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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en 잡은 루이스 Jun 22. 2021

저 멀리서 불어온 바람이 손 끝에 닿았다

오늘도 산에 올라 복잡한 생각을 정리합니다

아침에 일어나 창문을 열어 날씨를 확인했다. 어제 비구름 뒤로 숨었던 햇살이 아주 반갑게 내리쬐고 있다. 오전 업무를 마치고 땀 빼기 좋은 옷으로 서둘러 갈아입었다. 모자를 눌러쓰고 안경 대신 선글라스, 마지막으로 검은색 마스크로 완전 무장한 후 <슬기로운 의사생활> OST가 흘러나오는 에어팟을 끼고 집을 나섰다.

주말 치팅데이를 맞아 마음 놓고 이것저것 집어먹었으니 이제 태우러 갈 시간이다. 그리고 복잡한 머릿속에 수북히 쌓인 먼지를 털어내고 올참이다.

어제와 달리 기온은 크게 올랐지만 솔솔 부는 바람이 깍지라도 끼듯 손가락 사이를 파고드는 덕에 꽤 상쾌한 느낌이다. 골목길 안쪽으로 작은 경로당 하나가 있는데 날씨가 좋으면 할머니 몇 분이 밖에 나와 담소를 나누시곤 한다. 그늘 아래 앉아 서로 대화를 하다가도 한순간 짧은 정적이 흐를 때가 있다. 아무런 움직임도 없이 입만 쩝쩝거리시다가 다시 한분이 입을 열면 언제 그랬냐는 듯 서로의 대화가 뒤엉켜 온정을 나눈다.


"그때 그 시금치 잘 묵었어."

"우리 집은 그거 다 쉬어서 버렸어."

"날이 따뜻하니께 그라지"


지극히 평범한 대화인데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빌라촌 골목을 조금만 더 지나면 성곽길 입구에 다다른다. 마냥 한적하고 조용하다. 북적거림 없이 내리쬐는 햇살마저 조용한데 살살 부는 바람에 꽃잎들만 요란하다. 숲길에 들어서니 이 곳을 가득 메운 나뭇잎들이 바람과 만나 사르륵거린다. 빗방울과 햇살을 가득 머금고 환하게 만개한 노란 꽃들이 하얀 나비들과 환상적인 색의 조합을 이루고 있어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꽃들이 만발한 성곽길 입구.  photo by pen잡은루이스
노랗게 피어난 꽃들. photo by pen잡은루이스


산으로 올라가는 초입에 옹기종기 모인 사람들 여럿이 등산로를 보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이리저리 갈래를 쳐 여러 길이 존재하지만 결국 한 곳을 향해 굽이친다. 모든 산이 그렇다. 정상을 향한 길은 동서남북을 막론하고 뻗어있다. 지도도 있고 이정표도 있지만 '아는 길도 물어가라'라는 말이 있듯 초행인 사람들은 꼭 길을 확인한다. 몇 차례 와본 사람들도 한 번쯤 등산로를 확인하곤 한다.


"여기로 가면 정상 나오나요?"

"이쪽으로 올라가면 어디까지 가나요?"

"여기서 얼마나 걸려요?"


수십 번이나 오른 곳이지만 높게 경사진 계단을 조금만 걷다 보면 초입인데도 불구하고 늘 숨이 찬다.

풀내음 가득한 등산로에서 꽉 막힌 마스크를 쓰고 있어야 하는 안타까움이 분명히 존재하지만 뭐 어쩌겠는가. 그럼에도 마스크의 작은 틈을 비집고 들어온 피톤치드 향이 깊고 굵게 전해진다. 초입 계단 끝에 다다르면 아주 잠시 숨을 돌릴 수 있는 평지길이 나온다. 다리 근육이 뭉치지 않도록 툭툭 쳐본다. 어차피 다시 또 올라야 한다. 다시금 마음을 가다듬는다. 


풀내음 가득한 등산로.  photo by pen잡은루이스
눈이 정화될 만큼 파릇한 풀잎색을 한가득 담아본다.  photo by pen잡은루이스

실컷 땅바닥만 보면서 걷고 오르다가 마침내 고개를 들고 하늘을 볼 수 있는 기회를 맞이한다. 그리곤 뒤를 돌아본다. 앞만 보며 걷고 정상을 바라보며 헐떡이다가도 한 번쯤 뒤를 돌아보면 지금 내가 어디쯤 와있는지 알 수 있게 된다. 그리 높지 않은 산 중턱인데도 저 멀리 아파트 단지와 수많은 건물들이 작게 보인다.


"잠깐 쉬었다가 가자"

"저기 가서 앉을까?"

"조금만 더 가면 되겠다"


사실 체력 분배는 매우 중요한 일이다. 자신의 에너지를 충분히 감내할 수 있을 만큼 오르면 되고 힘들면 잠시 쉬어가면 된다. '쉼'이라는 건 때론 짧지만 충분한 충전이 될 수 있다. 잠시나마 여유를 갖고 올라온 길을 바라보며 깊게 산소를 들이마신다. 적당하게 부는 바람이 감사할 따름이다.


앞만 보며 걷다가 한 번쯤 뒤를 돌아보면 느낄 수 있는 것. photo by pen잡은루이스
힘든가요? 그럼 잠시 쉬어가세요.  photo by pen잡은루이스


하루 종일 업무에 시달리며 일주일을 보내는 여느 직장인들처럼 월요병에 울고 금요일에 기뻐하기를 무한 반복한다. 더구나 코로나 시국에 회사와 집을 똑같이 반복하는 쳇바퀴 삶이 때론 숨 막히는 매너리즘을 선물이라며 던져주기도 한다. 그러다 하루쯤 거머쥐게 되는 휴가는 달콤하지만 쏜살 같이 지나가버리기도 한다. 야속하지만 어떻게 충전하고 어떻게 힐링하느냐에 따라 기억으로 새겨지고 추억으로 짙게 남는다. 코로나에 지친 삶, 누구나 힘들겠지만 잠시 쉬어갈 수 있는 여유가 생겼으면 좋겠다. 그래야 다시 달릴 수 있는 힘이 생기는거니까.


얼마 남지 않은 계단을 또다시 오르면 검붉은 얼굴로 그늘 밑에서 헐떡이는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다. 물 한잔으로 호흡을 가다듬으며 자신이 올라온 길을 내려다보고 있다. 자신을 기특해한다기보다 과오를 반성하는 듯 느껴지는 건 왜일까. 고작 1시간 정도 올라왔을 뿐인데 내 체력이 이것밖에 안 되는 것인가 자책하는 경우들이 있다. 수십 번 수백 번 올라도 힘든 건 매한가지. 그리곤 그 몸뚱아리를 이끌고 다시 정상을 향한다. 누군가에게는 아무렇지 않을 한걸음이지만 누군가에게는 거대한 도전이 된다. 목표 삼았던 그곳에서 느낄 수 있는 성취감, 그것 하나를 위한 도전. 


범바위에서 느낄 수 있는 익숙한 풍경. photo by pen잡은루이스

범바위에만 올라도 탁 트인 풍경을 오롯이 느낄 수 있다. 이 곳에 올라서면 서울 시내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정상까지는 0.45km 밖에 남지 않았다. 처음 올라온 사람들은 이 곳을 정상으로 착각하는 경우들이 간혹 있다.


"아 드디어 정상이다!"

"아냐 저기까지 올라가야 돼"


"다시 해와!"

최종에 최최종으로 파일을 범벅한 후 들이민 내 목표의 정점이 반려될 때 느껴지는 X 같은 기분이 이런 것일까? 힘 빠지는 말이지만 현실이다. 목표를 다 이루었다고 생각할 때 홀가분한 기분이 드는 건 매우 당연한 것이지만 목표를 재설정하는 것은 사실 매우 지치는 일이다. 산이야 그냥 오르면 된다. 몸이 조금 고되고 힘들 뿐, 어차피 크게 차이도 없거니와 대세에 지장 없는 일이다. 체력 분배에 실패했더라도 젖 먹던 힘까지 뿜어내면 (비록 욱씬거리는 근육통이 생기더라도) 못할 일이 없다. 

다만 이 곳이 목표가 아니라며 저쪽 정상을 가리키는 누군가의 지시는 사실 감당하기 힘들다. 


아파트 단지 위로 뭉게뭉게 피어난 구름들.  photo by pen잡은루이스


그래도 다행이다. 현실은 산 너머 산이지만 여기는 그냥 '쉼'의 진리를 알려주는 진짜 산이다.

정상에 오르는 순간 마침내 내 손에 닿은 공기는 남다르다. 탁 트인 풍경 역시 힘들게 오른 이들에게 주어진 보상과도 같은 것. 웅장하고 경이로운 광경을 두 눈에 담을 수 있다.

높다고 생각했던 건물마저도 아무렇지 않게 내려다볼 수 있는 곳. 황사도 미세먼지도 바람에 나부껴 저 멀리 씻겨날아가면 이렇게 아름다운 풍경을 마주할 수 있다. 자연이 주는 감사함. 땀방울 조차도 상쾌하게 느껴질 수 있다.

저마다 사진을 찍는다. 휴대폰에 장착된 사진 기능이 전화로서의 기능을 무색하게 만든다. 힘든 기색 없이 자신들이 낼 수 있는 미소를 마구 뿜어낸다.


"저희 사진 좀 찍어주세요"

"자 찍겠습니다. 하나, 둘!"

"저도 찍어드릴게요"


서로 휴대폰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기브 앤 테이크가 자연스레 이뤄진다. 모두가 헐떡였지만 정상을 허락한 산 위에서 각자 자신들의 생각을 정리한다.

 

헐떡이며 오른 이들에게 선사하는 선물 같은 풍경.  photo by pen잡은루이스


지구력을 키우고 심장의 근육을 증강시키며 업무에 시달린 체증과 폭풍 같은 질주 속에 쌓인 노폐물을 죄다 토해내기 위한 시간이라 내게 너무 소중하다. 아니 소중해졌다. 재택근무를 한다면서 실컷 입에 무엇인가 처넣었던 나를 반성하는 채찍질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제 온갖 성인병에 노출되는 나이가 되었으니 살기 위한 몸부림 일수도 있겠다. 더불어 아무 생각 없이 저 먼 곳을 바라보며 상념에 잠기는 명상의 시간이 되기도 한다. 그저 아파트고 빌딩이고 도로고 죄다 평범하지만 그 평범함 위로 변화무쌍한 하늘의 색과 구름의 이동을 멍하니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다. 바람이 머리를 스칠 때 그간 켜켜이 쌓인 복잡다단하고 쓸데 없던 생각의 파편들이 흩어져 날아가는 것 같다. 

산을 내려가다가 올라오는 사람들을 보며 내가 했던 경험을 되새긴다. 지금 오르는 사람들도 같은 풍경을 만나게 될 것이다. 난 다시 일상으로 내려간다. 그리고 다시 때가 되면 거친 숨을 내쉬며 오르게 되리라.

 

오늘도 산은 나에게 정상을 허락해주었다. photo by pen잡은루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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