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 다니는 팔자

by thinking cloud

서른 중반에 미혼 동지로 남아있던 라스트 프렌즈가 갑작스런 결혼 선언을 했다. 당연히 모든 마음을 다해 축하해줬다. 그리고 그다음 주에 나는 혼자서 몰래 용하다는 철학관을 찾아갔다. 질문은 오로지 내 짝의 탄생 여부, 생사여부, 어디 있으며 몇 년, 몇 월, 몇 시, 몇 분에 나타날 것인가였다.

일필휘지로 종이에 한자가 적히고, 괜히 가슴이 두근두근하는 가운데, 그 용한 선생님이 첫마디를 내뱉었다.

"이 사주는 평생 직장 생활 해야 돼."

... 음? 내가 뭘 잘못 들었나? 인연을 물어봤는데 왠 갑분직장? 어이없는 동문서답에 찬물 한 바가지 맞은 기분이었다. 그분은 그게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다고 했다. 평생 직장생활하는 교과서적인 사주, 공무원이면 정년 퇴임하고, 정년퇴임 후에도 명예직원이든 뭐든 해서 일할 사주라고 밑줄을 그어가며 쐐기를 박았다.

지금도 호시탐탐 직장생활 은퇴하고 유유자적 살 기회만 노리고 있는데 이게 무슨 청천벽력이람. 내가 원하는 답을 못 들어서 그런지 이 선생님의 신빙성이 의심스러워졌고, 철학관을 잘못 왔구나 하는 생각부터 복채가 벌써 아깝다는 생각이 파도쳤다. 그분은 연애, 결혼 질문은 잊어버린 듯했다.

그렇다. 직장생활에 특화된 사주팔자가 있다고 한다. 꽤 많은 사람이 갖고 있다고 한다. 일을 안 하면 사람 버린다는 뉘앙스의 말들이 쏟아졌다. 요즘 같이 직장에 다녀도 불안한 판국이지만 이런 사주는 직장이 망해도 마지막까지 남아있는 사주라고 했다.


만 60세가 넘어 국민연금을 안 내시는 우리 회사 직원분의 얼굴을 떠올려본다. 다들 멋있고 좋은 분이시다. 그리고 그 나이대의 내가 출근하는 모습을 상상해본다. 정말 그때까지 남의 회사에서 사장님 이하 기타 상사를 모시면서? 아...... 난 좀......

그거 말고 다른 할 얘기는 없는지, 다른 얘기는 꺼낼 생각을 안 하시니 반쯤 포기의 심정이 되었다. 시계에 눈이 가기 시작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일을 하더라도 하고 싶은 일을 할 수는 있을까 싶어 사업은 어떨지, 돈을 잘 벌 수 있는 분야 등을 영혼 없이 물어봤다. 대답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 이 젊은 나이에도 피곤에 허덕이는데, 여유가 없어서 늘 실수를 하는데, 이 짓을 평생? 미쳤어? 마음속 돌풍이 도무지 잠잠해지지 않아서 듣는데 집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내 표정에서 폭풍을 읽었는지 그 선생님이 좋은 점을 읊기 시작했다. 평생 일하는 덕분에 평생 돈 걱정할 일은 없겠어. 헐, 이건 또 무슨 소리?

회사 다닌 지 몇 년째인데 아파트는 고사하고 코딱지만 한 오피스텔 대출이 몇천만원이거늘.

이쯤 되자 나도 마음을 비웠다. 이 철학관에서 내가 기대할 건 없겠구나 할 때쯤 연애, 결혼 얘기가 드디어 나왔다. 자세한 얘기는 딱히 없었고 당장은 인연이 없다는 말이 귀에 따갑게 꽂혔다. 그나마 마음에 들었던 한마디는 신랑 잘되게 하는 팔자라는 말이었는데, 그 신랑을 잘 되게 해서 내가 덕을 보겠냐고 하니까 그건 또 아니라고 한다. 잘되게 해 주고 내가 덕을 못 보면 그게 무슨 죽 쒀서 개 주는 호구 팔자인가. 그 철학관을 나오면서 생각했다. 일이나...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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