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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N Jan 14. 2019

무정한 밤! 야속한 밤!

1993년 2월 11일

무정한 밤! 야속한 밤!

1993년 2월 11일



연희야 어젯밤은 해도 해도 너무 했다.

외할머니 생신이라 낮에 잠깐 면목동에 들렀다가

다시 보험회사에서 근무를 마치고 돌아오니 밤 11시가 넘은 시간이었단다.

지친 몸을 이끌고 잠자리에 들기 위해 보채는 너를 이리 달래고 저리 달래 보았는데

아! 이것이 웬일! 너는 새벽 세시까지 잠에 들지 않더구나.

네가 잠에 들기까지 기다리다가 모든 것을 내려놓고 아닌 밤중에 빨래며 설거지, 방청소까지 했단다.

엄마 너무 졸리고 피곤해. 누가 알아줄까. 무정한 밤! 야속한 밤!

모두가 잠자리에 드는 새벽 두세 시경이면 알람이라도 맞춰놓은 듯이 깨어나 칭얼댄다니까.

잠을 잘 수 없다니 사실 정말 미칠 지경이란다.

나는 원래 잠에 들면 누가 업어가도 모를 지경으로 자는 사람인데 말이야.


이런 상황이 계속 반복된다면 언젠가 나에게 한계가 올터인데 걱정이야.

사실 나는 무척 직설적인 데다가 다혈질이라 화를 내면 아주 무섭거든.

자랑할 것은 못되지만 활화산 같은 사람이야.

내 성격이 어떤지는 나중에 외할머니께 한번 여쭤보렴.

대학생 때 학생운동에 참여한다고 북치는 연습하던 것부터 얘기하실 게다.

아이가 생기면 아이에게 큰소리를 치거나 체벌을 하지 않기로 결심했었단다.

어렸을 적 외할아버지가 매를 드실 때마다 반항심에 고집만 더욱더 늘어갔었거든.

쇠고집이 매질 덕에 철옹성으로 거듭난 거지.

큰 소리는 폭언을 낳고 매는 폭력을 낳게 마련이야.

모든 것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가능하다면 말로 이해시키고 설득시키려고 무진 애를 쓴단다.

너를 인격체로 생각하기 때문이야.

남은일은 인내하고 연습의 연습을 거듭하는 것이지.







오늘도 자지 않고 울고 보채는 너에게 밤이라는 시간을 설명하기 위해 둘러업고 밖에 데리고 나갔다 왔단다.

낮에는 파란 하늘과 따사로운 햇빛을 구경시켜 주었으니 까만 밤하늘에 총총히 박힌 별들도 보여주었지.

해님과 달님의 차이를, 그리고 밤이 되면 세상이 까무룩 잠에 든다는 사실을 설명해 주었단다.

총명한 네 두 눈으로 세상 하나하나를 직접 확인할 수 있기를 바라.

그 모든 것이 인생의 자양분이 되어 줄 거란다.

조용히 내 말을 이해하는 것 같은 눈치이길래 안으로 들어와 너를 눕혀놓았는데

아니나 다를까 또 울기 시작했어. 나는 대체 무엇과 싸우고 있는 걸까.

인내할 수 있기를.


우리가 사는 방은 방음이 잘 되지 않아서 소음이 모두 새어나가거든.

옆방 총각이 수더분하니 사람 좋기에 망정이지. 건넌방의 아가씨였으면 매일 밤 쫓아와 소리쳤을게다.

총각한테 너무 미안하네. 엄마인 내 귀부터 따가워 참을 수 없을 정도인데 말이야.

무엇이 그렇게 불만이니 연희야. 동네 사람들을 생각해서라도 너를 안아주어야만 하겠지.

벌써 새벽 1시 51분이구나. 아마 3시는 되어야 또 잠을 청할 수 있겠지. 제기랄.

이건 내가 속으로 하는 욕이야. 너에게는 웃음만 보여줘야 하니까.






LEN

일러스트레이터, 디자이너

인스타그램: lotus_hee_illust

메일: choyeonheee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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