리고 아빠는 애써 감정을 티내지 않으려 했다. 그렇게 우리는 그간 겪어보지 못한 가장 긴 2주를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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