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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이 Jul 20. 2020

이제 새삼 슬감빵에 꽂혀서는

tvn 드라마, <슬기로운 감빵생활> 리뷰

‘슬기로운 OO생활’의 원조는 아무래도 초딩 교과서 ‘슬기로운 생활’이었을 것인데, 사실 그땐 OO이 앞에 붙지는 않았던 걸로 기억한다. 몇 년 전 드라마에서 OO 자리에 ‘감빵’이 등장한 이래 ‘의사’, ‘집콕’, ‘직장’, ‘시댁’, ‘백수’ 등등의 아류가 탄생했다. ‘슬기로운’이라는 수식어가 필요한 OO의 조건을 보자니, 아무래도 쉽게 쉽게 편하게 지낼 수 있는 속성은 아닌 듯싶다. 대충대충 무난하게 지내기엔 내외적 태클이 극심하거나, 혹여 느슨한 마음으로 있다간 세상 만만한 호구로 전락할 싹수가 있는, 그것도 아니면 멍 때리며 지내다가 시간만 무의미하게 축내는 일들에 적용될 수 있겠다. 사실 인간만사 가운데 OO에 들어가지 못할 말이 어디 있겠냐마는, 예전처럼 ‘젊어 고생 사서 한다’나 ‘△△은 병가지상사(兵家之常事)’라는 말이 금과옥조가 되지 못하는 5G(곧 6G) 시대에는 뭘 하든 합리적이고 요령 있게, 시간 낭비 없이 해내고 싶은 심리가 반영된 것이 요즘 ‘슬기로운’이라는 수식어의 쓸모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각설하고, 최근 종영된 ‘슬기로운 의사생활’로 인해 수년 전 방영됐던 ‘슬기로운 감빵생활’이 다시금 재방의 물살을 타는 바람에 우연히 시청 대열에 끼게 됐다. 물론 전자는 제대로 본 적이 없고, 한 회 이상 진득이 볼 만큼 나의 구미를 당기지도 못했다. 수년 전 후자 역시 비슷했다. 감옥이 왜 이리 밝음? 죄수복이 너무 깔끔한데. 무슨 감방 생활이 저리 인간적임? 리얼리티가 없어... 하는 마음.

헌데, 최근 공교롭게도 첫회를 맞닥뜨리면서 (야구선수 김제혁의 사연) 맥락을 이해하게 되었고, 소소한 에피소드들도 지루하지 않아 오랜만에 드라마 정주행 ㄱㄱ. 감옥이라는 특수한 공간과 나름의 (억울한?) 사연들이라는 뻔한 설정을 두고도 시청자들의 이목을 당기려면 대본과 배우, 연출의 삼합이 제대로 맞아 떨어져야 할진대, 워낙 유명한 작가와 감독의 앙상블에 배우들의 탄탄한 연기가 받쳐주니 드라마가 성공할 공산이 크기는 했다.


하지만 이 드라마가 초반에 나의 사적 구미를 당긴 것은 의외의 설정에 있었다. 2회쯤에서 김제혁은 재심에서 정당방위로 풀려날 것을 기대했던 것과 달리 (그랬다면 드라마 2회에서 끝났겠지만) 징역 1년 형을 선고받고 구치소에서 교도소로 이감된다. 이어 본격적이고도 암담할(?) 그의 감방생활이 시작된다. 어제까지 메이저리그 진출을 코앞에 둔 전도유망한 야구선수의 추락... 헌데 천운처럼 만난 친구 이준호(정경호)가 그의 구원투수로 등판한다. 소싯적 야구 베프였던 이준호는 본래 서부구치소 소속 교도관이었으나 친구 김제혁이 수감된 서부교도소로 스스로 전보를 신청한 것이다. 나는 이 설정에서 그만 이 드라마에 한 발이 빠져버리고 말았다. 현실에선 좀처럼 보기 힘든, 아니 드라마에서도 참 보기 드문 설정에, 비록 리얼리티가 떨어질지라도 감동하고 싶어진 것이다.


하지만 생각해 보니 이것은 비단 픽션만은 아니었다. 조선 후기 정조 연간, 자유로운 백수 영혼의 소유자 연암 박지원은 당대의 세도가였던 홍국영에게 눈엣가시였다. 홍국영의 노론 숙청 대열에 휩쓸리기 직전, 평소 친구 많기로 유명한 박지원은 벼슬자리에 있던 친구들의 귀띔으로 황해도 금천 연암협으로 피신해 화를 면했다. 벼슬도 없는 포의지사에 척박한 땅에 살아가자니 암담하기 그지없었지만 절친 유언호는 연암을 따라 개성유수로 자청 부임해 와서 연암의 거처를 마련해주고 살아갈 기반을 지원해 주었다고 한다. 눈물 나는 우정이다. 어렵고 위기가 닥쳤을 때 두드러지는 것이 진정한 친구라고 하건만, 평소 마음 나눌 친구들도 어느덧 하나둘 잃어버리고 이젠 불가근불가원의 지인들로만 둘러싸인 현실에 씁쓸해지는 판국에 이준호-김제혁의 우정 어린 설정이 문득 연암을 떠올리게 하여 나의 마음을 훅 잡아끈 것이다.


드라마 중반 즈음, ‘악마 유대위’로 분한 정해인이 등장한다. 부하 병사를 폭행해 사망에 이르게 한 혐의를 받고 3년 형을 선고 받았다. 물론 억울한 누명이다. 상해치사의 진범은 무소불위 가진 자의 자식 오 병장. 좀 과한 설정인가 싶었지만 대외비가 너무나 철저한 군부대에서 있었음직한 (지금도 있음직한, 앞으로도?) 에피이긴 했다. 진범이 있어도, 사건을 목격했어도 증언해 줄 누구 하나 없는 절망적 상황에서 그래도 유 대위의 무고를 밝히기 위해 기약 없는 전쟁을 시작한 이가 있었다. 바로 친형 유정민. 평소 데면데면하던 형제였건만 동생의 억울한 추락을 막기 위해 생업(교수)을 뒤로 하고, 만약(소송비용)을 위해 집도 팔아치우며 목격자 확보에 고군분투한다. 결국 보직 해임되지만 그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다. 형제이니 그럴 수 있을까. 과연, 형제라면 그럴 수 있을까. 나는 형의 눈물 나는 형제애에 나머지 발목마저 드라마에 붙들려 버렸다. 오래 전 역사의 한 토막에 있던 사연이 떠올랐던 것이다.


1894년 프랑스. 참모 본부에 근무하던 대위 하나가 독일 대사관에 군사정보를 팔아넘긴 혐의로 체포되었다. 그리고 비공개 군법회의를 거쳐 종신형을 선고 받는다. 서류 필적 외에 결정적인 증거가 발견되지 않았지만 ‘유대인’이라는 조건은 그 판결에 매우 ‘유용하게’ 참고되었다. 이름하여 ‘드레퓌스 사건’. 인권과 공화국의 대명사 프랑스에서 19세기에 실제 있었던... 인권이냐 국가 안보냐를 두고 프랑스 전 국민이, 아니 전 세계가 진실 공방과 폭동, 광기에 휘말렸던 역사의 한 장면을 읽으면서, 그리고 수많은 용기 있는 자들에 의해 진실이 규명되어가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한동안 감동의 도가니(탕)에 빠져 있던 기억이 새삼 돋았다. 물론 여기에는 군인(피카르 중령), 작가(에밀 졸라), 변호사(드망즈), 기자(조르주 클레망소) 등 소신 있고 양심적인 지식인들과, 정의를 수호하고자 했던 수많은 사람들의 공조가 있었지만, 드레퓌스의 등 뒤엔 그의 친형 마티외 드레퓌스의 눈물 어린 구명 운동이 있었다. 승산 없어 보이는 장구의 세월 동안 가업을 뒤로 한 채, 미쳐 날뛰는 프랑스 대중의 비난과 편견, 공갈에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동생의 무죄 석방만을 위해 달려간 그의 형제애에 나는 몹시 감동했던 바 있다.


다시 슬감빵으로 돌아와서, 드라마 자체가 매회 짜임새 있고 뛰어난 대사들로 구성된 면도 있었지만 김제혁-이준호의 우정과, 유정우-유정민 형제애의 설정은 유독 나의 마음을 움직였던 역사적 기억들을 불러오며 드라마에 대한 호감도를 높여 주었다. 글쎄, 작가가 과연 그 이야기들을 염두에 두고 드라마 화소(話素)로 용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늦깎이 시청자로서 내 감동의 최고 포인트는 바로 그 부분들이었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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