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상호주관성은 어디에서 시작되는가

확장된 신체 감각과 몸의 공명

by 연담

지난번에 읽었던 Lemma의 Introduction to the Practice of Psychoanalytic Psychotherapy 중 Chapter 8, Transference and Countertransference를 다시 펼치며, 새롭게 눈에 들어온 단락을 필사했다. 전이와 역전이를 다루는 핵심 장인만큼, 한 번에 소화하기에는 밀도가 상당해 반복해서 읽고 있다. 이전에 이 장을 읽으며 필사했던 문장은 Theodore Jacobs가 말한 "resonance is not the same as replication"이라는 구절이었다. 치료자가 느끼는 감응은 환자의 경험을 그대로 복제하는 것이 아니라는, 중요하지만 자주 잊히는 윤리적 구분. 그 문장은 오래 마음에 남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하나의 질문은 남아 있었다. 그렇다면 치료자가 느끼는 그 '무언가'는 정확히 무엇이며, 어디에서 발생하는가 하는 문제였다. 마음의 반응인가, 사고의 산물인가, 아니면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은 어떤 감각의 흔적인가.


Lemma가 인용하는 Gallese의 embodied simulation 개념은 이 질문에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치료자의 몸에서 먼저 발생하는 긴장, 피로, 혹은 갑작스러운 공백감은 개인적 오류나 주관적 잡음이 아니라, 환자의 경험이 아직 언어로 조직되기 이전 단계에서 관계 속으로 투사되어 도착한 흔적일 수 있다. 이때 countertransference는 마음의 반응이기 이전에, 몸을 통해 먼저 감지되는 관계적 사건으로 이해된다.


Alessandra Lemma. 영국정신분석학회(British Psychoanalytical Society) 소속 정신분석가.


Vittorio Gallese. 이탈리아 파르마 대학의 신경과학자. 미러 뉴런(mirror neuron) 연구를 통해 인간이 타인의 행동과 감정을 어떻게 이해해는가를 밝혀온 인물.



이러한 관점에서 상호주관성은 오랫동안 강조되어 온 언어, 상징, 해석의 차원을 넘어선다. 타인의 경험은 말로 번역되기 전에 관찰자의 신체 상태를 변화시키는 방식으로 먼저 도착한다. 상호주관성은 마음과 마음 사이의 추상적 교류가 아니라, 몸과 몸 사이에서 조율되는 경험적 과정이다. 말해지기 이전의 어떤 것이 먼저 건너오고, 우리는 그 도착을 몸으로 알아차린다.


The work of Vittorio Gallese and colleagues is especially pertinent to our understanding of the somatic countertransference. Gallese (2007) proposes that:
Social cognition is not only ‘social metacognition’, that is, explicitly thinking about the contents of someone else’s mind by means of abstract representations. There is also an experiential dimension of interpersonal relationships, which enables a direct grasping of the sense of the actions performed by others, and of the emotions, and sensations they experience. This dimension of social cognition is embodied in that it mediates between the multimodal experiential knowledge we hold of our lived body and the experience we make of others.
Gallese has suggested that the mirroring mechanism for action and other mirroring mechanisms in our brain represent instantiations of embodied simulation. Embodied simulation provides a new, empirically based notion of intersubjectivity, viewed first and foremost as what he refers to as “intercorporeity”. Internal non-linguistic representations of the body-states associated with actions, emotions and sensations are evoked in the observer, as if he or she were performing a similar action or experiencing a similar emotion or sensation to the person who is being observed.




여기서 자연스럽게 질문이 이어진다. Gallese가 말한 embodied simulation과 Lemma가 논의한 somatic countertransference는 모두 상호주관성이 몸의 층위에서 먼저 발생한다는 전제를 공유한다. 그렇다면 신체가 동일한 물리적 공간을 공유하지 않는 디지털 매개 환경에서도 이 전제는 동일하게 작동하는가. 화면을 경유한 관계 속에서도 몸은 여전히 반응하는가.


나는 스마트폰이 등장하기 이전, 2G 휴대폰부터 사용해 온 세대다. 문서를 작성할 때 여전히 키보드로 타이핑 하는 것을 선호하고, 스마트폰을 손 닿지 않는 거리에 두는 경우도 많다. 그럼에도 오늘날 많은 사람들에게 스마트폰은 단순한 도구를 넘어, 신체 자각의 범위 안에 포함된 대상처럼 기능한다. 손에 쥐고 있지 않더라도 우리는 대개 그것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고 있으며, 그 부재는 때로 신체의 일부가 결여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같은 게임인데도 컴퓨터 마우스와 키보드를 사용하는 것보다 스마트폰으로 플레이하는 편이 더 편하다고 느끼는 아이들이 있다. 화면은 더 작고, 조작의 자유도는 오히려 제한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은 스마트폰 환경에서 더 빠르게 반응하고 더 오래 집중한다. 그들에게 스마트폰은 입력 장치라기보다, 손의 움직임과 화면의 변화가 거의 동시에 이어지는 하나의 감각적 회로처럼 작동한다. 버튼을 누르기보다 화면을 쓸어 넘기고, 손끝의 미세한 압력 변화에 즉각적인 반응이 돌아오는 경험 속에서, 게임은 '조작하는 대상'이 아니라 '함께 움직이는 장면'에 가까워진다.


이 차이는 숙련도의 문제가 아니라, 신체 자각이 어디까지 확장되어 있는가의 문제처럼 보인다. 마우스와 키보드는 여전히 신체 외부의 도구로 인식되지만, 스마트폰은 손에 쥐는 순간 신체 감각의 연장선으로 편입된다. 아이들에게 화면 속 캐릭터의 움직임은 손끝의 움직임과 분리되지 않으며, 그 경계는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이때 '편하다'는 감각은 효율성의 문제가 아니라, 몸과 매개체 사이의 마찰이 최소화된 상태를 가리키는 말에 가깝다.


이 장면을 떠올리면, 디지털 환경에서의 상호주관성은 더 이상 추상적인 질문으로만 남지 않는다. 몸은 여전히 반응하고 있다. 다만 그 반응이 발생하는 경로와 리듬, 지연의 방식이 달라지고 있을 뿐이다. 물리적 공간을 공유하지 않아도, 몸은 화면을 통해 도착한 타인의 리듬에 조율된다. 공명은 사라지지 않는다. 대신 분절되고, 지연되고, 다른 감각적 배치 속에서 재조직된다.


그렇다면 치료 장면에서, 혹은 관계의 장에서, 우리가 느끼는 이 미묘한 몸의 반응들은 어디까지 신뢰할 수 있을까. 디지털 매개 환경에서 발생하는 somatic resonance는 이전과 동일한 의미를 지니는가, 아니면 다른 해석의 틀을 요구하는가. 어쩌면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것은 상호주관성의 소멸이 아니라, 상호주관성이 작동하는 조건 자체의 변화일지도 모른다.


우리의 몸은 여전히 반응한다. 다만 디지털 환경에서 그 반응은 즉각적인 동시성이 아니라, 지연과 번역, 기술적 매개를 통과한 뒤 도착한다. 이 지연의 틈에서 우리는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놓치며, 무엇을 새롭게 사유해야 하는가. 질문은 아직 닫히지 않았다.


인공 진화기에 접어든 인류, 확장된 신체 감각과 인공적으로 매개된 지각 속에서, 상호주관성은 어떤 방식으로 재구성될 것인가. 언어 이전에 몸에서 발생하던 공명은 디지털 환경에서 어떤 형태로 변형되는가. Somatic resonance는 사라지는가, 아니면 다른 방식으로 분절되고 지연되며 재조직되는가?


인간은 여전히 육신을 가진 사피엔스다. 우리가 점유할 공간은 어디까지일 것이며, 그 과정에서 상호주관성이라는 개념은 무엇을 비추게 될까. 오래도록 곱씹게 될 질문을, 나는 다시 나 자신에게 돌려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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