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날 먹고 남은 음식으로 아침을 챙겨 먹고 8시쯤 출발했다. 작은 마을들과 멋진 자연경관을 보며 걸었다.
어제 호주 출신의 Mathew(매튜)와 목가구 제작에 대해 많은 얘기들을 나눴다. 대화를 나누다 보니 흥미가 생겨났다. 향후 진로를 결정할 때 선택지 중 하나로 추가 하고 싶었다. 아내와도 걸으면서 진지하게 얘기해 보았다. 기억을 되살려보니 어렸을 때부터 무언가 만드는 것을 좋아했다. 국민학교 시절 과학상자 경진대회 입상 실적이 여러 차례 있었다. 기계장치가 있으면 드라이버로괜히 한 번분해한뒤 다시 조립하곤 했다. 성인이 되어 대학원에 진학해서도 직접 코딩한 프로그램 모듈이 시스템과 결합되어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것을 볼 때 엄청난 성취감을 얻었다. 내 손으로 유무형의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것에서 재미와 희열을 느껴왔다. 만약 내가 가구를 제작하면 완성품이 되었을 때 한번, 그게 누군가에게 판매가 될 때 다시 한번 비슷한 감정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정년이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고 업무 시간 역시 자유롭다. 나에게 부족한 미적 아름다움과 트렌드가 반영된 디자인은 감각이 뛰어난 아내가 도와줄 수 있다. 물론 높은 수준의 완성도가 보장되어야 하고 궁극적으로는 나의 개성이 들어간 요소가 반영되어야 상품으로써의 가치도 인정받을 수 있다. 앞으로 걸으면서 계속 고민해 봐야겠다.
온몸에 빈대에 물린 자국이 발견되었다. 언제 어디서 물렸는지 모르겠다. 다행히 아직까지 간지럽지는 않다. 빈대에 뜯겼다는 것이 믿기지 않아 정신적 충격이 상당했다. 가방이나 옷가지 어딘가에 빈대가 있을까 걱정된다. 오늘 밤에도 뜯기면 어떡하지?아내에게도 옮길까 봐 불안하다. 하루종일 빈대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아 괴로웠다. 어딘가 숨어있을지도 모르는 빈대를 박멸하는 유일한 방법은 모든 피복류들을 건조기에 넣고 돌리는 것뿐이다. 부디 오늘 묵는 숙소에 건조기가 비치되어 있기를 바라며 무거운 발걸음을 이어 갔다.
스페인은 점심을 14시부터 먹는다. 바르가 문을 열었어도 막상 들어가서 물어보면 식사시간 외에는 간식만 먹을 수 있는 곳이 대부분이다. 순례자가 아니면 시간에 맞춰 식당을 방문하면 된다. 문제는 순례자의 경우 14시까지배고픔을 참더라도 주변에 음식점이 없을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러다 보니 식사시간에 식당에서 밥을 챙겨 먹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다. 오늘도 점심을 제때 먹지 못했다. 아내는 그게 많이 힘들었는지내일부터는 도시락을 준비했다가 점심시간이 되면 끼니를 해결하자고 했다.
순간 여러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렇게 하면 주린 배를 움켜쥐고 문 연 식당을 찾아 헤맬 필요가 없어진다. 다만 백팩에 도시락을 넣은 채 4~5시간을 걸어야 한다. 아내의 가방은 애초에 소용량이라서세면도구 같은 공용 물건들은 내가 들고 다니고 있다. 도시락 역시 내 가방에 넣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순례길을 걸어본 사람은 알 것이다. 백팩의 무게가 1kg만 증가하더라도 어깨-허리-무릎-발목에 전달되는 부담이 훨씬 크게 느껴진다. 다들 어떻게라도 무게를 줄이기 위해 노력하는데 도시락을 가방에 추가하자는 것이 선뜻 내키지 않았다. 잠시 고민에 빠졌다. 아내에게 배고픔을 참으라고 할 것인지 내가 육체적 고통을 감내할 것인지 결정해야 했다. 후자를 선택했다. 내가 신체적으로 더 강하기도 하고 아내를 위해 그 정도는 할 수 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아내는 특별히 고마워하는 눈치는 아니다. 조금 얄미웠다.
도착지인 빰쁠로나 지역의 공립 알베르게에 체크인을 하고 샤워, 빨래, 건조를 마치고 장을 보기 위해 근처 마트에 갔다. 한국을 떠나기 전 와인에 조예가 깊은 지인이 추천한 Albariño(알바리뇨) 품종의 화이트 와인을 한 병 샀다. 숙소에 있는 주방에서 저녁과 내일 먹을 점심 도시락을 요리했다. 저녁 식사에 와인을 곁들이려 했으나 주방을 아무리 뒤져봐도 와인 따개가 보이지 않았다. 무작정 돌아다니며 다른 순례자들에게 와인 따개가 있냐고 물어볼 수 도 없는 노릇이었다. 내일 묵을 숙소에는 와인 따개가 있길 바라며 들고 갈 수밖에 없었다. 도시락에 와인까지 짐이 추가되는 바람에 걱정되었지만 마땅한 대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아침에 늦게 출발하는 바람에 목적지에도 늦게 도착했다. 씻고 빨래하고 장보고 요리하고 나니 하루가 다 지났다. 정작 도시를 충분히 둘러보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내일부턴 도착지에서도 여유가 좀 있었으면 좋겠다.
본 매거진은 저와 아내가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기 위해 생장 피에 드 포흐(Saint Jean Pied de Port)에 도착 한 날(23.10.10)부터 목적지인 피스테라(Fisterra)에 당도하기까지 40일 간 하루도 빠지지 않고 직접 기록한 일기를 바탕으로 작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