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해하는 글쓰기 Day 14
그림에 쏟아지는 햇살이 참 따스하게 보입니다. 가난 위에도 햇살은 내려앉습니다. 햇살이 가난을 구원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이 그림 속에서 그 햇살 마저도 없었다면 마치 희망이 사라지는 것처럼 여겨졌을 것 같습니다. 오른쪽의 작품을 보면서는 가난 속에서도 웃음은 피어나고 재밌는 주사위 놀이 속에 몰입한 아이들의 모습도 보입니다. 하지만, 헐벗은 아이들의 모습을 보니 마냥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습니다. 강아지의 시선도 못내 신경이 쓰입니다. 집에서도 뭔가 먹을 때 보리(우리집 털복숭이 가족)가 쳐다보고 있으면 혼자 먹기 미안한 마음이 들 때가 있거든요. 가난은 나랏님도 구제할 수 없다고 한 말이 있는데, 지금 이 세상은 온 세상의 사람들이 함께 나눠먹어도 충분할 양식들이 있다고 하는데, 한 곳에서는 누군가 여전히 굶고 거지가 되고, 한 곳에서는 부가 넘쳐 흘러서 형제끼리 싸움이 날 지경이라고 하지요. 어디서부터 이 가난의 이야기는 다시 쓸 수 있을까요?
천국과 지옥이 별개 아니라 긴 숫가락을 주고 살펴보니 천국은 서로의 입에 먹을 것을 떠 넣어주고, 지옥은 서로 자기 입으로 숫가락을 가져가다가 아무도 못 먹고 음식을 버리고 있더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1600년대나 지금이나 부익부 빈익빈의 시대를 살고 있지만, 그 지옥을 바꿀 수 있는 건 어쩌면 햇살 같은 마음 한 줌은 아닐지 생각해봅니다. 누군가는 너무 이상향적인 생각이라고 사회주의도 폭망하고 공산주의도 폭망하고 인간의 본성 때문일까요? 전생의 업보 때문일까요? 가난은 여전히 두렵고 무섭고 안타깝고 그렇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 없으면 거지 되는건데, 한 순간에도 저런 상황이 오지 말라는 법도 없고, 자신의 집한채 사는 것도 어려운 요즘 세상에서 우리의 모습은 아닌가 싶다가도, 이미 가지고 있는 많은 것들을 보면서 이렇게 많은 소유를 하고 있는데도 더 가지고자 하는 그 마음이 거지근성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언제나 곁에 함께 살아가는 이웃들을 살피면서 함께 풍요로운 삶을 누리는 아름다운 천국같은 세상이 펼쳐질까요. 지금은 저 자신이라도 누군가에게 폐끼치지 않기 위해서 노력해야 하는 상황이네요.
해설을 보니 이 배경이 세비야라고 합니다. 스페인에 여행을 갔을 때 우연히 들리게 된 세비야에서의 기억은 참 아름다운 도시라는 것과 열정과 화려함의 플라멩고가 기억나고 소매치기 범들과의 추억이 남아있습니다. 함께한 친구의 가방을 도난당해서 여권을 분실했고, 경찰서에도 가고 집으로 돌아올 수 있을지 없을지 여행에 큰 차질을 빚었던 그런 도시예요. 그럼에도 그 당시 뽀송뽀송 환한 태양으로 그 짜증났던 기억들이 증발해버린 기억이 있습니다. 내 소유의 집한채가 없는 현실로 자괴감이 들다가 그림을 보고 나자, 지금은 그 소매치기들의 안부도 궁금해질 정도로 여유가 생겼네요. 가진 것의 감사함을 모르고 더 가지고 싶어지는 사람들이 거지인가 싶으면서 여유가 없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 햇살 한 줌 담을 수 있는 풍요가 깃들 수 있는 주말 저녁이기를 바래봅니다.
Day14_해석
�화해하는 글쓰기 Day 14 - 21. 7. 29.
개인적으로 미술작품을 감상할 때 예술가의 삶에 관심이 많습니다. 하지만 과거의 예술가일수록 사료나 정보가 많지 않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게는 작품만으로도 예술가의 삶과 인품이 짐작될 때가 있는데, 그 중 한 명이 바로 에스테반 무리요입니다.
무리요는 17세기 스페인 바로크 시대의 화가입니다. 무적함대로 불리던 스페인의 황금기가 끝나가던 시기였습니다. 거기다 세비야에는 1649년 흑사병까지 창궐합니다. 오늘날처럼, 가난하고 아픈 자들이 가장 먼저 스러졌습니다. 부모님을 잃고 홀로 살아남은 어린 아이들은 그대로 길거리의 부랑아가 되어버렸지요. 누구도 이들에게 관심을 갖지 않던, 아니 누구도 그럴 여유조차 없던 시기에 무리요의 시선은 그들을 향해 있었습니다.
그의 작품 <거지 소년>입니다. 낡은 옷의 소년이 허름한 건물 벽에 기대 앉아 있습니다. 신발도 없이 걸었는지 소년의 상처 난 발바닥은 흙투성이 입니다. 방금 막 끼니를 때운 듯 새우껍질과 과일이 바닥에 널부러져 있어요. 어디에서 주워온 것들인지, 며칠만에 먹은 끼니였을지 알 수 없습니다. 오랫동안 빨지 못한 옷에 이가 있는지 옷 안을 집중해 살펴보고 있습니다. 이 죄없는 소년에게 차별없이 따뜻한 햇빛이 내리쬐고 있습니다.
다음 작품에서는 어린아이들이 모여 주사위 놀이를 하고 있습니다. 나름 꽤나 진지하게 집중한 모습이 귀엽지요. 왼쪽 편 한 아이는 입안에 먹을 것을 막 욱여넣고 있는데, 밑에서 강아지가 먹고 싶어 애가 타 죽을 모양입니다. 천진난만한 아이들의 깜찍한 모습이지만 사실 그들의 옷과 신발은 닳고 찢어져 안이 훤히 드러나 있습니다.
다 떨어진 옷을 입었을지언정 아이들의 모습은 천사들처럼 너무나 사랑스럽습니다. 곧잘 비천함과 같은 말처럼 사용되는 가난이란 것은 그저 아이들이 처한 안타까운 상황일 뿐입니다. 신이 존재한다면, 아마 그의 시선은 이들을 향해 있지 않을까요.
무리요 또한 이들을 동정이나 비난이 아닌, 다만 따뜻하고 온화한 시선으로 지긋이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곳에 그저 우리와 크게 다를 것 없는 어떤 이들이 굶주리고 헐벗고 보호받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는 조심스레 알려줍니다. 동시대 화가들이 귀족의 보드라운 비단과 티없이 깨끗한 미소를 그리는 동안 그는 이렇듯 가난한 이들의 삶의 궤적을 쫓았습니다.
무리요 개인의 짐작가능한 성품이나 개인사는 거의 알지 못하지만, 저는 그의 작품들을 보며 그가 누구보다 따뜻한 사람이었다고 감히 짐작하고 싶어집니다. 그의 작품을 보고 있으면 마치 그가 작품을 통해 이렇게 말하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신의 가호란 천사의 후광이나 하늘의 신성한 빛에 있지 않고,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이 사람들의 소중한 일상에 스며들고 있지 않겠느냐고 말입니다. 전염병이 창궐하는 요즈음, 그래서 저는 그의 작품이 더 유독 더 마음에 와닿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