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인의 세상

화해하는 글쓰기 Day 13

by SashaPark


KakaoTalk_20210730_232147338.jpg

작품 : Judith Slaying Holofernes (1614–1620), Artemisia Gentileschi


회사를 너무나 그만두고 싶었던 때도 있었다. 그 때 '버티는 사람이 가장 강한 사람이다'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래서 더 버텨보기로 했다. 왠지 나의 인내심이 부족해서 내가 내 자신에게 굴복하는 건가 하는 그런 미련하지만 뚝심있는 마음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건 어쩌면 어렸을 적 갈고 닦은 스포츠맨십의 발동이었을 수도 있다. 저 그림속의 여인처럼 상대를 죽여버리고 싶었던 적도 많이 있었지만, 그저 참는 것 밖에는 할 수 있는게 없었기 때문에 그리고 끝을 봐야만 직성 풀리는 그런 지점이었을 것이다. 억울하면 성공하라는 말이 왜 나왔겠는가. 그렇게 3년이 더 흐르자 정말 회사에서는 날 우수사원으로 상을 주었다. 상이라는 것은 인정이 담겨 있는 것이었기에, 이제는 회사를 떠나도 어떠한 원망도 미련도 후회도 없을 것 같았다. 그 때 박수칠 때 떠나는 심정을 좀 이해했던 것 같다.

회사를 떠나며 끝날 줄 알았는데 회사 밖의 인간관계에서도 정말 힘들었던 사람이 있다. 이쯤되면 내가 문제가 있나 싶기도 했지만, 그래도 그 때는 내 스스로에게도 문제가 있지 않은가 물을 정도의 품은 있었기에, 상대를 역행보살로 바라보고는 했다. 그 때 '나를 죽이지 못하는 고통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든다'라는 니체의 말을 만났다.[What does not destroy me, makes me stronger. - Friedrich Nietzsche] 그 관계로부터 힘든 것만 느껴질 때에 내게 그 말은 '내가 강해진다는 것은 어떤 모습일까' 새로운 관점을 심어준 계기가 되었다. 물론 관점의 전환이 아주 쉬운 것은 아니었다. 어려운 관계는 계속 어려웠지만(나의 노력 여하와 상관없이 닥치는 그런 일들도 있는 법이다), 상대를 바꿀 수는 없었지만,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지자, 다른 풍경들이 눈에 들어왔다. 상대의 아픔도 보이고, 나의 고집도 보이고 상대가 나를 아프게 하는 지점 너머가 보였다. 그것이 자비심이었는지, 아니면 날 죽이지 못한 고통이 날 더 강하게 만들어서 보이는 새로운 풍경이었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기들을 존버하고 지나오니, 불교에서의 '고성제'라는 말이 이해가 간다. 고통이 성스럽다는 말이 그 당시에는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건너온 지금에서는 그 이유가 있나 싶기도 하고 그랬기에 지금의 내가 있나 싶기도 하다. 고통의 성스러움을 뭐 그리 자주 느끼고 싶은 건 아니지만(아프니까 청춘이다 이런 말 별로 안 좋아한다), 확실히 사람이 깊어지고 넓어지는 것은 있는 것 같다. 그래도 고통 없이 순수하고 있는 그대로 행복한 마음자리를 지킬 수 있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 그렇더라도 고통을 비껴갈 자가 이 지구상에 있을까. 그 본질을 성인들은 이미 알고 생노병사의 고통을 피해갈 자가 없다는 것, 이 세상이 원래 인내하고 버텨야 하는 세상임을 지혜로운 자는 알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지혜로운 자는 고통이 다가오기 전에 이미 알고 그 품을 넓히고 스스로 강하게 만드는 것 같다.

산스크리트어에 감인계(堪忍界, sahā-loka-dhātu) 즉 감인의 세상이라는 말이 있다. 사바세계(娑婆世界)와 같은 말로 범부들이 갖가지 고통을 참고 견뎌야 하는 이 세상이라는 뜻이다. 이 세상의 순리가 참아야만 견뎌야만 살아지는 그런 곳이라는 것이다. 근육을 키우듯이 마음의 근력도 고통과 함께 자라나나보다. 감인의 세상에서 난 얼마나 강인해지려고 이러나. 적어도 그림에서처럼 누군가를 살인하고 싶은 충동에서는 구해주겠지.

Day13_해석

�화해하는 글쓰기 Day 13 - 21. 7. 28.(수)

끔찍한 살인 현장을 묘사한 작품입니다. 한 여성이 남성의 목에 칼을 힘껏 찔러 넣고 있습니다. 눈이 하얗게 돌아가며 죽어가는 남자가 저항해보지만 옆에 선 여성이 온 몸으로 짓누르고 있어 쉽지 않습니다. 반쯤 베어진 목에서 솟구치는 피가 사방으로 튀며 하얀 침대를 붉게 물들이고 있습니다.


작품의 제목은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디트'입니다. <유디트>는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민족을 구한 영웅이에요. 옆 나라인 아시리아 군대가 이스라엘을 침공해 왔을때, 무희처럼 치장하고 적군에 들어가 수장인 홀로페르네스 장군을 취하게 만들어 목을 베어버렸지요.


많은 화가들이 <유디트>주제를 ‘팜프 파탈’의 소재로 즐겨 그렸습니다. 대부분의 작품들이 장군을 유혹한 유디트의 미모에 집중했습니다. 그러나 이 작품 속 유디트는 강인한 여전사의 모습입니다. 어느 유디트 작품과 비교하여도 압도적으로 강렬한 이 작품의 화가는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라는 이탈리아 바로크 시대 화가입니다. 그리고 작품의 배경에는 그녀 인생의 트라우마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젠틸레스키는 미술 스승이자 아버지의 친구였던 타씨라는 사람에게 10대의 나이에 강제로 성폭행을 당했습니다. 심지어 그는 유부남이었어요. 그녀는 강간 소송을 제기했지만, 사람들은 그녀를 실력있는 화가를 끌어내리려하는 꽃뱀이라 욕했습니다. 7개월 간 이어진 소송 기간동안 그녀는 생식기에 손가락을 넣어 하는 처녀성 검사와, 손가락 주리를 틀어 진술을 검증하는 진실성 검사를 하는 등 온갖 수모를 겪습니다.


그리고 이 소송은 이탈리아 전역으로 소문이 퍼지게 됩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타씨가 다른 도시에서 자신의 처제를 강간하고 아내의 살해모의를 했던 사실이 알려지고, 젠틸레스키 강간 사건의 목격자가 증언하게 되면서 결국 젠틸레스키가 승소하게 됩니다. 하지만 고통과 오욕의 연속이었던 재판은 그녀에게 '상처뿐인 승리'가 아니었을까요.


이제 작품 속 홀로페르네스와 유디트가 누구의 얼굴로 그려졌을지 짐작이 되실 겁니다. 젠틸레스키는 홀로페르네스의 얼굴에 증오하는 타씨를, 그리고 유디트의 얼굴에는 자화상을 그려 넣었습니다. 작품의 강렬한 현실감은 그녀가 마음속에서 수천번 타씨를 죽였기에 가능했던 것이 아닐까요.


하지만 제가 젠틸레스키를 좋아하는 이유는 탁월한 작품 때문만은 아닙니다. 더 멋진 점은 그녀가 평생의 트라우마가 될 사건 이후에도 미술과 삶, 커리어 중 어느 하나도 버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녀는 이후 결혼을 해 5명의 아이를 낳아 길렀으며, 무엇보다 화가로서 계속 승승장구하며 성공가도를 걸었습니다. 그녀는 죽을 때까지 자신의 삶에서 어떤 좋은 것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그녀가 가장 소중한 자기 자신을 끝까지 지켰다는 점입니다.


트라우마를 겪은 이후에도 사람들이 삶을 이어나간다는 것은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요. 혹시 여러분 중에서도 트라우마가 있는 분이 계실까요. 만약 계신다면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의 작품과 삶을 보시면서 저처럼 조금이라도 힘을 얻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어쩌면, 지금 당신의 삶을 계속해서 살아가는 그 자체만으로 이미 이긴 것은 아닐까요.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지독한 모성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