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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리조 Mar 30. 2020

내 인생을 바꾼 그 해 사월

절대 잊지 말자

홈페이지에는 로그인을 해야 되나요?

볼펜으로 써도 돼요?

A4 용지가 없으면 어떻게 하나요?

영상은 2개만 보면 되나요?

영상 보면서 노트에 써야 돼요?

선생님 영상이 안 나와요.


  단언컨대 내 평생에 이렇게 연락이 많이 왔던 적이 없었다. 아침저녁, 평일 주말 구별도 없다. 그래도 친절하게 열심히 대답을 해줘야지, 질문을 한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기특하고 고마운 일인데! 생각하다가도 반복되는 비슷한 질문에 나도 모르게 한숨부터 나온다. 지난주에는 한동안 두통에 시달렸다. 카톡방에는 내 표정이 보이지 않아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피차일반이다. 뭐 하라는 게 이렇게나 많은지 매일 같이 올리는 내 메시지에 아이들 또한 두통에 시달리고 있는 건 아닌지 걱정도 된다. 이놈의 코로나 때문에 전례 없는 교육부 지침은 이어지고 그에 맞춰 전달되는 교육청 공문에 학교는 교사들을, 교사는 아이들을 힘들게 하고 있다. 급한 마음에 서로를 탓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결국 다 코로나 잘못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자꾸만 잊어간다. 10년이 훌쩍 넘었으니 이제는 잊을 만도 하지만 아이들 앞에 서있는 한 언제까지고 절대 잊어서는 안 되는 경험인데. 




 나는 교사가 되고 싶지 않았다. 기억 속에 그렇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남아있는 선생님이 없다는 건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저 선생님 같은 어른이 되어야지'와 같은 생각보다는 오히려 '저 선생님 같은 어른은 절대 되지 말아야지'와 같은 다짐을 하며 나이를 먹었다. 어려서는 더 말수도 적고 어둡고 부정적이었던 나를 대하는 게 선생님들도 많이 어려웠을 것 같다. 하지만 밝고 똑똑한 친구와 대놓고 비교를 하거나 시험 시간에 지나가면서 반장에게 슬쩍 답을 알려주는 선생님들의 모습에 나는 점점 더 삐딱해질 수밖에 없었다. 나의 학생 시절을 떠올려 보면 정말 말도 안 되는, 지금이라면 뉴스에 나오고도 남을 일들이 너무 많이 벌어졌고 그런 시간 하나하나가 소심했던 내게는 아직까지도 상처 또는 분노로 남아있다.


 그럼에도 나는 고등학교 때부터 장래희망란을 '교사'라고 채웠다. 이유는 간단했다. 되고 싶은 게 없었고, 알고 있는 직업이 별로 없었다. 그냥 일단 '교사'가 되고 싶다고 써놓으면, 문과를 가면 국어교사가 되고 싶었다고 이과를 가면 수학교사가 되고 싶었다고, 둘러대면 다 착착 맞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렇게 칸을 채우고 나서는 가끔씩 내가 정말 교사가 되고 싶어한다는 착각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선뜻 자신 있게 꿈꾸지 못했던 것은 교실에서 내 앞에 서있는 선생님이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가 가장 컸다. 


 운 좋게 사범대학에 진학해서 졸업하면 2급 정교사 자격증이 주어지는 조건을 눈 앞에 두고 진로에 대한 고민은 폭풍처럼 몰아닥쳤다. 3학년이 되고 동기들이 다 노량진에서 교육학 공부를 시작할 때, 나는 강남 파고다 학원에서 일본어 공부를 시작했다. 4학년을 앞둔 방학에도 노량진에 앉아있는 동기들과 달리 나 혼자 일본어 캠프에 가있었으니, 지금 생각해도 정말 깜깜하다. 그 당시 나는 어렴풋이 일본어와 국어에 관련된 일을 하고 싶다고 생각했었는데 그러기엔 일본어 실력이 너무 형편없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가다가 대학교 졸업을 위해 떠밀려 가게 된 게 바로 '교육실습'이었다. 모교 중학교에서 4월 한 달 동안 교생 선생님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처음으로 산 어색한 검은색 정장을 입고 대학교에서 준 교육실습일지를 들고 교실 뒤를 어슬렁거렸다. 아이들은 힐끔거리며 뒤를 돌아봤고 한 명씩 다가와 가벼운 질문을 하고는 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실습을 한 첫날, 자려고 누웠는데 낮에 봤던 아이들 얼굴 하나하나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중학교 1학년이 그렇게 어린지 그 전에는 알지 못했다. 아직도 아기 같은 귀여운 얼굴들이 떠오르는데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첫날부터 한 달 뒤의 헤어짐이 아쉬웠다. 


 쉬는 시간, 점심시간마다 아이들을 보러 갔다. 조금 지나고 나서는 과목 담당 선생님들의 허락을 받고 하루 종일 아이들과 함께 수업을 들었다. 현장에 와서 보니 들어오라고 말씀해주시는 게 쉬운 일이 아닌데, 그때 선생님들을 다시 뵙는다면 정말 감사했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아이들이 낙서해서 준 쪽지 하나도 어찌나 애틋한지 책상에 붙여놓을 정도였다. 아이들과 찍은 사진 한 장 한 장이 너무 소중해서 따로 인화해 한동안 냉장고에 붙여놓을 정도였다. 스스로에 대한 새로운 발견이었다. 내가 애들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선뜻 믿기 어려웠지만 사실이었다. 그 언제보다 그 해의 사월이 애틋하고 설렜으니까.


 교육실습이 끝나고 1학기를 바쁘게 마치자마자 아이들을 다시 만나고 싶다는 일념으로 임용 공부를 시작했다. 마음만 앞섰을 뿐 그 시험이 그렇게 쉬울 리가 없었다. 떨어지고 울고, 떨어지고 울고, 그 시간을 떠올릴 때마다 지금 이렇게 아이들 앞에 서있는 내 모습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교사가 되고 매년 100명 정도의 아이들과 인연을 맺고 있다. 벌써 10년을 했으니 내가 교실에서 만난 아이들을 다 세어보면 약 1000명이 넘을 것 같다. 아이들은 폭풍성장을 하는 반면 나는 조금씩 나이 먹고 있으니, 길을 지나가다가 마주치면 아이들은 알아보는데 나는 알아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가끔은 어떤 얼굴이 떠오르는데 이 얼굴이 나의 학창 시절 친구인지, 이전 학교 학생인지, 이번 학교 학생인지, 언제 누구인지 뒤죽박죽이 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내 인생을 바꾼 그 해 사월, 나 혼자 엄청나게 짝사랑했던 1학년 8반의 그 서른여섯 명은 비교적 또렷하게 기억에 남아있다. 그 아이들의 나이도 어느덧 20대 중반, 그때의 나보다 더 나이 든 아이들은 이제 제법 어른스러운 고민을 안고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ebs 온라인 클래스, e학습터, 위두랑 클래스, 과목 밴드방, 아이들이 가입해야 한다는 지시는 계속 내려오고 나는 잠시 인상을 찌푸렸다가 어쩔 수 없이 전달한다. 하라는 게 너무 많아서 힘들겠지만 조금만 더 힘 내보자는 말을 덧붙였다. 메시지를 올리자마자 한 아이의 '네에 선생님도 코로나 조심하세요!'라는 대답에 갑자기 마음이 따뜻해진다. 잊으면 안 되는데 자꾸만 잊어간다. 내 인생을 바꾼 그 해 사월, 아이들을 만나고 싶다는 바람 하나로 두 손 모아 기도하던 그 시간들. 


그때 걷던 길, 그리고 그 해의 벚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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