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Pen 잡은 루이스 Jun 15. 2016

산드라의 내면과 뭉크의 <불안>

내맘대로 리뷰 #20

뭉크 X 내일을 위한 시간


우리에게 <절규>로 익숙한 뭉크는 노르웨이 출신의 화가다. 

1893년 <절규>라는 작품은 뭉크 자신의 내면적 고통을 그려낸 것으로 어쩌면 가장 유명한 작품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겠다. 

 에드바르 뭉크의 <절규>     출처 : 다음 백과사전

해질녘 뭉크는 깊은 우울감을 느꼈다고 한다. 

그때의 하늘은 핏빛으로 물들며 순간 죽을 것만 같은 엄청난 피로감으로 난간에 기댔다고 한다. 뭉크의 친구들은 그대로 걸어갔고 뭉크 자신은 그 자리에 그대로 서서 두려움에 떨었다고 한다. 

이 내용은 뭉크의 일기 중에서 나온 이야기인데, 뭉크의 <절규>는 자신의 내면세계를 절묘하게 그려낸 작품으로 알려져있다.

* 뭉크의 일기에서 나온 내용이지만 실제 문장은 다를 수 있습니다.  



<내일을 위한 시간>, 내면에 담긴 절규 그리고 불안

마리옹 꼬띠아르 주연의 <내일을 위한 시간>은 다르덴 형제( 장 피에르 다르덴, 뤽 다르덴)의 손을 거쳐 만들어진 작품으로 2015년 1월 개봉했다. 마리옹 꼬띠아르가 이만한 연기를 펼친 적이 있었던가 생각해볼 정도로 가녀리고 우울한 산드라의 캐릭터를 아주 훌륭하게 소화해냈다. 

수많은 영화제에 초청되어 수상을 했거나 유력한 수상 후보로 거론되기도 했다. 

뭉크의 <불안>(1896)

이 영화를 보다가 문득 뭉크의 작품이 떠올랐다. 

에드바르 뭉크라는 이름을 들으면 <절규>라는 작품만 생각할 수도 있겠다. 

뭉크의 1896년 작품인 <불안>은 고조된 긴장감과 불안감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작품이다. 뭔가 불안하고 공포스러우며 우울한듯한 사람들의 모습 그리고 그 뒤로 그려진 불규칙의 곡선들은 <절규>에서도 등장해 긴장된 감정을 전달하고 있다. 

<절규>와 <불안> 등 뭉크의 두 가지 작품은 영화 <내일을 위한 시간> 속 산드라(마리옹 꼬띠아르)의 내면과 닮았다. 

산드라 역을 훌륭하게 소화해낸 마리옹 꼬띠아르


잘 다니고 있던 회사에서 갑자기 해고를 당해야만 했던 산드라(마리옹 꼬띠아르).

우리가 그녀의 입장이었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 

해고 후 다시 일자리를 찾기 위해 '이틀의 낮과 하룻밤'이라는 짧은 시간을 고되게 겪어야만 했던 산드라의 입장으로 영화가 그려진다.

그녀를 옆에서 돕는 줄리엣(캐서린 살레)이 산드라의 복직을 위한 재투표를 사장에게 제의하고 어렵게 받아들여진다. 산드라는 억울하고 고통스러우며 혼자가 된듯한 현실에 좌절하고 눈물을 흘린다. 

더구나 시도 때도 없이 의지하게 되는 작은 알약들이 두려움 그리고 우울증에 시달리는 산드라를 제대로 치유해주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을 정도다. 


산드라(마리옹 꼬띠아르)와 그녀의 동료들

가족처럼 일해왔던 동료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산드라의 해고를 통해 만들어진 '보너스'라는 명목 혹은 또 다른 계기로 인해 자신을 버렸다는 것. 그것으로부터 쏟아지는 산드라의 눈물과 불안감은 우리에게 전하는 의미가 더 크다. 

부당한 세상을 향해 소리치고 싶은 산드라의 마음은 뭉크의 <절규>로부터 기인하여, 재투표를 앞두고서는 <불안>으로 이어진다.


산드라가 다시금 일자리를 찾기 위해선 과반수 이상의 득표가 필요하다. 산드라는 과반수 이상 득표를 위해 한 사람 한 사람 동료들을 방문해 설득을 하게 된다. 

"난 보너스가 필요해"라고 말하는 동료들을 뒤로 한채 아무렇지 않은 듯 발길을 돌리지만, 그녀의 뒷모습은 정면이 아닌 바닥을 향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난 네 편이야. 너에게 투표할게"라고 말하는 동료들 앞에서는 환하게 웃고 있지만 그 미소는 오래가지 않는다. 산드라의 마음은 그저 초조하고 불안할 뿐이다. 

동료들을 설득 중인 산드라

산드라가 자신의 내면을 그림으로 그렸다면, 뭉크의 작품들처럼 어둡고 우울한 모습들로 그려지지 않았을까? 산드라의 내면과 더불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인정할 수밖에 없는 '자본주의'라는 틀이다. 누군가의 생계보다 보너스가 더 중요했던 산드라의 동료들은 그녀를 더욱 밀어낸다. 보너스라는 자본주의의 힘은 그들을 더욱 연대하게 만든다.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시간 그리고 희망

산드라에게 주어진 짧은 시간은 그녀를 절규와 불안에서 허우적거리게 만들었다. 

'비 온 뒤에 땅이 굳는다'는 말처럼 산드라는 절규와 불안 속에서 조금씩 단단해져 갔다. 영화 마지막 신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었던 산드라의 얼굴에 비로소 미소가 그려진다. 

그리고 그녀는 말한다. 잘 싸웠다고. 

재투표를 앞두고 모든 것을 과감하게 버린 산드라는 안도감과 편안함에 휩싸인다. 

그녀의 "잘 싸웠다"라는 말 한마디 뒤에는 새로운 세상과 부딪힐 수 있다는 자신감 같은 것이 숨겨져 있다. 그리고 그녀는 다시 돌아간다. 바닥만 쳐다봤던 그녀가 앞을 향해 걸어가며 영화가 마무리된다. 



이 영화의 연출로 메가폰을 잡은 다르덴 형제는 불안감 속에서 자본주의와 투쟁하는 여성의 힘을 희망이라는 이름으로 변화할 수 있게 만들어주었다. 세상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다만, 변하지 않는 세상 속에서 누군가를 위한 희망을 선택할 수도 있다. 그것은 누군가를 향한 동정도 아니고 사랑도 아니다. 단지 함께 살아가기 위해 손을 내미는 것뿐. 

바로 이 영화가 우리에게 던져주는 메시지다.




과거에 작성했던 칼럼을 재편집하여 올립니다. 

산드라와 같은 입장은 아니었으나, 어디서부터 왔는지 모를 <불안>에 휩싸였던 제게 희망 같은 영화였죠. 

추천합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영화 <아가씨> : 배우, 이야기, 비주얼의 시너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