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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uisLee Apr 11. 2024

따듯한 날씨, 따듯한 사람들

2일 차 : 론세스바예스에서 수비리까지

2023.10.12 목요일

산티아고 순례길 2일 차


Roncesvalles 론세스바예스 ~ Zubiri 수비리

22km / 6시간 43분 / 날씨 좋음

중간에 기록이 일시정지 되는 바람에 실제 걸은 거리보다 적게 측정되었다.


지난밤 저녁을 먹은 식당에서 아침 식사를 했다. 양이 상당히 많았던 덕에 든든하게 하루를 시작할 수 있었다. 어제는 이른 새벽에 걸어서 인지 초반부에 다른 순례객들이 거의 없었는데 오늘은 제법 많이 보였다. 코스는 평지 위주라서 순탄하게 느껴졌다. 짧은 오르막길이 몇 차례 나오긴 했지만 어제 넘은 피레네 산맥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풍경은 역시나 너무 멋있었다. 휴식을 취할 있는 마을도 자주 나타났다. 길 위에서 만난 누군가가 2~3일째부터는 몸에 한 두 군데씩 아픈 곳이 생긴다고 하던데 아내와 나는 아직 괜찮다.


아침을 워낙 거하게 챙겨 먹었기에 허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도 점심은 챙겨 먹어야겠다는 의무감이 들어 작은 마을을 벗어나기 직전 나타난 마트에서 산 음식들로 요기를 했다.


아내가 마지막 약 5km의 내리막 구간을 몹시 힘들어했다. 바닥에 사선으로 솟아오른 돌의 독특한 지형이 문제였다. 안 그래도 근력이 부족한 아내는 평소에도 발을 자주 헛디뎠고 그로 인해 다친 적도 몇 번 있었다. 오늘은 거기에 더해 백팩까지 메고 있어 위험이 가중되었다. 아내는 부상을 당하지 않기 위해 한 걸음 한 걸음 조심스레 내디뎠다.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뒤에서 천천히 따라가는 것 밖에 없었다.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안타까운 마음이 들면서도 내심 아내가 극복해 내길 바랐다. 남들보다 느리긴 했지만 무사히 어려운 길을 통과했다. 고맙고 자랑스러웠다.


사진으로 잘 나타나지 않지만 내리막길이다.




도착 마을 Zubiri(수비리) 초입에는 사립 알베르게가 몇 곳 있다. 공립 알베르게에 비하여 크게 비싸지 않은데 시설은 훨씬 좋고 깨끗하다는 후기가 많았다. 아쉽게도 우리가 도착했을 때는 모두 만실이었다. 제법 빨리 왔다고 생각했는데 우리 보다 일찍 일정을 마친 순례자들이 먼저 차지했나 보다. 근처 공립 알베르게는 다행히 여유로웠다. 체크인을 하고 샤워와 빨래를 마쳤다.


점심을 간단히 때운 탓에 배가 고파 이른 저녁을 먹으러 나갔다. 길에서 반가운 얼굴을 만났다. 어제저녁 식사 때 같은 테이블에 앉았던 호주 출신 매튜(Mathew)였다. 자연스레 우리와 일행이 되어 근처 바르로 향했다. 매튜는 고생했다며 우리에게 맥주를 한잔씩 사줬다. 과거 건축가였던 그는 현재 시드니 인근에서 목장 겸 공유 숙박 시설(에어 비앤비)을 운영한다고 했다. 우리가 호주에 놀러 가면 공짜로 재워줄 테니 꼭 연락을 하란다.


바르에는 식사가 될만한 음식을 팔지 않는다 하여 근처 식당으로 장소를 옮겼다. 하필 그곳도 브레이크 타임이었다. 주변에는 다른 식당이나 장을 볼 수 있는 마트가 없었다. 할 수 없이 한 시간가량을 앉아서 기다려야 했다. 어제저녁 식사 때 역시나 같은 테이블에 앉았던 룩셈부르크 출신 폴(Paul)과 티몬(Timon)도 우리를 발견하고 합석했다. 둘 역시 음식점을 찾아 헤매던 중이었다고 한다.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반갑게 재회했다. 폴이 얼마 전 정년 퇴임을 하기 전 까지는 티몬과 직장 동료였다고 한다. 티몬은 폴의 아들 뻘인데도 폴에게 끊임없이 장난을 쳐댔다. 폴은 티몬의 장난이 익숙한지 묵묵히 받아 주는데 둘의 모습이 너무 재밌었다. 덕분에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조성되었고 더 빠르게 가까워질 수 있었다. 가벼운 농담부터 각국이 겪고 있는 심각한 사회 문제까지 다양한 대화 주제들을 넘나 들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식사를 마치고 계산하러 카운터 쪽으로 갔다. 뒤에서 갑자기 티몬이 카드를 내밀며 나와 아내의 저녁 비용을 대신 내줘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오늘 조부상을 당해서 내일 룩셈부르크로 돌아가야 하는데 좋은 친구들에게 식사를 대접하고 싶단다. 우리가 위로를 해줬어야 하는데 도리어 고마운 선물을 받았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는데 매튜와 티몬에게 호의를 받고 나니 메말랐던 인류애가 차오르는 기분이었다.


이틀 연속 저녁을 함께 한 순례객 친구들/왼쪽에서부터 차례대로 호주에서 온 매튜와 룩셈부르크에서 온 티몬과 폴


매튜도 오늘을 끝으로 호주로 돌아간다고 했다. 알고 보니 매튜는 생장이 아니라 프랑스 북부에서부터 순례를 시작했다고 한다. 어제오늘 사귄 친구들이 하나 둘 떠난다고 하니 아쉬웠다. 앞으로 계속 새로운 친구들을 만날 수 있으니 너무 연연하지 않기로 다짐해 본다.


숙소에 돌아와 보니 생장에서 같은 객실에 묵었던 네덜란드 출신 부부와 또다시 같은 방을 쓰게 되었다. 둘 다 인상도 선하고 스몰토크를 나눠 보니 결이 맞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조만간 급속도로 친해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본 매거진은 저와 아내가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기 위해 생장 피에 드 포흐(Saint Jean Pied de Port)에 도착 한 날(23.10.10)부터 목적지인 피스테라(Fisterra)에 당도하기까지 40일 간 하루도 빠지지 않고 직접 기록한 일기를 바탕으로 작성하였습니다.

더 많은 사진은 @the_kangkang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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