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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en 잡은 루이스 Jun 04. 2021

봄날씨처럼 따스한 언어의 소중함

작가의 표현력을 훔치려 왔다가 타인에 대한 배려와 공감을 배웁니다

모처럼 약속 없는 평일 점심시간.

오전 업무를 대충 마무리하고 시계를 보니 어느새 오후 12시를 훌쩍 넘겨버렸다.

'아, 나의 소중한 점심시간'

어디론가 점심을 먹으러 우르르 몰려가는 무리를 뚫고 회사 근처에서 가장 익숙한 대형서점으로 향했다. '밀리의 서재'에 '리디북스', '윌라'까지 인쇄된 책을 대신하는 디지털 시대에 종이책은 무슨 의미일까? 간혹 있어 보이는 관상용이거나 정말 내 삶에 변화를 줄 수 있는 활력소이거나, 또는 팔팔 끓는 라면 냄비 아래 그 뜨거운 온도를 감내해줄 수 있는 용도이거나.


바쁜 현대인들에게 서점은 누군가를 기다리는 장소가 되기도 하고 책 냄새 맡으며 아주 가끔 여유를 부리는 곳이면서 그냥 스쳐가는 경유지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구글링 하면서 원하는 책을 찾아보는 경우들이 흔하긴 해도 종이향 가득한 이 공간에서 묵직한 고요함을 즐길 수 있는 지금의 이 여유와 한적함이 좋다. 딱 1시간 남짓 점심시간이 주는 사치를 아주 천천히 즐긴다.

그나마 오늘은 목적의식이 있었다. 훅 불면 바람 따라 날아갈 듯 사막 모래와 같은 메마른 감성으로 가끔씩 그리고 조금씩 글을 써왔던 내게, 정말 부족한 것이 무엇일까 생각하다가 '언어와 표현'에 대한 부재를 문득 고민해봤다. 두 개 이상의 단어가 서로 만나 문장이 되고 문단이라는 집합체가 될 때 아름다운 그라데이션을 발산하는 경우들이 있는 반면 내가 쓴 글은 하얀색과 검은색으로 나부끼는 팩트의 흔적들이 흑백톤으로 색칠한 것처럼 무미건조하게 느껴질 때가 있었다. 글의 방향과 성향이 다르니 색채가 있는 에세이와 분명한 차이가 있는 건 본인이 쓰는 글의 타고난 운명이자 특성이지만 그런 글(IT 관련 글)만 쓰다 보니 '감성 에세이'는 점점 거리가 멀어져 가는 느낌이었다. 말라비틀어진 나무에 물 한 방울 주듯 지금 내가 보려고 하는 책이 아주 조금이라도 수분이 되어주기를. 


출처 : pixabay


입 밖으로 내뱉어져 상대방의 귀로 흘러들어가는 아주 흔하디 흔한 대화 속의 단순한 언어가 아니라 같은 상황이라 하더라도 글로 쓰여졌을 때 수만 가지 언어로 표현될 수 있는 이야기들. 즉 '어떻게 담아내느냐'에 따라 (때론) 감성적으로 다가갈 수도 있을 거라는 맹목적인 생각을 해봤다. 굳이 어려운 단어가 아니어도 심플한 단어 몇 가지로 다양하게 표현하는 방식 또한 내가 동경하는 '달란트(talent)'이기도 하다.

그러한 갖가지 이유로 서점 입구에 서성이다가 에세이와 시집이 가득 쌓인 공간으로 향했다. 눈에 띄는 책들이 많기도 했지만 그중 <언어의 온도>를 제일 먼저 펼쳐봤다. 2016년에 출간되어 벌써 170만 부나 팔린 베스트셀러이자 스테디셀러. 그런데 표지를 들춰본 것 자체가 처음인 것 같다. 그때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옷깃조차 스치지 않고 지나쳤던 한 권의 책이었을 뿐. '언어의 온도'가 가득한 그 책 주변으로는 작사가 김이나의 에세이부터 최근 <유퀴즈>에 출연했던 나태주 시인과 박준 시인의 책도 보였다. 그리고 내가 애정 하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에세이도 놓여있었다. 이것저것 고민하다가 본능이 이끄는 대로 책을 집어 들었다. 서점을 나가는 순간에는 아까 봤던 <언어의 온도>가 들려있다.


<언어의 온도>라고 해서 언어에 대한 단순한 의미가 그대로 표현된 것은 아니다. 사람과 사람의 대화 속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경험의 공유와 누군가의 깊은 고민, 서로 나누면 좋을 행복과 기쁨 모두 '사람 사는 이야기 그 자체'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하지만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모르는 사람들과 버스를 타고 가족과 밥을 먹고 누군가와 언쟁을 하고 학교나 회사를 다니면서 친구를 사귀고 연인과 만나는 지극히 평범하면서 특별한 '일상에 대한 관찰'을 이렇게 글로 담는 것은 지나가버리면 기억에서도 사라지게 될 경험에 온도를 부여하는 행위다. 글의 표현력만큼 작가의 관찰력 역시 대단하다고 느껴질 수밖에 없는 부분이다. 


<언어의 온도> by 이기주 작가


사실 난 말이 별로 없다. 굉장히 놀라운 경험을 했음에도 이를 퉁명스럽게 그리고 아무렇지 않게 내뱉기도 한다. 하지만 보고 들은 것에 대한 이야기를 아무것도 없는 이러한 공간에 남기는걸 (말하는 것보다) 좋아한다. 쓰지 않으면 굳어버린다. 표현하지 않으면 결국 한계를 넘어서지 못한다는 걸 깨닫기도 했다. 언어를 어떻게 표현하느냐에 따라 봄 날씨처럼 따스할 수 있고 내뱉자마자 분위기를 얼어붙게 만들 수도 있다. 

작가가 말한 것처럼 '말은 때로 가슴에 새겨진다.'

책을 읽기 전 작가의 표현력을 훔치고 싶었지만 책을 읽을수록 우리가 사는 삶 그리고 내가 경험하는 것에 대한 관심과 관찰도 필요하다는 생각을 해봤다. 사실 많은 경험을 할수록 이야기거리는 많아진다. 그리고 자주 표현할수록 언어의 온도는 보다 다양해질 수 있다. 때론 표정으로 말한다고 한다. 눈빛만 봐도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있는 경우들이 있다. 물론 분위기가 말해주는 경우들도 있다. 


얼마 전 <창작과 비평>에서 본 글이 떠오른다. 

"할머니들의 대화에서는 화자와 청자가 지워졌다. 서로의 가슴 속에 든 말이 같아 입을 연 사람이나 귀를 연 사람의 구분이 없다. 귀로 말하고 입으로 듣는지도 모른다"

어떤 말이 오가는지 모를 정도로 뒤섞이는 서로의 언어가 그 짧은 대화 안에서 나뒹군다. 굳이 주워담을 필요도 없다. 봄날씨처럼 따스한 기운을 만들어내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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