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으로 ‘노블레스 노마드(Noblesse Nomad)’를 꿈꾸고 있다. 챗GPT에 물어보면 ‘다중 거점 생활을 하는 고소득자이면서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전 세계를 누비는 사람’이라고 나온다. 이걸 다르게 해석하면 ‘그냥 역마살이 껴서 돌아다니는 걸 엄청 좋아하는 돈 많은 사람’이라는 거 아닌가? 게다가 이런 삶은 젊었을 때나 가능하지 않을까.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다고는 하지만 결국 회사라는 울타리 안에 묶여 있는 데다가 한 달만 떠돌아다녀도 금방 집이 그리워질 것 같은 느낌. 그럼에도 노블레스 노마드를 꿈꾸는 이유는 삶의 질과 경험의 깊이가 지금의 라이프 스타일을 크게 바꿔놓을 것 같은 왠지 모를 '기대감' 때문이다. 현실도피라고 하니 최소한 매너리즘에서도 벗어날 수 있고 여행도 만끽할 수 있을 테니.
비슷한 개념으로 노트북과 모바일만 있으면 전 세계 어디서든 일할 수 있는 ‘디지털 노마드(Digital Nomad)’의 시대는 이미 오래전부터 자리 잡았다. 몇 년 전 글로벌 IT 기업 관계자를 만나 그가 근무하는 오피스를 찾은 적이 있는데 "여기는 우리 고정 자리가 없어요"라고 했다. 업무용 노트북을 들고 콘센트에 전원을 연결해 와이파이만 잡으면 어느 자리에서든 일할 수 있다는 것이다. 소파에 앉아도 되고 서서 해도 된단다. 엉덩이 붙이고 기대면 잠이 올 것 같은 빈백에 자리를 잡아도 된단다. 어떤 스타트업은 아예 사무실 없이 모든 업무를 재택으로 처리하고 있다. 미국에 있든 제주도에 있든 집에 있든 회사 인트라넷과 연결만 되어 있으면 된다. 반면 내가 속한 회사는 여전히 80년대 스타일이라 사원-대리-과장-차장-부장 순서로 정해진 좌석에서 일을 하고 있다. 이렇게 자리라도 주셔서 감사한 마음으로. (진심입니다)
디지털 노마드는 자유와 이동을 삶의 중심축으로 삼는다고 했던가. 표면적으로는 노블레스 노마드와 닮아 있는 것 같지만 의미는 사뭇 다르다. 그럼에도 ‘어디서든 최고의 경험을 추구한다’는 본질은 다르지 않다. 스치듯 지나가는 단순한 관광(sightseeing)을 넘어 어떤 영감을 얻고 자신을 확장하는 라이프스타일이라니, 이 얼마나 매력적인가. 게다가 이젠 생성형 인공지능이라는 든든한 동반자도 생겼다. 없어도 살아갈 수 있지만, 있으면 여행의 깊이와 퀄리티가 완전히 달라진다. 예전처럼 ‘프랑스 파리 맛집’이나 ‘시드니에서 볼만한 곳’을 검색하며 광고성 블로그 수십 개를 뒤질 필요도 없다. 인공지능 시대의 애플리케이션은 더 영리해졌고 생성형 AI는 개인 비서처럼 성장해 가며 가장 나다운 여행을 큐레이션 할 수 있게 돕는다. 동선부터 취향까지 초개인화는 물론 사용자의 맥락을 이해하는 여행 파트너로 자리 잡았다. 잘 활용할 수 있다면 충분히 편해진다.
런던에 여행을 갔다고 치자. 일정 하나가 우연히 비었다면 이렇게 쿼리를 던져볼 수도 있다.
“오후 2시부터 6시까지 스케줄이 비어 있어. 현재 위치인 빅벤에서 도보 20분 이내, 인스타 감성이 있으면서 영감을 줄만한 숨겨진 정원이나 드립커피가 맛있는 커피 맛집을 포함해서 가볼 만한 곳을 찾아줘. 번화가보다는 여유로운 분위기면 좋겠고 영국 특유의 클래식한 감성이 살아 있는 곳, 맥주나 티, 가벼운 식사도 가능하면 좋겠어”
인공지능은 복잡한 요청도 단번에 분석해 최적의 경로를 제시한다. 마음에 들면 GO, 그게 아니라면 조건을 바꿔 원하는 답을 얻을 때까지 대화를 이어가기만 하면 된다. 요즘 여행 앱들은 빅데이터 기반으로 내 취향에 딱 맞는 숙소나 투어까지 추천해주기도 한다. 사실 이런 알고리즘이나 취향 분석은 디폴트가 된 것 같기도 하다. 더구나 현지에서 카메라 렌즈를 가져다 대면 자연스럽게 번역이 되고 음성도 실시간 통역이 되는 세상이니 놀라울 지경이다. 물론 스마트폰 필수. 지도만 있어도 어디든 간다는 건 모험이면서 낭만일 수도 있지만 이게 무슨 목숨 걸고 하는 서바이벌도 아니거니와 모험이라고 해서 반드시 불편을 감수해야 하는 것도 아니니까. (디지털 디톡스를 하는 노마드라면 해당 사항이 없을 수도 있겠다)
인공지능은 단순한 오토메이션을 넘어 우리의 ‘인지적 파트너’로 기능하기도 한다. 무엇보다 결정 피로(Decision Fatigue)로부터의 해방을 맛볼 수 있다. 한동안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부장 이야기>를 재미있게 봤는데, 그다음 어떤 콘텐츠를 볼지 추천 알고리즘에 빠지게 된다. 무신사나 29cm의 추천 시스템도 우리의 취향을 학습해 선택지를 줄여준다. 결국 이러한 기능은 인간의 에너지 소모를 덜어주고 시간을 아껴준다.
노블레스 노마드가 꿈꾸는 ‘품격 있는 유목민’의 라이프스타일은 인공지능이 없어도 구현할 수 있다. 하지만 효율성을 추구한다면 가장 비효율적일 수 있는 검색이나 예약, 번역과 같은 '필수적 잡무'를 인공지능에 맡긴 뒤 우리는 그 시간을 리워드처럼 돌려받아 바람을 느끼고 하늘을 바라보며 깊은 사색에 잠길 수도 있다. 결국 테크놀로지의 진화는 인간이 더욱 인간다운 시간을 누릴 수 있는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 긍정적으로만 본다면 충분히 그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