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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리조 Nov 14. 2019

삶의 작동원리

이름하여 우선순위의 법칙

 아이들 모두 조용히 책을 읽고 있는 가운데 한문 숙제를 하고 있는 서현이를 발견했다. 평소 맨 앞에 앉아서 대답도 잘하고 열심히 참여하는 아이라 배신감이 더 크게 느껴졌다. 바로 한문 노트를 빼앗아 교탁 위에 올려놨다가 수업이 끝나고 교무실로 들고 갔다. 서현이가 노트를 찾으러 오면 조용히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바로 찾아올 줄 알았는데 한문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쭈뼛대며 교무실에 왔다. 한문 시간엔 노트가 없다고 또 혼났을 텐데.


 국어 시간엔 수학 숙제를 하고, 수학 시간엔 영어 단어를 외우고, 영어 시간엔 학원 숙제를 하는 아이들이 있다. 그런데 몇 년 간 학교 현장에서 보니 최상위권 아이들의 특징은 그 시간엔 그 시간 공부만 한다는 것이었다. 잠시 수업과 관련 없는 내용이 이어져도 내 눈을 응시하며 집중하던 아이들이 명문 대학에 입학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을 때마다 나는 이것이 진리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국어 수업 시간 규칙 중 한 가지를 '책상 위에는 국어 교과서와 파일, 필기도구만 올려놓기'로 정했다. 매 시간 수업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책상 위를 정리하자는 말을 한다. 


 그런데도 여전히 수업 시간에 다른 공부를 하다가 걸리는 아이들이 있다. 심지어 시험 기간에 학원 숙제를 하다가 걸리는 아이들도 있다. 정말 마음이 아프다. 아이를 불러서 진지하게 이야기한다. 네가 학원에 다니는 이유가 뭐냐고, 엄마가 다니라고 해서라고 대답하는 아이들도 가끔 있지만 대부분은 공부를 잘하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학교 공부를 잘하기 위한 목적으로 학원에 다니고 있는데 학원 숙제 때문에 학교에서 수행평가 점수가 깎이거나 벌점을 받고 선생님께 혼나는 이 상황이 말이 되는 것 같은지 물어본다. 앞뒤가 바뀌어도 제대로 바뀐 것 같지 않냐고. 우선순위를 다시 생각해보라고 말한다. 



 



 수능날만 되면 신기하게도 기온이 더 떨어진다. 올해도 어김없이. 퇴근길에 부장님이랑 걸어오면서 오늘 저녁은 뭘 먹을지 대화를 나누었다. 오늘은 날씨가 너무 추우니까 뜨끈한 국물 있는 음식을 먹고 싶었다. 요리에 시간과 노력을 들이고 싶지 않은 나는 머릿속에 '라면'을 떠올렸다. 집 앞에 있는 마트, 라면 코너로 향했다. 며칠 전날 밤에 남편 혼자 왕뚜껑을 먹었던 기억이 났다. 한 젓가락만 먹어보라며 내게 여러 번 권유했지만 기특하게도 나는 끝까지 거절해냈다. 그런데 그 이후로 마음 한 구석에는 계속 그때 먹지 못한 왕뚜껑이 남아 있었나 보다. 


 라면은 되도록 먹지 않으려고 늘 생각은 하고 있다. 하지만 라면만큼 간단하면서도 든든하게 속을 채울 수 있는 음식을 달리 찾기 어렵다. 마트에 서서 왕뚜껑과 김치 왕뚜껑의 영양성분을 열심히 비교해봤다. 칼로리는 그냥 왕뚜껑이 5칼로리 더 높은데 나트륨은 김치 왕뚜껑이 더 높다. 칼로리도 칼로리지만 나트륨 수치를 보니 괜히 먹기가 겁난다. 갑자기 영양성분 앞에서 망설이고 있는 나답지 않은 모습이란! 


 냉장고 쪽으로 가서 라면을 대체할 만한 음식이 있을지 찾아봤다. '김치 우동'에 노란색으로 할인한다는 가격표가 붙어있었다. 할인을 한다고 해도 라면보다는 세 배 비싼 가격이다. 왕뚜껑보다 칼로리가 100 이상 더 낮다. 나트륨은 오히려 왕뚜껑보다 높은데 정말인지 칼슘과 철분도 함유되어 있단다. 오홋, 오늘 저녁은 김치 우동, 너로 결정했다. 집에 와서 우동을 조리하는데 뒷면을 보니 건강을 위해 국물은 적게 먹고 면 위주로 먹으란다. 그리고 나트륨을 배출할 수 있는 양파나 버섯, 숙주나물을 넣어서 함께 먹으라는 말이 있었다. 싱겁게 먹으려고 물을 권장량보다 많이 넣고 우동 소스를 3분의 2 정도만 넣었다. 냉장고 안에 있는 새송이버섯을 급히 썰어서 우동 안에 넣었다. 비주얼은 그럴듯했지만 국물을 한 숟갈 떠먹는 순간 후회가 몰려왔다. 싱겁다, 맛이 없다. 내가 언제부터 나트륨을 신경 썼다고 갑자기 영양성분을 봤을까. 스스로에 대한 원망이 몰려왔다. 


이것은 왕뚜껑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차라리 슈퍼맨을 고를지 배트맨을 고를지 고민했어야 했다.




 오후 동안 나의 행적을 되짚어보면 내가 우선순위로 여기는 게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요리하면서 시간을 길게 보내고 싶지는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처음부터 우선순위에서 요리는 쭉 밀려나버렸다. 저녁 메뉴 중에는 뜨끈한 국물이 우선순위에 있었다. 칼로리와 나트륨 중에는 칼로리의 우선순위가 더 높아 라면 대신 우동을 샀고, 조리를 하면서는 갑자기 건강의 우선순위가 높아져 버섯을 넣고 물을 많이 붓는 참사가 일어나버렸다. 그리고 맛없는 우동을 먹으면서는 이것을 다 먹어야만 한다는 의무감이 최고의 우선순위였다. 






 내 나이 때의 사람들은 흔히 친구들을 만날 시간이 없다고 말한다. 결혼한 친구들은 대부분의 주말을 가족들과 보낸다. 물론 나도 그렇다. 마음이 가는 방향이 어느 쪽이든 우리들의 우선순위는 친구보다는 가족인 것이다. 또 만약 두 명의 친구가 같은 날 같은 시간에 만나자는 제안을 해온다면? 우리는 재빨리 머리를 굴려 우선순위가 더 높은 친구와 약속하게 될 것이다. 결국 우리 삶이 흘러가는 모든 게 이런 맥락이지 않을까. 


 비싼 학원비가 떠올랐든, 무서운 학원 선생님이 떠올랐든, 학교 수업 시간에 학원 숙제를 하고 있는 아이는 그 순간에 학교 수업보다 학원 숙제의 우선순위가 더 높았던 거라고 생각한다. 국어 시간에 한문 숙제를 하고 있었던 아이는 그 순간에 국어 수업보다 한문 숙제의 우선순위가 더 높았던 것이다. 우선순위에서 밀려났다는 생각이 들 때면 서글픈 감정이 느껴지기도 한다. 


 김치 우동을 사들고 오면서 경비실에 들러 택배를 한 상자 찾고 우편함에서 건강검진 결과지를 가져왔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가방을 내려놓고 옷을 편하게 갈아입은 다음 건강검진 결과지를 먼저 펴봤다. 어쩌면 김치 우동을 조리하기 전에 건강검진 결과지를 펴본 게 우선순위를 순간적으로 바꿔버린 것일 수도 있다. 우동을 끓여 먹고 설거지는 잠시 미루어두고 바로 컴퓨터를 켰다. 오전에 도착했다는 택배 상자는 아직까지도 열어보지 않았다. 빨리 공부를 시작해야 한다면서 책 주문을 서둘렀던 때는 언제인지. 아마도 나는 컴퓨터를 하다가 시간이 되면 운동을 나가겠지. 운동을 다녀와서는 밀린 설거지를 하고 내일 수업 준비를 하고 잠들겠지. 우선순위가 밀리고 또 밀리고 있는 택배 상자는 언제 열어보게 될까.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가 무엇인지 이제는 어렴풋이 알 수 있을 것 같다. 



미로 속에서 방향을 인도하는 건 결국 우선순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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