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맘대로 리뷰 #21
손예진의 <비밀은 없다>가 20년 만에 돌아온 <인디펜던스 데이 : 리써전스>와 함께 박스오피스에 이름을 올렸다. 두 영화 사이에서 고민을 하다가 마침 '때리고 부수는' 영화를 선택했다. 나도 모르게 1996년의 <인디펜던스 데이> 이상을 기대했던 것 같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롤랜드 에머리히 감독의 '때리고 부수는' 영화에 큰 변화가 필요하다고 느낄 만큼 아쉬움만 남았다.
외계에서 온 거대한 비행선이 하늘을 검게 뒤덮으며 지구를 침공했다. 지구는 그들을 막았고 곧 승리했다. 그리곤 20년이 흘렀다.
1996년 당시 <인디펜던스 데이>는 꽤 압도적인 스케일로 만들어진 SF 영화였다. 그동안 SF 영화를 보며 이토록 거대한 우주선이 있었나 생각이 들 정도였다. 재난 영화 마스터, 롤랜드 에머리히가 메가폰을 잡은 <인디펜던스 데이>가 20년 만에 후속작으로 관객을 찾았다.
리써전스(Resurgence)
재기, 부활을 의미하는 '리써전스(Resurgence)'는 조용히 가라앉아있던 외계 비행선의 부활과 다시 시작된 지구 침공을 알린다. 감독은 늘 시각적으로 관객들을 홀렸다. 이번 영화도 그의 독보적인 능력이 발휘된다. 스케일은 더욱 커졌고 CG 또한 엄청난 규모다.
20년 전 지구를 침공했던 외계인은 지구 감옥에 갇혀있고 비행선은 여전히 지구에 남아있다. 이후 지구는 우주로부터의 침공을 막을 수 있도록 방어사령부를 설립했고 은하계를 오가며 평온하게 임무에 임한다.
아무 일도 없었던 비행선에서 갑자기 신호가 잡힌다. 급기야 지구의 일부를 덮을만한 외계 비행선이 침공한다. 지름만 4천 km가 넘는 이 비행선은 20년 전보다 더욱 거대하고 웅장하다.
종말 위기에 닥친 지구, 과연 우리는 어떻게 막을 수 있을까?
감독님, 꼭 '리써전스'가 필요했나요?
96년 당시 '미국'이라는 나라가 모든 걸 해결 주는듯한 전형적인 애국주의나 도가 넘는 (지나치게 표현하자면) 헤게모니즘(Hegemonism)은 영화에서 결코 빠지지 않는 포인트였다. 미국 대통령이 세계를 지배한다고 해도 무리가 없을 만큼 '세계 대통령'이자 정책을 결정하는 '최종 결정권자'로 등장한 바 있다.
전편에서 빌 풀먼이 연기했던 토마스 휘트모어 대통령은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지구를 구한 영웅이 되었다. 이번엔 <투모로우>에서 의사이자 샘 홀(제이크 질렌할)의 엄마로 등장했던 셀라 워드가 엘리자베스 랜포드 대통령으로 등장한다. 각국 정상들에게 의견을 물을 뿐 정작 결정은 본인이 한다. 미국이라는 나라에 대해 크게 반감이 있는 건 아니지만 독일 출신의 감독이 미국이라는 강대국을 철저하게 포장하는 모습은 살짝 불편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미국과 중국, 저 멀리 아프리카의 종족들이 함께 외계인과 싸운다는 포인트는 전편과는 다른 모습이다. 더불어 중국의 영향력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기도 했다.
롤랜드 에머리히 감독은 <2012> 때도 중국 시장을 인식했는지 많은 부분을 할애했다. 중국의 노동력이 집약된 21세기 '노아의 방주'만 봐도 그러하다. 이번엔 달 기지의 수장으로 중국 배우 친 한을, 그의 조카로 등장하는 전투기 조종사 레인 라오 역에 안젤라 베이비를 투입시켰다. 안젤라 베이비의 역할 분량도 결코 짧지 않은 수준이다.
중국의 대표적인 여배우 판빙빙이 <아이언맨 3>와 <엑스맨 : 데이즈 오브 퓨처패스트>에서 등장했던 분량으로 논란이 많았었는데 이를 감안해봐도 안젤라 베이비가 차지하는 포션(portion)은 매우 큰 변화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 덧붙이자면, 중국의 포털사이트 'QQ'로 커뮤니케이션하는 장면, 자판기에서 중국산 우유팩을 꺼내먹는 장면 모두 중국시장을 공략한 PPL로 보인다. 무시무시한 차이나 파워가 자존심 강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에 당당하게 입성한 모양새다. 멀지 않은 미래, 중국의 영향력을 의식하거나 예상하는 걸까?
20년 전에 비해 스케일은 분명히 커졌다.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20년 전과 크게 달라진 것 없는 외계인의 치명적인 약점, 문명이나 기술력에서 분명히 진화했을법한 외계인임에도 결국엔 '똑똑한(?)' 인간의 승리라는 전형적인 스토리. 몸집만 불렸지, 그 안에 존재하는 플롯이라는 알맹이는 변함이 없다는 게 가장 아쉬운 부분이다. 오히려 이 영화가 20년 전에 나왔다면 SF영화의 역사가 달라졌을 것이다.
롤랜드 에머리히는 재난 영화 분야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감독이자 전문가이자 파괴왕이다. 비행선이 지구를 덮치면서 생겨나는 폭발, 해일, 랜드마크의 파괴 등 초대형 재난 시퀀스는 가히 롤랜드 다운 영상미를 보여준다. 그러나 그게 전부. 억지스럽다 못해 유치하기까지 한 장면들이 넘쳐났고 중간중간 튀어나오는 '유머 코드' 설정 또한 너무 아쉬웠다.
'이번엔 이길 수 없어. 지구의 종말이 올 거야'
과연 '지구의 종말'이 온다면 아무렇지 않게 농담 따먹기 하며 뛰어다닐 수 있을까?
가족을 잃은 슬픔, 지구가 무너지고 있는 그 순간들은 말로 다 표현하지 못하는 치명적 아픔임에도 구렁이 담 넘어가듯 슬쩍 얼버무린다. 굳이 반전을 기대했던 것도 아니지만 100% 예상 가능한 스토리를 볼거리로만 커버하기엔 한계가 있어 보인다. 이럴 거라면 정말 '리써전스'가 필요했을까?
재난영화의 거장, 롤랜드 에머리히
<인디펜던스 데이>는 1996년 개봉해 약 8억 달러 이상, 한화로 1조에 가까운 흥행 수익을 올린 바 있다.
제작비로만 7천500만 달러를 썼으니 대략 10배 이상 수익을 얻은 셈이다.
롤랜드 에머리히의 <투모로우>라는 작품은 지구 환경 변화에 대한 위기의식을 상업영화와 블록버스터라는 아주 알맞은 조합으로 관객들의 사랑을 받았다. 이 영화는 5억 달러 이상 흥행 수익을 올렸고 개인적으로 재난영화의 아이콘처럼 기억된다. 대략 10번은 다시 본 것 같다. 폭풍의 눈을 거쳐 세상이 꽁꽁 얼어붙는 시퀀스는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다. 우리나라에서만 300만 명의 관객이 이 영화를 관람했다. 더불어 제이크 질렌할의 풋풋한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2009년에는 대한민국 윤제균 감독을 통해 <해운대>라는 국산 재난영화가 개봉했고 무려 1천132만 명이 이 영화를 봤다. 관객수 역대 10위라는 기록까지 탄생했다. 대규모 쓰나미에 쓰인 CG는 <투모로우>에서 CG 프로듀서로 활동했던 한스 울릭의 손을 거치기도 했다.
같은 해 11월, <2012>라는 또 다른 재난 영화가 등장했다. 역시 롤랜드 에머리히의 작품. <투모로우> 이상의 볼거리로 무장한 이 영화는 21세기 '노아의 방주'라는 포인트를 가미시켰다. 재미와 웃음, 강력한 CG로 무장해 명실공히 재난영화의 '끝판왕'으로 거듭났다. 스펙터클한 영상이나 지구를 마구잡이로 때려 부수는 장면들은 이 영화의 처음이자 끝이다. 롤랜드 에머리히는 마치 마지막 재난영화를 만든다는 생각으로 마구 쏟아부었던 것 같다. 분명히 '재난영화'의 형태를 띠고 있음에도 <투모로우>에서 보여준 위기의식은 사라진 듯했다.
개인적으론 존 쿠삭이 연기한 잭슨 커티스의 마지막 대사가 잊혀지지 않는다.
'당신 어디 다녀왔어?'라는 케이트(아만다 피트)의 말에 답하는 잭슨.
"Souvenir shop(기념품샵)"
한 사람이라도 더 구해야 한다며 아등바등했던 꼴이 민망해지는 순간이다.
하지만 전 세계 7억 7천만 달러라는 어마어마한 수익을 올렸고 국내에서만 약 540만 명이나 관람했다.
롤랜드 에머리히는 1955년 독일 슈투트가르트 출생의 영화감독이다. '사이즈로 승부하는' 그였기에 물량 공세는 누구도 따라올 수 없을 정도. 하지만 이번 영화는 스케일만으로 결코 스토리를 지배할 순 없다는 걸 보여주는 전형적인 케이스가 되어버렸다. 한계에 다다른 '재난 블록버스터'가 관객들의 사랑을 받기 위해선 반드시 변화가 필요할 것이다.
※ 지극히 개인적인 의견을 담은 리뷰였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롤랜드 에머리히의 영화나 재난영화를 좋아하는 편이지만 '과유불급'은 어쩔 수가 없군요.
외계인이 등장하는 영화 대다수가 초중반에는 긴장감과 볼거리를 주지만 엔딩에선 어느 정도 한계를 보이는듯 합니다. 물론 다 그런건 아니지만.
플롯과 볼거리를 얼마나 조화롭게 연출하느냐가 가장 중요한 포인트겠죠.
영화라는게 관객의 입장에선 호불호가 있고, 감독의 입장에선 성공작도 있고 망작도 있는 법.
이게 다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이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