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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uisLee Apr 30. 2024

잊지 못할 공동 만찬

11일 차 : 산또 도밍고 데 라 깔사다에서 벨로라도까지

2023.10.21 토요일

산티아고 순례길 11일 차


Santo Domingo de la Calzada 산또 도밍고 데 라 깔사다 ~ Belorado 벨로라도

23.73km / 7시간 35분 / 바람 미친 듯이 많이 붐



7:35 출발. 아침을 먹으며 확인 한 기상예보에 따르면 어제 보다는 바람이 약할 거라고 했다. 기대를 안고 오늘의 여정을 시작했으나 예보가 틀렸음을 알아차리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어제에 비해 더하면 더했지 절대 약하다고 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반팔 반바지만 입기에는 추울 정도로 기온 역시 크게 떨어져 있었다. 다행히 길은 평탄했다.



거센 맞바람과 쌀쌀한 날씨 때문에 오늘도 어제 만큼 힘들었다. 걷다가 만난 모든 마을에서 휴식을 취했다. 바르나 성당에 들러 바람에 흐트러진 옷을 가다듬고 다만 5분이라도 추위를 피해 몸을 녹여야 할 정도의 악조건이 이어졌다. 중간에 포기하고 싶었지만 내색하지 않으려 했다. 괜히 나약한 소리를 해서 아내를 흔들고 싶지 않았다.


Grañón(그라뇽)이라는 마을에서 허기를 달래기 위해 노천카페에 잠시 들렀다. 현지 주민 서너 명이 옆 테이블에 앉아 수다를 떨고 있었다. 우리가 순례자임을 알아차리고 말을 걸어왔다. 어디서 왔는지, 몇 일째 인지 등등 이제는 익숙한 질문들에 답을 하며 말문을 텄다. 별안간 무리 중 한 명이 농담을 던졌다.


"바람이 너무 강해서 제자리에서 점프하면 산티아고까지 날아갈 수 있겠네요."


기발한 생각에 그들도 나도 같이 웃었다.


그라뇽을 벗어나 걸으면서 방금 전의 상황을 곱씹어 보았다. 썩 유쾌한 농담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기본 전제가 잘못됐다. 우리는 동에서 서로 걸어야 하는데 바람은 반대로 불고 있다. 제자리 뛰기를 해서 기류를 타고 날아간다는 재밌는 상상이 현실이 된다고 치자. 몸에 거대한 풍선이나 연을 묶고 점프를 하힘들게 걸어왔던 길로 되돌아간다.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농담을 할 거면 뭘 제대로 알고나 해야지.


두 번째로 기분이 나빴다. 어느 방향에서 불어오건 간에 바람과 싸우며 걷는 것은 그들이 아니고 나와 아내다. 얼굴은 모래 때문에 따끔거리고 눈도 제대로 뜨기 힘들다. 무거운 가방을 메고 걷는 것도 고역인데 돌풍까지 불면 몸이 휘청인다. 중심을 못 잡고 발을 헛디뎌 다칠 위험도 있다. 그들은 그저 바람 없는 따듯한 실내에서 한가한 오후를 즐기면 그만이다. 점프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물론 악의가 느껴지거나 조롱이 섞인 농담은 아니었다. 열악한 상황에서도 고군분투하고 있는 우리를 걱정해 준 것일 뿐이다.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마음은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다. 차가운 바람을 그대로 맞으며 힘겹게 꾸역꾸역 걷고 있는 현실에 대한 원망이 괜스레 그들을 향했나 보다.





어렵게 목적지인 Belorado(벨로라도)의 공립 알베르게에 도착했다. 이곳은 자율적인 기부금으로 운영되는 곳이다. 침대도 몇 개 없고 시설은 낙후되어 있다. 하지만 오늘 이곳에서 가진 저녁 식사 시간은 앞으로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이다.


주방에서 아내와 장 봐온 야채들을 다듬고 있었다. 식사 시간이 다가오자 다른 순례객들도 삼삼오오 모여들었다. 저마다 어떤 요리를 할지 물어보기도 하고 다 쓰고 남은 재료가 필요한 사람이 있는지, 화구는 얼마나 사용할 건지 분주한 대화들이 오갔다. 각자의 요리에만 집중하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도마와 칼은 사용 후 다음 사람을 위해 곧바로 씻어 았다. 바빠 보이는 이가 있으면 간단한 설거지를 대신하거나 팬 위의 파스타가 눌어붙지 않게 휘저어주었다. 서로를 배려하며 모든 순례자들이 주방을 공유하고 있었다.


가장 빨리 요리를 마친 아내와 내가 거실 한가운데 놓인 기다란 테이블 한쪽 끝에 자리를 잡았다. 다른 순례객들도 각자 준비한 음식을 들고 하나 둘 우리 옆에 앉기 시작했다. 함께 식사를 하자는 말이 나온 것도 아닌데 주변에 빈 테이블들을 놔두고 자연스럽게 모여들었다. 순식간에 십여 명의 사람들이 차려낸 갖가지 메뉴들로 성대한 한상이 차려졌다. Logroño(로그로뇨)에서 가졌던 공동 만찬이 떠올랐다. 그때는 모두 처음 본 사람들이었기에 낯을 가렸다. 오늘은 한두 명을 제외하고는 다들 아는 얼굴들이어서 편하게 어울릴 수 있었다. 어제 미친 듯한 강풍이 부는 와중에 땅콩을 꺼내어 아내와 먹고 있을 때 나눠 준 일행도 있었다.


각자 준비한 요리를 공유하며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즐거운 대화들이 오갔다. 맞은편에 앉은 독일인 Flo(플로)가 특히나 재밌었다. 독일인은 유머 감각이 없고 고지식하다는 편견이 있었는데 덕분에 깨져버렸다. 또 다른 독일인 Hans(한스)는 뜻깊은 이야기를 했다. 순례길을 세 번째 걷고 있는데 이렇게 분위기 좋은 공동 만찬은 정말 오랜만이란다. 너무나도 아름답고 행복한 시간이었다는 말을 할 때는 벅찬 감정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오스삐따레로도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이 일에 대한 보람을 느끼게 해 주어 고맙다고 했다. 우리는 당신에게 모든 공이 있다고 화답해 주었다. 인류애로 가득한 저녁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모두가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정리에 동참했다. 아내와 숙소 바깥에 널어놓은 빨래를 걷고 오니 거실에는 한두 명만 남아있었다. 침대에 옷을 갖다 놓고 일기를 쓰기 위해 다시 내려왔다. 한국인 규님 옆으로 슬쩍 자리를 잡았다. 공동 만찬의 달아오른 분위기가 아직 가시지 않아 결례를 무릅쓰고 말을 걸었다. 규님도 싫지 않았는지 자정이 다 되도록 많은 이야기들을 주고받았다. 인상도 선하 생각과 정신까지 건강한 청년이었다. 좋은 인연이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름다운 밤이다.




본 매거진은 저와 아내가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기 위해 생장 피에 드 포흐(Saint Jean Pied de Port)에 도착 한 날(23.10.10)부터 목적지인 피스테라(Fisterra)에 당도하기까지 40일 간 하루도 빠지지 않고 직접 기록한 일기를 바탕으로 작성하였습니다.

더 많은 사진은 @the_kangkang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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