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문득 다시 문헌을 읽은 뒤 그때그때 떠오른 생각들을 기록해 두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길게가 아니라, 짧게라도. 문헌을 읽을 때도 끝까지 이해하려 애쓰기보다, 잠시 머무는 방식으로. 요즘은 문헌을 많이 읽는 것보다, 한 문장을 오래 붙들고 있는 일이 더 필요하다는 느낌이 든다. 그래서 생각하기 위해 다시 글을 쓰기로 했다. 누군가를 설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생각이 어디로 흘러가는지를 보기 위해서.
브런치 스토리 계정을 처음 열었을 때는, 지금보다 훨씬 단순한 목적이 있었던 것 같다. 나도 출간 작가가 되고 싶다든지, 글을 쓴다는 행위가 어떤 이름으로 불리기를 바란다든지 하는 마음. 스무 편 남짓의 글을 올리고 나서야, 논문을 출판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글쓰기라는 걸 조금씩 느끼게 되었다. 그즈음부터 ‘작가’라는 호칭이 오히려 낯설게 느껴졌다. 내가 쓰는 이 글은 과연 누구를 향해 있는 걸까.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 걸까.
그때 올렸던 글들은 지금 다시 보면 다소 성급하다. 생각이 충분히 가라앉기 전에 문장으로 옮겨졌고, 어떤 문장들은 독자를 의식한 나머지 스스로를 설득하려는 말처럼 읽히기도 한다. 그 글들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때의 나는 글을 통해 무엇을 붙잡고 싶었는지 아직 알지 못했던 것 같다.
특히 <마음 산책>이라는 매거진은,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마음의 세계를 너무 빨리 설명해 버렸다는 감각을 남겼다. 사진을 고르고, 문장을 다듬고, 나름대로 친절하게 쓰려 애썼지만, ‘살아 있는 마음’을 그대로 포착하지 못했다는 느낌이 오래 남았다. 이해할 수 있다는 설명은 안도감을 주지만, 동시에 무언가 중요한 것을 잃어버리는 경험이기도 했다.
이해하려는 욕망.
이해했다는 착각 속에서 너무 쉽게, 너무 빨리 설명하고 싶어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다시 문헌을 천천히 읽기 시작한 것은, 바로 그 감각 이후였다. 설명하기 이전의 상태, 말이 만들어지기 전의 머뭇거림, 아직 개념으로 굳어지지 않은 마음의 움직임을 다시 만나고 싶었다.
그즈음, Joseph Sandler의 1981년 논문 「Character Traits and Object Relationships」를 읽다가 논문의 끝자락에서 한 문장 앞에 멈춰 서게 되었다. 그 문장은 그날의 독서를 멈추게 했고, 나는 그 문장을 필사했다.
그리고 몇 달이 지난 뒤, 그때 옮겨 적었던 문장을 다시 꺼내 읽으며, 또 한 번 필사해 본다. 같은 문장이지만, 읽히는 감각은 조금 달라져 있다. 그 사이에 내가 겪은 장면들과 생각들이, 이 문장을 다른 자리에서 만나게 만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Sandler는 이렇게 말한다.
Man is a social animal, but as psychoanalysts we must know that man lives simultaneously in two societies-one we know as the people in the real external world, and the other a phantom world in which the objects are equally real but unconsciously perceived. We interact with our objects in both these worlds and spend much of our waking life trying to modify ourselves and our environments so that the discrepancy between the two is minimized. From this flow transference, projection, rationalization, and a great many other familiar everyday phenomena.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지만, 정신분석가로서 우리는 인간이 동시에 두 개의 사회에 살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하나는 현실의 외부 세계에 존재하는 사람들의 사회이고, 다른 하나는 무의식적으로 지각되지만 그 대상들이 똑같이 실재하는 환영의 세계다.
Sandler가 이런 말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언제나 개념보다 관계에 먼저 서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정신분석의 언어를 확장하려 했지만, 그 확장이 환자의 경험을 앞질러 달려가는 일은 경계했다. 오래된 이론들을 버리기보다는, 그것들이 실제 사람 사이에서 어떻게 숨 쉬고 있는지를 다시 묻는 쪽을 택했다. 그래서 그의 글을 읽다 보면, 무엇인가를 이해했다기보다 누군가와 나란히 서서 같은 장면을 바라보고 있다는 감각이 남는다. Sandler에게 정신분석은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내는 작업이기보다, 이미 존재하고 있으나 쉽게 지워지는 인간의 경험을 다시 말할 수 있게 만드는 일이었던 듯하다.
이 문장은 새로운 이론을 제시한다기보다, 이미 우리가 살고 있는 상태를 정확히 짚어내는 말처럼 느껴졌다. 우리는 늘 두 개의 사회를 동시에 산다. 하나는 지금 눈앞에 있는 사람들과의 관계이고, 다른 하나는 과거의 기억과 환상, 기대와 두려움으로 구성된 세계다. 그리고 우리는 깨어 있는 시간의 대부분을 이 두 세계 사이의 어긋남을 줄이기 위해 사용한다.
이 문장을 읽으며 자연스럽게 진료실의 장면들이 떠올랐다. 환자는 분명 나를 보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 말이 언제나 지금 이 관계에서 비롯된 것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때로는 오래 전의 누군가를 향해 던져졌던 말이, 지금 이 자리에서 반복되는 것처럼 들린다. 정신분석가는 그 사실을 알아차리면서도, 동시에 지금 이 사람과 실제로 함께 있어야 한다. 두 세계를 모두 의식한 채로, 어느 한쪽으로 완전히 기울지 않는 상태를 유지하는 일은 생각보다 많은 에너지를 요구한다.
Sandler가 말한 두 개의 사회는 서로 분리된 공간이 아니다. 그것들은 한 사람 안에서 겹쳐지고, 서로를 침범하며 작동한다. 현실의 타인과 환영의 대상은 동시에 존재하고, 우리는 그 중첩된 상태로 관계를 맺는다. 전이와 투사 같은 정신분석학 개념들은 그 결과를 설명하기 위한 언어이지, 이 현상 자체를 만들어내는 원인은 아니다.
이 문장을 곱씹다 보니, 질문이 하나 떠올랐다. 분석 장면에서 지금 이 사람은 누구와 이야기하고 있는 걸까. 그리고 나는 지금 어느 사회에 더 깊이 발을 담그고 있는가. 혹시 나는 지금의 관계를 살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과거의 장면을 너무 성급하게 불러오고 있지는 않은가.
이 질문은 환자에게만 해당되지 않는다. 분석가 역시 두 개의 사회를 산다. 하나는 이론과 개념, 전문적 역할로 구성된 세계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의 경험과 기억, 정동으로 이루어진 세계다. 우리는 이 두 세계를 완전히 분리한 채로 분석을 할 수 없다. 그렇다고 완전히 섞어버릴 수도 없다. 분석이란, 어쩌면 이 두 사회 사이의 긴장을 견디는 작업에 가깝다.
때로 분석가는 ‘이해했다’는 감각에 안도한다. 환자의 말에 의미를 붙였고, 개념 안에 배치하였으며, 설명 가능한 이야기로 정리되었다는 느낌. 그 순간 불안을 줄어들지만, 동시에 환자의 세계가 아니라 분석가 자신의 세계가 정돈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Sandler의 문장은 바로 이 지점에서 조용한 경고처럼 다가온다. 두 사회 사이의 불일치를 없애려는 충동은 인간적이지만, 그 불일치 자체가 사라질 수는 없다.
진료실에서 중요한 순간들은 종종 그 어긋남이 도드라질 때 찾아온다. 말과 정동이 맞지 않을 때, 지금의 관계와 과거의 환상이 엇갈릴 때, 이해가 잠시 멈추고 공백이 생길 때. 그때 분석가에게 필요한 것은 더 정확한 해석일 수도 있지만, 때로는 그 공백을 성급히 채우지 않고 함께 견디는 일일지도 모른다.
Sandler가 말한 ‘환영의 세계’는 비현실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경험하는 또 하나의 현실이다. 분석은 그 세계를 제거하는 작업이 아니라, 그 세계가 현재의 관계 속에서 어떻게 살아 움직이는지를 알아차리는 과정이다. 그리고 그 과정은 언제나 두 개의 사회를 동시에 살아가는 인간의 조건 위에서만 가능하다.
그래서 나는 이 문장을 기록해 두었다. 새로운 지식을 얻기 위해서라기보다, 내가 이미 살고 있으면서도 자주 잊어버리는 사실을 다시 붙잡기 위해서. 우리는 늘 두 개의 사회에 산다. 진료실에서도, 일상에서도, 그리고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말을 하고 있다고 느끼는 순간에도, 우리는 이미 다른 누군가를 향해 말을 건네고 있을지 모른다. 지금의 관계 속에 있으면서도, 오래 전의 장면을 함께 데려온 채로 앉아 있을지 모른다. Sandler의 문장은 그런 우리의 상태를 설명하기보다, 조용히 드러내 보인다.
그래서 오늘도 질문은 남아 있다.
지금 나는 누구와 이야기하고 있는가.
그리고 이 말은 어느 사회에서 건너온 것인가.
아마도 이 질문은 쉽게 답해지지 않을 것이다. 다만 문헌을 읽고, 사람을 만나고, 다시 글을 쓰는 동안, 이 질문은 조금씩 다른 자리에서 모습을 바꿔 나타날 것이다. 나는 그때마다 잠시 멈춰 서서, 그 질문이 나를 어디로 데려가는지 지켜보려 한다.
그렇게, 다시 다음 문헌을 펼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