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전이 이후의 질문
지난번 Hinshelwood의 문헌「Countertransference」에 이어, Joseph Sandler의 「Countertransference and Role-Responsiveness」(1976)을 읽었다. 그는 환자와 분석가 사이에서 발생하는 관계를 role-responsiveness라는 개념으로 포착하며, 역전이를 단순히 분석가의 감정 반응으로 환원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분석 장면에서 끊임없이 교환되고 강요되며 수락되는 역할의 움직임 자체에 주목한다. 그의 명료하고도 섬세한 묘사를 따라가다 보니, 나는 문득 관계란 무엇인가, 분석 장면에서 일어나는 정신분석이라는 사건은 무엇인가, 그리고 그 장면 속에서 나는 무엇이 되는가라는 질문 앞에 서게 되었다.
우리는 흔히 자신을 하나의 내부 세계를 지닌 독립된 주체로 상정한다. 사고하고, 느끼고, 반성하는 '나'가 먼저 존재하고, 관계는 그 이후에 형성된다고 믿는다. 그러나 살아있는 인간의 경험을 조금만 더 들여다보면, 이러한 전제는 쉽게 흔들린다. 우리는 언제나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자신을 경험해 왔고, 특히 '다른' 인간, 곧 살아 있는 생명체를 구성하는 수많은 과정들을 하나의 이미지로 묶어 인식해 왔다. 우리의 삶이 사회적이라는 말은, 단지 우리가 많은 사람들과 접촉한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가 관계 속에서만 자신을 알아볼 수 있는 존재라는 의미에 가깝다.
Sandler가 말하듯, 우리는 내면적 성찰을 통해 자신을 정의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관계에서 맺어지는 상호작용을 해서도 자신을 정의한다. 우리는 우리와 비슷한 사람들과 상호작용하면서 '인간'이라는 개념을 만들어 왔고, 그 개념 속에서 다시 자신을 위치시킨다. 다시 말해, 자아는 고정된 실체라기보다, 관계 속에서 반복적으로 호출되고 조정되는 역할들의 집합에 가깝다.
그런 의미에서 Sandler가 제안한 role-repsonsiveness는 전혀 새로운 개념이라기보다, 우리가 늘 경험해 왔지만 충분히 언어화되지 않았던 관계의 국면을 개념으로 붙잡은 시도처럼 보인다. 우리가 어떤 관계 안에 들어와 있다는 감각을 느낄 때, 어쩌면 우리는 이미 그 관계가 요구하는 역할들을 스스로에게 적용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누군가와 함께 있을 때 갑자기 말수가 줄어들거나, 설명하는 사람이 되거나, 보호하는 위치에 서게 되는 순간들은 대부분 의식적으로 선택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상대가 우리에게 부여하는 역할들에 의해 상당한 영향을 받으며, 그 역할에 응답하는 방식으로 자신을 구성해 나간다.
Joseph Sandler (1927–1998). 영국정신분석학회 소속의 정신분석가. 그는 대상관계 이론의 핵심 개념들을 자아심리학의 틀 안에서 재정렬한 인물로, 이러한 이론적 전환은 흔히 ‘조용한 혁명(silent revolution)’이라 불린다.
I have mentioned the interaction between the patient and the analyst, and this is in large part(though, of course, not wholly) determined by what I shall refer to as the intrapsychic role- relationship which each party tries to impose on the other. One aspect of such a role-relationship can be appropriate to the task in hand, i.e. to the work of analysis. Certainly from the side of the patient we may see a whole variety of very specific role-relationships emerge. What I want to emphasize is that the role-relationship of the patient in analysis at any particular time consists of a role in which he casts himself, and a complementary role in which he casts the analyst at that particular time. The patient's transference would thus represent an attempt by him to impose an interaction, an interrelationship (in the broadest sense of the word) between himself and the analyst.
이 지점에서 나는 정신분석가가 자신을 '정신분석가'로 경험하는 순간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정신분석가는 언제 정신분석가가 되는가. 수련을 마쳤을 때인가, 자격을 부여받았을 때인가, 아니면 분석실에 앉는 순간인가. Sandler의 관점을 따른다면, 분석가가 분석가로 경험되는 순간은, 환자가 그에게 그러한 역할을 수행하도록 요청하고, 분석가가 그 요청에 일정 방식으로 응답하는 바로 그 지점일지도 모른다. 분석가라는 정체성은 내부에서 완성된 것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부여되고 감당되는 자리일 수 있다.
정신분석 장면에서 이루어지는 대화에는 종종 불협화음이 가득하다. 말이 어긋나고, 침묵이 길어지고, 감정은 엇갈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의미가 생성되는 정신분석적 대화가 오케스트라의 합주와 닮아 있다고 느낀다. 음악에서 하나의 음은 결코 고립되어 의미를 갖지 않는다. 그 음은 이전의 음과 이후의 음들 사이에서만, 때로는 긴장과 불일치를 통해서 의미를 얻는다. 이와 마찬가지로 정신분석 장면에서의 말과 침묵, 감정과 반응은 서로 주고받는 흐름 속에서만 비로소 의미를 갖는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이 합주가 언제나 조화롭지 않다는 점이다. 분석실의 대화는 종종 엇박자를 내고, 분석가는 자신이 원하지 않았던 역할을 맡고 있다는 감각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역전이는 발생한다. 그러나 Sandler의 관점에서 보면, 역전이는 분석가 개인의 내적 문제라기보다, 그가 어떤 역할에 응답하도록 요구받고 있는지를 드러내는 관계적 사건에 가깝다.
이렇게 이해할 때, 정신분석의 윤리 역시 다시 질문된다. 정신분석가는 자신에게 부여된 역할을 즉각 해석하고 벗어나야 하는가, 아니면 그 역할이 요구하는 불편함과 어색함을 일정 시간 견뎌야 하는가. role-responsiveness는 정신분석가에게 즉각적인 행동 지침을 제공하기보다는, 그가 지금 어디에 서 있는지를 묻도록 만든다. 이 질문은 분석을 빠르게 진전시키기보다는, 오히려 분석을 잠시 멈추게 한다.
어쩌면 정신분석이라는 사건은, 의미를 생산하는 기술이 아니라, 의미가 아직 정리되지 않은 상태를 함께 유지하는 능력과 더 깊이 관련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역할은 부여되지만, 그 역할의 의미를 즉각 결정되지 않는다. 정신분석가는 그 미결정 상태 속에 머무르며, 자신이 응답하고 있는 역할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역할이 어떻게 변형될 수 있는지를 천천히 관찰한다. 바로 이 느림과 머뭇거림 속에서, 정신분석이라는 특수한 만남이 가능해지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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