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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리조 Feb 05. 2020

인생에도 졸업이 정해져 있다면

여전히 어려운, 끝까지 어려울 문제 

2020년 2월 일반적인 졸업식 안내


 강당에서 학생 1명씩 슬라이드를 띄우며 이름과 사진, 장래희망, 진학 고등학교를 소개한다. 아이들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교장 선생님과 악수를 하며 졸업장을 받고 담임은 무대 한 구석에 서서 아이들을 안아준다. 무대에서 내려온 아이들은 부모님이 준비해오신 꽃다발을 받고 함박웃음을 지으며 기념 촬영을 한다. 매년 2월마다 반복되던 일반적인 졸업식 풍경이다. 


 그런데 올해는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의 영향으로 졸업식의 풍경이 달라졌다. 졸업식장 장소는 모두 각 반 교실. 개학하자마자 학부모님들께 졸업식 방문 자제를 부탁하는 가정통신문을 보냈다. 인터넷에 떠도는 신종 코로나 졸업식 풍경 속에는 마스크 쓴 담임선생님이 마스크 쓴 학생에게 1명씩 졸업장을 나눠주는 기이한 모습이 남아있었다. 졸업장을 들고 찍은 단체사진에는 얼굴보다 마스크가 더 선명하게 보이는 느낌이었다. 우리 학교 3학년 아이들은 "왜 하필 우리 졸업할 때"라고 불평하며 아쉬움을 표했다. 강당에서 진행되던 한 시간 남짓의 졸업식을 교실에서 혼자 진행해야 하는 담임도 부담이 가중된 게 사실이었다. 


 신기하게도 아직 기억 속에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졸업식이 선명하게 남아 있는 걸 보면 분명히 인식하지는 못했지만 소속이 바뀌는 졸업식이라는 하루의 무게감이 내게도 꽤 컸던 것 같다. 세 종류의 학교급 중에 내가 언제나 가장 아름답게 추억하는 시기는 중학교. 중학교 생활이 끝났다는 후련함이나 고등학교 생활에 대한 설렘보다는 아쉬운 마음만 앞섰던 중학교 졸업식날. 그날 서울에는 눈이 정말 많이 내렸다. 꽃다발을 들고 깡뚱해진 교복 치마를 입고 찍은 필름 사진에는 그날의 눈을 평생 기억이라도 해달라는 듯 눈송이가 남아있다. 카메라에 붙은 눈송이가 친구의 얼굴을 정확히 가려버린 사진도 있다. 디지털카메라 시대가 아니었던지라 사진 한 장 한 장이, 그 안에 담긴 친구 얼굴 하나하나가 더욱 소중하게 느껴진다. 내가 '중학교 졸업식'하면 '눈'을 먼저 떠올리는 것처럼 올해 졸업하는 아이들은 '코로나'를 떠올리지 않을까. 






 매 졸업식이 아쉬웠지만 눈물을 흘린 적은 없었다. 친했던 친구들과 흩어져서, 이제는 많아진 나이만큼 더 어려운 공부를 해야 한다는 걱정이 앞섰지만 기특하게도 운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애초에 계획되어 있었던 일이었으니까. 그리고 같은 해에 태어난 친구들과 어쨌든 비슷한 길을 걷고 있다는 생각은 꽤나 든든했다. 


 인간의 경우 30세가 넘어가면 약 8년마다 사망률이 두 배씩 늘어간다고 한다. 나이가 들수록 사망 위험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간다는 곰페르츠의 법칙이라고 하는데 어느새 30이 훌쩍 넘어버린 나는 책에서 이 구절을 읽으며 등골이 오싹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꼭 한 번 읽어보고 싶다며 도서관에서 빌려온 <죽음의 에티켓>이라는 책은 앞부분부터 독자들에게 '너도 죽을 거야!'라는 생각을 각인시키고 있었다. 네가 종교를 가지고 있든 아니든, 운동을 하고 건강에 좋은 음식만 찾아 먹든 아니든 어떻든 너도 죽을 거라는 말이 반복되는 걸 읽으며 왠지 소심해진 나는 일단 그냥 책을 덮었다. (아직 1/3도 못 읽었어요.)


 몇 년 전에 작은 수술을 받으며 전신 마취를 한 번 받아본 적이 있었다.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대형 병원에서 수술실이라는 곳에 처음으로 입장을 하니 너무 무서웠다. (겁이 많고 엄살이 심해요 저는) 뭐 어떤 다른 표현이 더 필요할까? 수술실 안에는 말 그대로 나밖에 없었다. 수술실의 두터운 문을 경계로 인연을 맺고 있던 사람들과도 다 끊어진 느낌이었다. 온전히 나 혼자였다. 나 혼자 이 무서움을 감내해내야만 했다. 마취 의사가 주사를 놓고 가는데 여기서 정신을 잃으면 다시는 못 깨어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나는 준비가 안 된 것 같은데 어떡하지'라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이를 악물었다. 원래 잠을 잘 자서 그런지 마취도 아주 잘 되는 편이라 결국 이내 잠들었지만 마취가 풀리고 보니 아랫입술을 꽉 깨물고 마취되지 않으려고 했던 노력이 피맺힘의 형태로 남아있었다. 뒤늦게 입술에 찍힌 이빨 자국을 보고 내가 본능적으로 얼마나 삶에 대한 의지가 강한 사람인지 깨달았다. 


 입학하는 순간 졸업이 예정되어 있듯이, 태어나는 순간 죽음이 예정되어 있는 것도 마찬 가지. 졸업하는 사람에겐 그동안 수고했다며 축하한다는 말을 전하지만 죽음을 앞둔 사람에겐 슬픈 마음만 앞선다. 졸업은 더 넓은 세계로 나아가는 개념이고 죽음은 말 그대로 끝이라는 생각 때문일까. 너무나도 갑자기, 예기치 않게 다가오는 그 상황을 받아들이기 힘든 이유가 커서일까. 





 인생에도 처음부터 졸업이 예정되어 있다면 어떤 모습일까 상상해봤다. 3학년 기말고사까지 달려가다가 시험이 끝나자마자 확 풀어져서 졸업을 기다리듯이 어느 시간까지 맡은 일을 하다가 남은 약간의 시간에는 여유를 갖고 죽음을 준비할 수 있을까. 그렇게 예정되어 있다면, 마지막 그 순간 '아직 나는 준비가 안 된 것 같은데 어떡하지'와 같은 생각 대신 '이 정도면 됐다'라고 생각하며 평온하게 눈 감을 수 있을까. 만약 그렇다면 졸업을 앞둔 학생을 격려하듯이, 죽음을 앞둔 사람에게도 그동안 고생 많았다며 토닥여줄 수 있을까. 


 여전히 어렵다. 아마도 내 머리가 돌아가는 마지막 순간까지 죽음에 대한 생각은 여전히 어렵기만 할 것 같다. 그렇기에 살아있는 이 순간 조금씩 더 성장하고 성숙해져야겠다고 생각한다. 하핫. 


알게 된다면 성냥을 쌓으며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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