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0.16 월요일
산티아고 순례길 6일 차
Estella 에스떼야 ~ Los Arcos 로스 아르꼬스
21.76km / 6시간 13분 / 날씨 흐림
6시에 일어나 7시 20분에 출발했다. 아직 어둠이 가시지 않은 마을을 빠져나오자 금속 공예품 상점이 나타났다. 대장장이가 손수 제작한 아기자기한 물건들을 파는 것으로 순례자들에게는 유명한 장소다. 잠시 들러서 구경했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상징하는 아기자기한 장식품 수백 종류가 진열되어 있었다. 기념으로 간직할만한 물건은 없는지 이리저리 둘러보며 한참을 살폈다. 아쉽게도 지갑을 열 만큼 구미를 확 당기는 녀석을 발견하지 못하는 바람에 빈손으로 상점을 빠져나와 걸음을 이어 갔다.
잠시 후 순례길의 또 다른 명물인 Bodega Irache(보데가 이라체) 와이너리가 나타났다. 건물 외벽 수도꼭지에서 순례자들을 위한 식수와 와인(매일 100ℓ 한정)이 무료로 제공되는데 예전부터 꼭 와보고 싶었다. 여느 아침과 다르게 물병에 아무것도 채우지 않고 숙소를 나선 이유도 이곳에서 와인을 담아 가기 위함이었다. 와인 맛은 가볍고 시큼했다. 개인적으로 선호하는 취향이 아니어서 물통의 2/3만 받았다.
허나 얼마 가지 않아 가득 채우지 않은 것에 대한 후회가 들었다.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한 모금씩 마신 와인은 기분 좋은 취기를 유지시켜 주었고 동시에 쨍한 신맛은 지친 심신을 일깨웠다. 탄닌감이 적어 끝 맛도 깔끔했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다시 순례길을 걷게 된다면 물병 가득 와인을 담아가야겠다.
계획형 인간인 나는 매일 저녁 침대에 누워 다음날 걸을 코스를 살펴보며 필요한 정보들을 미리 검색하곤 한다. 목적지까지의 거리가 몇 km인지, 거쳐가는 마을이 얼마나 자주 있는지, 중간에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장소가 있는지 그리고 도착지 숙소는 어디가 제일 괜찮은지를 파악해 놓아야 마음 편히 잠들 수 있다.
오늘도 와이너리를 지나면 우회로가 나타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원래의 경로 보다 길이가 다소 짧고 그늘도 많다고 한다. 대신 아내가 힘들어하는 울퉁불퉁한 산길이어서 우회로에는 진입하지 않기로 협의했다. 그런데 와이너리를 벗어나고 얼마 후 나타난 갈림길에서 표지판을 놓치고 말았다. 정확히는 갈림길이 나타났는지 조차 몰랐다. 와인에 정신이 팔려 앞서 가던 다른 순례객을 아무 생각 없이 따라간 게 화근이었다. 한참을 가다 불현듯 어제 예습한 우회로가 떠올라 현재 위치를 확인해 보았으나 돌아가기에는 이미 멀리 와있었다. 아내에게 이실직고했다. 1일 차에 피레네 산맥을 넘은 후 Roncesvalles(론세스바예스)로 가는 도중 표지판을 놓쳐 길을 잘못 들어서는 바람에 아내와 다툰 것이 떠올랐다. 우회로를 걸을 경우 만나게 될 울퉁불퉁한 산길이 나에게는 전혀 영향을 주지 않는다. 오히려 거리가 줄어들어 좋다. 문제는 아내의 생각이었다. 어제 분명 우회로는 들지 않기로 했는데 진입하고야 말았다.
조마조마한 와중에 앞서 걸어가던 사람이 잠시 쉬어 가기 위해 가방을 내려놓는 것이 보였다. 가까이 다가갔다. 오는 길에 갈림길 표지판을 보았냐고 물어보니 그렇다고 한다. 자신은 이 길이 우회로인 것을 알고 일부러 진입했다고 한다. 길이 더 좋지 않은데도 이 길로 들어선 이유는 더 예쁘기 때문이라고 했다. 뾰로통한 표정으로 옆에서 듣고 있던 아내의 얼굴에 일순간 화색이 돌았다. 이름 모를 순례자 덕분에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길은 듣던 대로 아름다웠다. 걷기 어려운 산길 구간이 생각보다 짧아 아내도 손쉽게 통과할 수 있었다. 안개가 짙게 깔려있어 운치가 느껴졌다.
참고로 아내는 가방을 메고 매일 20km 이상 걷는 것 자체만으로도 체력적으로 부침을 느낀다. 나의 경우 아내보다는 체력이 좋기 때문에 우리가 올바른 경로로 걸을 수 있도록 안내하는 길잡이 역할을 겸하기로 했다. 때문에 표지판을 놓친 것은 임무를 완벽히 수행하지 못한 나의 잘못이었다.
걷는 도중 갑자기 어디선가 한 발의 총성이 들렸다. 50m 이내의 근거리에서 발포된 듯했다. 수만 가지 생각이 들었다. 미치광이 살인마가 인적이 드문 곳으로 와서 누군가에게 총을 쏜 것일까? 안 그래도 순례길이 통과하는 어떤 마을에서는 무례한 순례자들로 인해 주민들이 힘들어한다는 글을 본 적이 있다. 참다못한 주민 중 한 명이 순례객을 대상으로 보복 행위를 한 것일까? 아닐 것이다. 스페인 사람들은 그리 호전적이지 않다. 우리가 걸으며 만난 시골 사람들은 모두 순박하고 착했다. 그들이 그런 끔찍한 짓을 저지를 일은 없다고 생각했다. 사냥하는 것일 수도 있다. 아니 그런데 사냥을 순례길 근처에서 한다고? 그러다 지나가는 순례자가 실수로 총에 맞거나 순례자를 사냥감으로 오인할 수 도 있는 거 아닌가? 한국이었으면 주변에 군부대가 있나 보다 했을 것인데 여기는 그 마저도 가능성이 없다.
놀란 마음을 애써 진정시키며 얼마를 더 걸어갔다. 숲길을 빠져나오자 사다리를 타야 오를 수 있는 높은 구조물에 두세 명의 사람들이 올라가 있는 것이 보였다. 내가 놀란 눈으로 총소리에 대해 물어보자 그들은 호탕하게 웃으며 걱정 말라고 했다. 자신들은 식용 비둘기를 잡기 위해 날아가는 새를 향해 쏜 것이니 순례자가 다칠 일은 없단다. 바싹 마른입을 와인으로 적시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비둘기를 사냥해서 먹는다니 흥미로웠다.
숲을 벗어나자 넓은 들판과 작은 언덕들이 나왔다. 지금은 다 갈아엎어서 아무것도 없지만 안개가 가라앉은 풍경이 멋졌다. Luquin(루낀)이라는 마을에서 바르에 들러 또르띠야를 먹으며 잠시 쉬었다. 이후 도착지 Los Arcos(로스 아르꼬스) 까지는 개활지를 지나야 했다. 날씨가 맑았다면 뜨거운 태양 때문에 힘들었을 것이다. 다행히 하늘에 구름이 잔뜩 껴 있었고 땅에도 안개가 자욱했다. 덕분에 체력 소진이 심하지 않아 상당히 이른 시간(13:30)에 오늘의 일정을 마칠 수 있었다.
오늘은 빨래를 하지 않았다. 선선한 날씨 덕에 땀이 거의 안 나기도 했거니와 어차피 내일 다시 입을 옷이기도 하다. 저녁을 직접 요리해 먹기 위해 손빨래에 소비되는 체력을 아끼려 한 연유도 있다. 걷다가 돼지국밥이 먹고 싶다고 했더니 아내가 야채로 우린 채수에 돼지고기를 넣고 삶기만 하면 된다며 걱정 말라고 했다. 샤워를 마치고 숙소 근처 마트에서 구입한 재료들로 뚝딱 요리를 완성했다. 한국에서 먹던 맛은 아니었지만 제법 그럴듯했다. 오히려 야채와 돼지고기가 신선해서인지 국물이 깔끔하고 담백했다. 식사 도중 다른 순례객도 저녁거리를 들고 와서 우리 옆에 앉았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음식을 조금 나눠 주었더니 너무 맛있다며 아내에게 조리법을 물어보았다. 내가 만든 음식도 아닌데 뿌듯했다. 아내는 요리 천재인 듯하다. 국밥과 찰떡인 소주까지 마련되어 있었더라면 한잔 따라주며 한국의 맛을 더 확실하게 알렸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스페인 현지 재료로 만든 돼지국밥
원래는 순례길을 걸으면서 미래에 대한 고민을 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점점 걷는 데에만 집중을 하고 있다. 그래도 괜찮다. 지금은 그게 중요하니까. 당분간은 머리를 비우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든다.
본 매거진은 저와 아내가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기 위해 생장 피에드 포흐(Saint Jean Pied de Port)에 도착 한 날(23.10.10)부터 목적지인 피스테라(Fisterra)에 당도하기까지 40일 간 하루도 빠지지 않고 직접 기록한 일기를 바탕으로 작성하였습니다.
더 많은 사진은 @the_kangkang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