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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티에듀 May 12. 2020

[이미지 8화] 포용, 관계의 전환점 part1

무엇을 누가 포용한단 말인가

포용과 수용이라는 주제를 놓고 녹음한지는 벌써 1년이 되어갑니다.

작년 이맘때쯤 내부 사정이 바쁘게 돌아갔던 것은 둘째 치고, 이 주제에 대하여 다시 글을 쓰기까지 어느 정도의 경험과 고찰이 필요했다는 것을 이제야 회고하게 됩니다.

아직도 많이 조심스러운 주제이지만, 기존의 기획의도와 현재까지의 통찰이 여러 틀어진 관계에서 고민하고 계신 분들께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어디까지 포용하고 어디서부터 단호해야 할까?

Example 1)

우산을 가지고 노는 것을 좋아하는 학생이 있습니다. 다른 친구들도 가지고 놀고 싶어 하면서 너도 나도 우산을 가져옵니다. 그러다가 옆에 학생을 치는 사고가 일어나고 비가 오는 날에는 타인의 우산을 가지고 놀다가 망가뜨리는 사태가 발생하기도 합니다.


Example2)

소시지를 좋아하는 학생은 쉬는 시간마다 소시지를 까먹습니다. 친구의 소시지를 몰래 집어먹기도 하고, 편식이 심하여 건강에 이상 신호가 나타납니다.



무조건적인 포용은 Being에 대한 것

‘being’과 ‘doing’에 대한 구분이 상당히 중요하다는 것을 늘 강조해왔기에 로티의 콘텐츠를 접해보신 분들이라면 익숙하실 것입니다.

보통 being은 존재 자체를 뜻하고, doing은 그 존재가 의지적으로 행동하는 것을 뜻하지요.

다양성(diversity 혹은 multi-culturalism) 교육에서는 상대의 인종과 외모,

선택하지 않은 타고난 것에 대하여 차별 없이 함께 살아가는 것은 매우 중요하기에 각각의 문화와 전통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법을 강조합니다.

따라서 옳고 그름은 doing에 제한적이지 being에는 해당사항이 없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감정’과 ‘마음’은 being일까요 doing일까요, 아니면 이도 저도 아닌 다른 영역일까요?

감정은 타고난 것에 기인하는 것이 많을까요 아니면 자율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일까요?

환경에 영향을 받아 선택할 수 있는 것이라 생각을 미처 못했다면 그것은 being의 범주일까요 doing의 범주일까요?

감정은 습관이라는데, 이 습관을 가지고 있는 being으로 봐야 할까요? 아니면 습관은 고칠 수 있는 것이니 doing이라 봐야 할까요?


교육자로서 이 부분은 참 중요합니다. 감정에서 기인하는 특정 취향과 성향에 대해 포용의 대상일지, 교정의 대상일지 구분을 해야 하거든요.

로티에서는, 결론부터 얘기하면, 처음에는 being으로 간주하지만 주체의 인지여부시간의 흐름에 따라 결국엔 doing으로 여기고 그것이 공동체에 부정적이거나 스스로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지속적으로 끼친다면 교정의 대상으로 보게 됩니다.


Example 1)

처음에는 ‘우산을 가지고 노는 것을 좋아하는 학생이구나’ 하며 being으로 간주합니다. 아무 문제없을 때는 개입하지 않지만 사태가 위 지경까지 오면, 선생으로서 이 상황을 ‘취향’으로만 간주하고 방치하는 것은 우산을 가지고 노는 학생들에 의해 피해를 볼 수 있는 다른 학생들을 보호하지 않는 역차별을 야기합니다. 공동체에 부정적인 것이지요. 그러면 우산을 가지고 노는 것은 이제 교정의 대상인 doing이 됩니다.

만약, 이야기가 다른 방향으로 흘러, 너도 나도 우산을 가지고 놀게 됐는데,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도록 조심하고 배려하는 문화가 잘 잡혀있는 상태에서 우산으로 여러 퍼포먼스를 개발해 기쁨을 준다면 공동체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오히려 장려할만한 doing이 될 수 있겠지요.


Example 2)

학생이 소시지를 좋아하는 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나 남의 소시지에 손을 대고, 피해를 준다면, 그것은 ‘먹고 싶은 감정’을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 절제하도록 교정의 대상으로 봅니다.

또 소시지를 너무 많이 먹어 건강에 이상이 생기게 되면 통제가 필요할 수 있습니다.

혹시 ‘내가 먹고, 내가 살찌고, 내 자유 내가 책임지겠다는데 무슨 상관이에요?’ 라 생각하시나요?

우리의 인권이 국가, 개인에 의해 통제되지 않는 근거는 ‘천부인권’에서 발생했지요. 자신의 인권 또한 ‘자신’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천부(하늘에서 부여됨)로부터 기인합니다.

자신을 파괴하는 것은 인권이 아닙니다.

먹고 싶은 감정 혹은 욕구를 모두 옳다 하지 않습니다. 이런 경우 ‘중독’이라는 표현을 쓰게 되지요.

즉, 타인뿐 아니라 스스로에게 피해를 주는 경우 그 느낌과 감정은 존중이 아니라 통제의 영역이 됩니다. 



감정 만능주의 시대의 오류

여러 유명한 전문의들을 비롯하여 요즘은 감정지능과 공감에 대해 워낙 강조하는 시대이기 때문에 ‘감정’은 무조건 수용하고 옳다고 해야 하며, 상대의 감정을 옳다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차별이라는 것이 주를 이루는 세대이긴 합니다.

감정 만능주의, ‘진실 여부와 관계없이, 나의 느낌이 사실이다’ 따라서 ‘당신은 나에게 관심을 갖고 친절하거라’라는 메시지를 여러 권리와 함께 주장하고 있지요.

여기에 깔린 전제조건은, 감정은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자신의 선택이 아닌 타고난 것이라 여기는 것입니다.


감정은 존재의 가장 핵심적인 요소입니다.

그렇기에 느끼지 못하는 감정을 억지스럽게 느끼라고 강요할 수도, 반대로 감정을 과하게 억누르도록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러 감정을 이해하고, 잘 조절하는 사람들을 어른스럽다고 하지요.

우리의 감정뿐 아니라 이성 또한 존재의 핵심 요소입니다.

감정에 압도되어 이성이 마비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감정과 이성 사이, 어느 지점에서 balance를 이룰 것인지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이 현명한 사람입니다.



‘자유는 절제부터’

스스로에게 주어진 자유로 스스로를 절제하지 못할 때, 그 자유는 타인에 의해 통제받게 됩니다.

부디 통제하는 주체자가 통제받는 대상을 사랑하는 존재이기를 바랍니다.


보호자가 절제하지 못하는 학생을 방치하는 것은 쉽습니다.

갈등을 회피하는 편한 길이지요.

그러나 그 학생을 진짜 사랑하는 보호자는 마음이 아플 것입니다.

보호자가 통제하는 이유는 그 학생을 미워하기 때문이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방치는 사랑이 아닙니다.

무분별한 포용은 단지 우유부단함 일뿐입니다.



포용은 누가 하나?

‘무엇’을 어디까지, 언제까지 포용해야 할지도 어렵지만, ‘누가’ 포용을 해야 하는지도 어렵습니다.

포용은 주체자의 전적인 자율권에 있을까요 아니면 상황에 따라 거부할 수 없는 것일까요?

포용을 당하는 수혜자가 요구할 수 있는 권리일까요, 아니면 온전히 포용하는 주체자의 자비일까요?


포용이라는 단어는 용서와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자격이 없는 사람을 너그럽게 감싸거나 덮어주는 것을 포용이라 합니다.

자격미달인 사람이 자격의 기준을 낮추거나 바꾸는 것을 요구하며 권리라 주장하는 것은 특혜에 가깝습니다.

수혜자가 주체자에게 요구할 수 있는 타당한 권리가 되려면, 주체자에게 의무와 책임이 있어야 하는데, 포용은 포용자의 인격에 기인하기에 의무가 되기 어렵습니다.

또한 의무가 아니기에 포용을 바라는 올바른 자세는, 부탁하는 겸손한 자세입니다.

부탁이 거절당했을 때 분노하는 감정은 옳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사실 포용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마음에 충분한 여유가 없으면 결코 쉽지 않은 행위기에 포용을 강요할 수는 없지만,

포용이야 말로 교육 현장에서, 가정에서 가장 큰 변화를 만들어내는 시작점입니다.

많이 어렵지만, 어긋난 관계를 개선시키는 출발선이기에 많은 분들이 도전해보시기를 바랍니다.




본론으로 들어가 보기도 전에 서문이 참 길었습니다.

Part2에서는 본격적으로 포용하고자 할 때, 어떻게 접근하고 행동해야 하는지 실제적인 행동지침을 나눠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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