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0.22 일요일
산티아고 순례길 12일 차
Belorado 벨로라도 ~ Ages 아헤스
27.9km / 8시간 06분 / 흐림
7:40쯤 출발. 순례길 어플에 따르면 San Juan de Ortega(산 후안 데 오르떼가)가 오늘의 목적지라고 한다. 어제 잠들기 직전 그곳에 있는 알베르게, 식당 그리고 식료품점을 검색해 보았다. 워낙 작은 마을이다 보니 식료품점이 없고 알베르게 두 곳은 주방 사용이 불가능하단다. 직접 요리를 해 먹을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다. 숙소나 바르에서 음식을 사 먹어야 하는데 후기를 찾아보니 그 마저도 썩 내키지 않았다. 아내와 상의 후 약 3km를 더 걸으면 나오는 Ages(아헤스)까지 가기로 했다.
간식을 먹기 위해 들어간 바르에서 아일랜드 출신 노부부와 얘기를 나눴다. 순례길 완주 후의 계획에 대해 물어보길래 유럽의 여러 나라들을 방문할 예정이라고 했다. 기회가 되면 아일랜드도 가보고 싶다고 했다. 내 얘기를 듣더니 가방에서 작은 메모지를 꺼내 부부가 사는 집 주소, 전화번호 그리고 자신들의 이름을 적어주었다. 에어비앤비를 운영하고 있는데 혹시라도 오게 되면 재워줄 테니 꼭 연락 달라고 당부한다. 부부의 따듯한 마음씨 덕분에 오늘도 인류애가 충전되었다.
Albergue(알베르게)는 순례자를 위한 전용 숙소를 뜻한다. 객실은 2층 침대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는 도미토리 형식이고 공용 화장실·샤워장·주방을 갖추고 있다. 가끔 1층 침대만 있거나 주방이 없는 곳도 있다. 운영 주체에 따라 공립과 사립으로 구분된다.
공립의 경우 산티아고 순례길 협회에서 파견한 자원 봉사자(hospitalero, 오스삐따레로)가 관리와 운영을 맡는다. 마을마다 있는 성당 건물의 일부를 알베르게로 개조한 형태가 일반적이다. 아마도 오래전부터 순례자들을 위한 거처가 성당을 중심으로 형성되었기 때문인 듯하다. 자율적 기부금을 받는 곳을 제외하면 비용은 평균 12€ 정도다. 시설이 비교적 낙후되긴 했으나 기준을 조금만 내려놓으면(혹은 금액을 생각하면) 충분히 지낼만하다. 오스삐따레로의 따듯하고 인간적인 환대, 동료 순례객들과 즐기는 community dinner(공동 만찬), 토스트와 커피·차로 구성된 조식이 제공되기도 한다.
사립은 개인 자영업자들이 운영하는 민박 업소라고 이해하면 쉬울 것이다. 가격은 좀 더 비싸지만(평균 18€) 그만큼 시설이 좋다. 수익 창출이 목적이다 보니 순례자가 요리할 수 있는 주방이 없다. 레스토랑이나 바르를 겸하는 곳이라면 별도의 비용을 내고 식사를 할 수 있다. 주인의 환대는 공립의 그것에 비교하면 다소 건조하다.
숙박 요금은 23년 10월 기준이며 이후 오를 수 있음
알베르게에 묵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신이 순례자임을 증빙할 수 있어야 한다. 순례자용 여권인 credencial(끄레덴시알)에 도장(cello, 쎄요)을 찍어 체크인 과정에서 제시해야 한다. 알베르게, 바르 혹은 성당에서 쎄요와 날짜를 기록하면 순례자가 언제 어디에서 출발해서 어떤 경로로 걸어왔는지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최종 목적지 아헤스에 도착하기 전 산 후안 데 오르떼가의 어느 바르에서 잠시 휴식을 취했다. 양말과 신발을 벗어 햇빛에 건조하며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다른 순례자 한 명이 옆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양팔에는 문신이 가득했다. 가까이에서 보니 어디서 많이 본 문양이었다. 쎄요였다. 신기해서 말을 걸었다.
"팔에 한 문신 그거, 쎄요 아니에요?"
맞다고 했다. 미국에서 온 Jim(짐)은 이번이 10번째 순례길 여정이라고 한다. 한 번 걸을 때마다 가장 의미 있었던 장소의 쎄요를 팔에 그려 넣었단다. 경이로웠다. 10번이라니. 순례길에 간다고 할 때마다 한 달여의 자유시간이 생긴 아내가 그렇게 좋아한다며 호탕하게 웃는다. 짐에게 끄레덴시알을 보여주지 않아도 알베르게에 묵을 수 있겠다고 장난스레 얘기했다. 이미 몇몇 알베르게, 식당 주인들과는 서로 알아보는 사이가 되어 실제로 그리 한단다. 부럽고 멋지다고 생각했다.
뒤에 서 있는 짐의 팔에 새겨진 쎄요 문신들이 어렴풋이 보인다.
28km 가까이 되는 먼 거리를 걸었지만 생각보다 수월하게 목적지에 도착했다. 이곳 아헤스에는 공립 알베르게가 없어 사립에 묵게 되었다. 다행히 가격은 그리 비싸지 않다. 주인이 불친절하다는 후기도 있었으나 아내와 나는 느끼지 못했다. 객실은 4인 1실에 화장실 겸 샤워실이 달려있고 시설도 깨끗하다. 룸메이트는 독일에서 온 코비와 이름 모를 일본인이다. 둘 다 조용하고 말 수가 없는 편이다.
햄버거로 유명한 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다. 고기 육즙이 터지고 꾸덕한 치즈가 흘러내리는 자극적인 미국식 햄버거를 기대했으나 아니었다. 빵이 딱딱하고 생야채가 들어가 있었다. 배가 차지 않아 숙소 1층에서 파는 피자를 먹고 나서야 간신히 포만감을 느낄 수 있었다.
본 매거진은 저와 아내가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기 위해 생장 피에 드 포흐(Saint Jean Pied de Port)에 도착 한 날(23.10.10)부터 목적지인 피스테라(Fisterra)에 당도하기까지 40일 간 하루도 빠지지 않고 직접 기록한 일기를 바탕으로 작성하였습니다.
더 많은 사진은 @the_kangkang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