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소에서 제공하는 조식을 먹으며 지난밤 옆 침대를 쓰던 미국 출신 순례자와 대화를 나눴다. 한국에 돌아가서 목공 관련 일을 해보면 어떨지 고민 중이라고 했더니 식사를 하다 말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잠시 후 명함 한 장을 건네어주었다. 그는 현재 금속 공예를 하고 있지만 그전에는 목조주택을 지었다고 한다. 전문 목수였으니 궁금한 점이 생기면 언제든지 연락을 달란다. 그리 호감 가는 첫인상이 아니었던지라 경계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덕분에 아침부터 엄청난 인류애가 충전되었다.
출발하기 위해 가방을 싸고 있다가 문득 벽을 보았는데 작은 벌레가 기어 다니고 있었다. 인상을 찌푸리며 미국인이 쓰던 옆 자리로 고개를 돌렸다. 침대 주인은 이미 5분 전에 가방을 둘러메고 길을 떠난 상황이었다. 하얀 매트리스 위에 똑같이 생긴 벌레가 보였다. 가까이에서 확인해 보니 빈대다. 피를 어찌나 빨아먹었는지 통통했다. 소름 돋았다. 빈대는 어두울 때만 활동하고 밝은 곳에서는 몸을 숨기는 것으로 알고 있다. 조명이 환하게 비추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2마리나 눈에 띄었다는 것은 상당히 불길한 징조다. 곳곳에 퍼져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불안한 마음에 우리 침대도 구석구석 살펴봤는데 다행히 보이지 않았다. 숨어있어서 못 찾은 것이 아니라 정말 빈대가 없어서 흔적이 나오지 않은 것이기를 바라며 도망치듯 숙소를 빠져나왔다.
오늘은 여태까지의 코스 중 가장 긴 30km를 걸었다. 처음엔 두려웠다. 끝까지 해낼 수 있을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하지만 내가 불안해하면 아내도 영향을 받는다. 자신 있는 척 앞장서서 걸었다. 다행히 길은 평탄했다.
약 8시간 반 만에 목적지에 도착했다. 아내가 평소보다 많이 힘들어했지만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걸었다. 정말 고마웠다. 남은 기간 동안 25km가 넘는 다소 긴 거리도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과 믿음이 생겼다.
아내는 동네를 구경할 힘이 없다며 침대에서 쉬기로 했다.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뒷산에 혼자 올라 경치를 감상했다. 성당 옆으로 솟은 붉은색 절벽이 인상적이었다. 하늘이 맑았으면 더 아름다웠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저녁을 먹기 위해 이곳 Najera(나헤라)가 속한 La Rioja(라 리오하) 州의 특산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식당을 찾았다. 감자 스튜, 야채 스튜, 양갈비 구이가 포함된 코스 요리를 주문했다. 와인 애호가 사이에서 유명한 리오하 와인도 무제한으로 제공되었다. 본식을 먹는 와중 식당 주인으로 보이는 정겨운 인상의 할머니 한 분께서 다가와 이것저것 물어보셨다. 어디에서 왔는지, 며칠 째 걷고 있는지, 걸을 만 한지 등등을 여쭈어보셨다. 한국에서 왔다고 했더니 매운 음식을 좋아하냐고 하셔서 당연히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할머니는 "Un momento, por favor(잠시만요)"를 외치고는 황급히 주방에서 작은 유리병을 들고 오셨다. 직접 담근 매운 고추절임이었다. 병째 건네주시며 먹고 싶은 만큼 덜어 먹으라고 하셨다. 감사함을 넘어 황송한 기분마저 들었다. 살짝 느끼했는데 덕분에 훨씬 맛있게 식사를 즐길 수 있었다. 옆 테이블에 앉아 있던 호주 출신의 순례자 부부와 눈이 마주쳤다. 남편이 자신도 매운 음식을 잘 먹는다며 조금 나눠 달라고 했다. 포크로 고추 하나를 찍어 입에 넣자 금세 얼굴이 빨개지더니 쓰읍 쓰읍 소리를 내며 연거푸 물을 들이켰다. 누가 봐도 매워하는데 자존심 때문인지 맵다는 말은 끝까지 하지 않았다. 도리어 엄지를 치켜세우며 맛있다고 허세를 부렸다. 이후 식사를 마칠 때까지 다시는 고추에 손을 대지 않더라. 유쾌한 그들과도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숙소에 돌아오니 취기가 제법 올랐다. 피곤한 와중에 와인을 너무 많이 마셨나 보다.
어떤 일이던 10년을 꾸준히 한 우물만 판 사람은 그 분야의 전문가라 할 수 있다. 50세쯤 되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을 때 동 나이대 직장인들은 정년퇴임 이후를 걱정하기 시작할 것이다. 지금은 뒤처져 있지만 앞으로는 얼마든지 역전할 수 있다. 다른 사람들이 그런다고 해서 나도 그들과 같은 획일화된 삶을 살 필요는 없다. 사무직은 이미 적성에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버렸다. 흥미를 느끼며 오랫동안 할 수 있는 무언가를 찾아봐야겠다. 내일부터 걸으며 다시 고민해 보자. 알 수 없는 설렘과 불안이 동시에 엄습했지만 피곤함과 술기운을 이기지 못하고 기절하다시피 잠에 빠져들었다.
본 매거진은 저와 아내가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기 위해 생장 피에 드 포흐(Saint Jean Pied de Port)에 도착 한 날(23.10.10)부터 목적지인 피스테라(Fisterra)에 당도하기까지 40일 간 하루도 빠지지 않고 직접 기록한 일기를 바탕으로 작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