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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리조 Nov 06. 2019

가장 기분 좋은 일

질문에서 '가장'을 빼야 하는 이유 

 수업 시작 전 본부 교무실 방송으로 몇 명의 아이들이 호명되었다. 1교시가 영어 시간이라 영어실에 갔다가 뒤늦게 방송을 듣고 부랴부랴 뛰어온 아이는 자기가 뭘 잘못해서 혼나는 건 줄 알고 바싹 긴장했다. 중앙현관에 모인 아이들은 이젠 기억에서 희미해졌을, 지난봄에 부모님께 쓴 편지가 훌륭하다고 상을 받았다. 5만 원의 상품권과 폭신한 케이스에 든 상장을 손에 들고 어쩔 줄 몰라하는 아이들의 모습이 귀여웠다. 


 오후에 다시 만난 아이는 자신이 아직도 왜 상을 받았는지 모르겠다며 무슨 글을 썼었는지도 기억이 안 난다고 했다. 부모님께 쓴 편지가 아주 훌륭했다고 이야기해주니 자기는 원래 부모님께 편지를 안 쓰는데 이상하단다. 교문 옆에 플래카드까지 붙었다니까 지금 당장 확인하고 싶은가 보다. 현관 밖까지 같이 나가서 플래카드를 멀리서 확인했다. 집에 갈 때 플래카드를 잘 찍어서 부모님 보여드리고 카톡 프사로 설정하라는 말에도 그저 싱글벙글이다. 정말 생각지도 못했는데 이런 상을 받게 되어 너무 좋다는 말만 반복한다. 아마도 오늘은 아이에게 한동안 '가장' 기분 좋은 날이 될 것 같다. 





  지금까지 살면서 '가장' 행복했던 경험은?

  지금까지 살면서 '가장' 힘들었던 경험은?

  '가장' 감명 깊게 읽은 책은?

  '가장' 감명 깊게 본 영화는?

  '가장' 좋아하는 노래는?


 가끔 설문이나 면접 장면에서 이런 질문이 자주 나온다. 나는 이런 질문을 받으면 순간적으로 머리가 하얘진다. 행복했던 경험도, 힘들었던 경험도, 감명 깊게 읽은 책도, 감명 깊게 본 영화도, 좋아하는 노래도 많은데 대답하기가 너무 힘들다. 


 대학교 때 심리상담센터에서 설문 알바를 한 적이 있었다. 와서 설문지만 해주면 소액의 수고비를 준다는 말에 망설임 없이 신청했다. 대여섯 장의 설문지에만 성실하게 응해주면 된다고 했으니 이런 꿀알바가 어디 있나! 


 그런데 설문지 문항이 생각보다 어려웠다. 사람의 심리를 분석하기 위한 설문지라는데 대부분의 질문이 저런 식이었다. 가장 기분 좋았던 경험이 뭐였는지 적으라는 질문에 막혀서 볼펜 끝을 책상에 두드리며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그때가 대학교 3학년 때였나? 지나고 나서 생각해보면 빛나기만 하던 시절, 진로에 대한 고민과 두 개의 전공에 대한 부담감, 청춘사업의 어려움까지 그때의 나도 어김없이 세상살이가 쉽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가장 기분 좋았던 경험이라니, 시간적으로 근접한 경험부터 떠올려봤다. 최근에 내가 가장 환하게 웃었던 적이 언제였더라. 떠올랐다! 며칠 전에 화장실에서였다. 화장실 문을 닫고 어깨에서 내린 가방을 문 손잡이에 걸면서 보니 바닥에 대학교 셔틀버스 회수권이 두 장 떨어져 있었던 기억. 지하철역에서 학교 건물 앞까지 탈 수 있는 셔틀버스는 한 번 타는 데 250원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화장실 바닥에서 오백 원을 주운 거였다. 혼자 화장실 칸 안에서 변태처럼 웃었다. 오백 원을 벌어서 기분이 좋았다. 


 아무리 익명의 설문지라지만 이런 경험이 가장 기분 좋았다고 쓰기에는 묘하게 자존심이 상했다. 고개를 들어 강의실 앞을 보기도 하고 천장을 보기도 하면서 이리저리 머리를 굴려봤지만 더 떠오르는 경험이 없었다. 차라리 초등학교 시절의 나였다면 강타 오빠를 직접 만났을 때라고 더 그럴듯한 답을 했을 것 같은데. 가장 기분 좋았던 경험이 화장실 바닥에서 오백 원을 주운 일이라니, 도대체 내가 왜 이렇게 살고 있는 건가 싶었다. 그런데 그 당시 나에겐 장학금을 받은 것보다 남학생과의 핑크빛 라인보다 화장실 바닥의 회수권 두 장이 더 웃음을 줬다는 게 사실이었다. 그때만큼 웃어본 기억이 더 떠오르지 않았다. 부끄럽지만 설문지에 솔직하게 썼다. 나의 이런 심리는 어떻게 분석이 되었을지!




 대한민국에서 두 번째로 맛있는 집

 최고의 여행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


 나는 이런 문구를 좋아한다. 첫 번째, 최고라는 순간을 뒤로 미루어 놓으면 마음이 편해진다. 또 다른 기대감을 가지고 살게끔 하는 이런 표현이 좋다. 


 내 인생에서 행복했던 순간들이 여러 번 있었는데 '가장'이라는 말로 굳이 순위를 매기고 싶지가 않다. 힘들었던 여러 순간 중 한 순간을 골라 '가장'이라는 말로 더 비참하게 만들고 싶지가 않다. 이 영화는 이래서 좋았고 그 영화는 그래서 좋았다. 이 영화보다는 그 영화가 조금 더 좋았을 수 있지만 '가장'이라는 말로 나의 영화 취향을 틀에 가두고 싶지가 않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가장'이라는 단어를 부담스러워한다. 그냥 최근에 기분 좋았던 경험을 쓰라고 했으면 조금 더 가벼운 마음으로 화장실 바닥에서 주운 회수권 얘기를 썼을 텐데, 가장 기분 좋았던 경험을 쓰라고 하니 정말 내 인생에 그때보다 더 좋았던 때가 없었을 것만 같은 생각에 스스로가 불쌍해졌다. 어차피 가장 기분 좋았던 경험을 물어봐도 시기에 따라 장소에 따라 상황에 따라 대답은 달라질 텐데. 그래서 나는 아이들에게 돌리는 쪽지상담지에서 '가장'이라는 수식어를 빼기 시작했다.

 

 이제 중학교에서는 석차를 산출하지 않는다. 줄 세우기 식의 경쟁은 좋지 않다고 하면서 왜 설문지나 면접 질문에서는 여전히 지난날을 줄 세우려고 하는지. 


 최근에 있었던 일 중에 기분 좋았던 경험은?

 최근에 있었던 일 중에 속상했던 경험은?

 최근에 감명 깊게 읽은 책은?

 최근에 감명 깊게 본 영화는?

 최근에 즐겨 듣는 노래는?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 어차피 대답은 비슷하게 나올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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