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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움 Feb 10. 2023

운명론이 아니라 <바빌론>

호불호 게임에 참여하시겠습니까

우리는 모두 각자의 영화 속의 주인공이다. 


반짝이던 시간들이 빛을 잃는다고 해도 어디엔가 흔적을 남기고, 

내 존재가 여기 살아 있었음을 증명한다. 




<바빌론>을 보다가 와 이런 좋은 영화 오랜만이라고 생각하며 속으로 매 장면 기립박수를 치고 있었는데, 

한 커플이 긴 상영 시간을 버티지 못하고 나갔다...


얼마나 지났을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웃고 우는 나의 오른편으로 또 한 커플이 포기를 선언하며 뒷모습을 보이며 떠나갔다....


이해가 갈 뻔했다가도 아니, 이 영화의 맛을 모르다니!!


손님 없는 찐맛집 앞의 백종원이라도 된 듯 안타깝기가 그지없었다.

하지만, 그 순간에도 이 재미를 나만이 100% 느끼고 있다는 생각에 스을쩍 올라가는 입꼬리는 감출 수가 없었다.


내가 누구인가, 

호불호 중 호 아니면 불호의 극단.

마이너 한 취향의 아이콘.


브래드 피트와 마고 로비의 영화 <바빌론>이 나의 취향 외나무다리에서
 극호 쪽으로 쿵 떨어진 순간이었다.


  
1) 마고 로비는 할리퀸으로 평가절하된 것이 분명합니다. 2) 브래드 피트 주연이라 그런가, 감정선이 '머니볼'과 비슷해요



모든 순간이 영화가 되는 곳ㅡ'바빌론'
황홀하면서도 위태로운 고대 도시, '바빌론'에 비유되던 할리우드.
 '꿈' 하나만을 위해 모인 사람들이 이를 쟁취하기 위해 벌이는 강렬하면서도 매혹적인 이야기




느닷없는 코끼리와 함께 허허벌판에서 영화는 시작된다. 


1920년대, 남미계 영어를 구사하며 운반 기사에게 딜을 제시하는 한 남자.


이 바닥에서 닳고 닳아 보이는, 그러나 누가 봐도 파티의 주인공처럼은 보이지 않는, 멕시코 출신의 '매니 토레스(디에고 칼바)'는 광란의 파티를 위한 준비물로 거대한 코끼리를 쩔쩔매며 옮기는 심부름에 여념이 없다. 코끼리는 감독과 배우, 영화와 관련된 인물들이 모여 술과 마약, 섹스, 도박이 합해진 그야말로 대환장 파티의 클라이맥스를 위한 것으로, 매니는 코끼리를 다 옮기고도 이 파티의 웨이터로 숨 쉴 틈 없이 일한다.

쾌락에 몸부림치며 환호하는 사람들 속에서 매니의 얼굴은 그저 무표정일 뿐이다.


광기 어린 사람들 사이를 뚫고, 가까스로 한 숨을 돌리려 파티장 밖으로 나와 담배를 피워 문 매니 앞에

스스로를 스타라고 우기며 이 파티에 참여하길 원하는 '넬리 라로이(마고 로비)'가 나타나 난동을 부린다.


뻔뻔하고 당당하고 기막힌 무명의 그녀의 대담함에 매니의 시선이 멈추고, 쫓아내려는 다른 직원을 막아서며 넬리와 대화를 나누게 된다. 넬리는 그저 사람들의 요청을 듣기만 하던 매니에게 꿈에 대해 물어보고, 자신의 꿈은 스타이고, 스타는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타고나는 것이라며 당당하게 말한다.

그것을 들은 매니는 조력자를 만난 듯, 숨겨두었던 꿈 얘기를 하며 '의미 있는 것, 영원히 지속되는 것'을 하고 싶다고 한다. 점점 크고 격앙된 목소리로 영화계에서 일하고 싶다는 꿈에 대해 말한다. 흑백이었던 매니가 매혹적인 빨간 드레스의 넬리에게 물들어 컬러로 변하는 듯한 순간이었다.  

 


매니가 그녀를 파티장 안으로 들어올 수 있게 해 줌으로써, 넬리는 영화 데뷔의 기회를 잡게 된다. 

넬리는 대타 출연으로 투입된 현장에서 눈물 한 방울까지 컨트롤할 수 있는 그야말로 타고난 재능을 선보이며 스타가 된다. 


매니도 우연히 최고의 무비스타 '잭 콘래드(브래드 피트 분)'의 눈에 띄어 영화계의 허드렛일을 하는 것으로 꿈에 가까워지게 된다.




모든 영화에 대한 헌사로 만들어진 영화 <바빌론>이지만, 무성영화에서 유성영화에서 대중화되고, 3D 기술까지 모든 영화의 발전을 따라가는 동안 그 모든 것이 인간의 흥망성쇠에 다름이 없다고 생각했다.




 '넬리 라로이'가 불청객으로 등장하여, 결국 스테이지의 모든 사람들을 사로잡는 파티 장면은 잊히지 않을 것 같다. 타고난 재능과 대담한 배짱으로 단숨에 사랑을 받았지만, 그 점이 바로 사람들이 그녀에게 등 돌린 이유이기도 했다. 필연적인 불안 때문에 도박과 마약을 끊지 못하고, 재기의 기회마저 스스로 날려버린 '넬리'는 본인이 가진 모든 패를 걸고 꿈을 향해 돌진했지만, 모두에게 사랑받고 또 모두로 인해 부서지고 말았을 뿐이다.  



술과 마약으로 방탕한 생활을 즐기면서도 촬영장에서 카메라만 돌면 신이 들린 것처럼 연기했던 '잭 콘래드'도 처음엔 그저 운이 좋은 재능충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소한 소품 하나의 디테일까지 신경 쓰며, 고주망태가 되어서도 영화에 대해 끊임없이 자신의 철학을 논할 만큼 누구보다 영화에 진심인 사람도 그였다.



영화계에서 시키는 일이라면 뭐든 하겠다고 말하는 매니에게 백인 상사가 '네가 해야 할 일은 오직 심부름뿐'이라고 마음대로 남의 삶을 쉽게 단정 지을 수 있는 이유는 그가 멕시코에서 온 노동자이기 때문일 것이다.

예전처럼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그래서 오히려 더 명확한 신분의 한계를 스스로 느꼈기 때문에, 그는 더 이상 상사를 향해 주장하지 않고, yes, sir라는 말과 함께 조용히 입을 다문다. 




한편, 잭 콘래드는 부진한 흥행 성적에 갈등한다. 관객은 영화를 비웃고, 아부하던 영화계 사람들도 위로를 건네는 사이, 영화와 배우에 대한 평론(근데 이제 가십을 곁들인)을 기고하는 '엘리노어 세인트 존(진 스마트)'이 잭 콘래드가 한물갔다며 쓴 잡지 인터뷰를 발견한다. 화가 나 찾아간 그에게 오히려 독설을 퍼붓는다.


"당신 시대가 끝난 거예요, 이유는 없어요."


그리고, 마치 카메라 렌즈처럼 그를 관찰하던 '안경'을 벗고, 그녀는 잭 콘래드에게 오히려 감사하다는 말을 듣게 될 명대사를 전한다. 


"당신은 퇴물이 되었지만, 먼 훗날 당신이 죽고,
후대의 누군가가 당신이 남아 있는 영화를 재생시키면,
그 안에서 당신은 몇 번이고 살아나."




평론가가 아니라 인간대 인간으로, 안경을 벗고 맨 눈으로 잭 콘래드를 마주한 순간의 말이다.


'이유는 없다'는 허망한 말이, 오히려 '이 모든 인생의 부침은 당신 탓이 아니다'라는 위로의 말로 들리는 순간이었다. 잔뜩 화를 내러 온 잭 콘래드는 방을 나가며 고맙다는 인사를 남기고, 엘리노어는 다시 안경을 쓰고 혹독한 세계에 대해 제삼자로서 원고를 계속 써 내려간다.



잭 콘래드는 이 조언으로 자신이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는 것을 담담히 받아들인다. 그는 대스타였던 자기 자신에게 스스로 묘비명을 새기듯 "쓰레기 같은 영화"에도 최선으로 참여하고, 일상에서 마주친 웨이터에게 선의의 팁과 함께 "모든 미래가 당신의 것"이라는 축복을 아끼지 않는다.



그리고 왕년의 스타답게 극적으로 아름다운 마지막을 스스로 택한다. 권총 한 발로, 깔끔히.




우리는 각자의 영화의 주인공이지만, 잭과 넬리, 매니처럼 수많은 NG를 내고, 본의 아니게 풍파에 휩쓸린다. 

IMF때의 학창 시절과 코로나 시대의 학창 시절을 둘 다 경험해 보고 그 고통의 경중을 따질 수 없듯이, 

어떤 행운도 동일선상에서 비교할 수 없고, 어떤 불행도 피해 갈 수 없다.


시간은 딱 한 번만 흐르고, 우리는 살아있다는 번듯한 말로 죽음에 가까워져 간다는 누더기 같은 사실을 기워입고, 마치 영원히 살 듯 살아간다.



변하는 시대와 자만하는 우리는 떼려야 뗄 수가 없다. 소리가 없는 흑백 영화에서, 컬러풀한 지금의 영화가 되기까지의 뒷모습을 한 자리에서 시대순으로 보자니 변해가는 세상을 비추는 거울같다. 코끼리가 파티장 한가운데를 인간과 함께 활보하며 모두 즐거운 표정이었던 1920년대 파티의 컬러풀함은 오히려 유성영화 시대가 된 후, 어둡고 음침한 쾌락으로 변한다. 



오히려 지하에 숨어버린 숨은 욕망이 현대사회로 갈수록 어두워지는 인간의 내면을 보여주는 듯하다. 감옥으로 보이는 곳에서의 얼굴도 보이지 않는 성교, 박스 속의 생쥐를 산 채로 먹는 거인을 보며 '돈만 있으면 뭐든지 한다'며 어둠 속에서 바퀴벌레처럼 숨어 돈을 던지며 가학적인 쾌락을 즐긴다.  






그리하여, 우리와, 시대는 언젠가 반드시 끝난다. 







잭 콘래드는 스타답게 영화처럼 죽었고, 넬리는 홀연히 나타난 샛별답게 길 위에서 사라졌다.


  

수많은 파티에서 연주하면서 알게 된 매니에게 눈에 띈 것을 계기로, 영화에 캐스팅되어 유명세를 맛봤던 흑인 연주자 '시드니 팔머(조반 아데포)'도 결국은 조명이 비추지 않는 작은 재즈클럽으로 돌아가 고작 한 발치 앞의 관객 앞에서 연주할 수 있음에 진심의 감사를 전한다. 영화 촬영에 필요한 조명 때문에, 우습게도 마치 '백인 같아 보이는' 피부를 까맣게 하기 위해 얼굴에 검댕을 칠하고 울분을 토하듯이 연주하던 모습과 대비된다.



그리고, 잠시간의 성공을 맛보았을 때 자신의 출신을 멕시코에서 '스페인 마드리드' 로 옮겼었던, 그리함으로써 이제는 파티를 즐기는 사람들 속의 일원이 되고자 했던 매니 역시, 쫓기는 상황에서 코 앞에 들이미는 총구 앞에서는 '멕시코의 아무개'가 되어, 영원의 사랑을 약속한 넬리가 사라진 골목을 고민없이 뒤로 하고, 쏜살같이 운전해 도망칠 수밖에는 없다. 




그리고, 우리는 결국 우리가 가진 모습대로 남는다. 삶이든 죽음이든, 좋든 나쁘든 간에. 






국경을 넘어가 안정된 가족을 꾸리고,  예전에 일했던 영화사에 부인과 딸을 데리고 방문한 매니가 그 후에, 오랫동안 찾지 않았던 영화관을 찾아가 과거를 회상하며 눈물을 흘리는 모습도 너무나 <매니답다>.



그리고, 필름은 영화의 역사를 주마등처럼 훑고 지나가고, 그 사이에 매니와 잭, 넬리의 인생이 얽힌다.



팝콘을 먹으며 일상적인 오락으로 영화를 즐기는 사람들의 좌석을 돌아가며 비친 뒤, 울고 있던 매니의 얼굴에 웃음이 번지는 것을 보여주며 영화는 끝난다. 


꿈을 향해 수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고군분투하며 아주 잠시 반짝였던 그 순간도,

가족을 이루고 평범한 가장이 된 지금 이 순간도, 

내가 겪은 모든 인생의 순간이 '의미 있고, 영원히 계속되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은 미소였으리라. 




영화는 매일이 지겨운 보통의 사람들에게 잠시간의 꿈과 희망이 되어야 할 2시간 남짓의 파티.


이를 인생으로 치환했을 때는 어떤가. 모든 것을 거머쥔 것 같은 순간, 젊음, 성공, 사랑, 꿈, 행복.. 

붙일 수 있는 모든 찬사, 아름답고 황홀한 것들, 영원하리라 믿었던 모든 것.


인간의 긴 삶에서 보았을 때, 우리가 느끼는 환희와 영광은 그저 영화 한 편 정도의 시간이 아닐까. 



우리의 빛나는 시절들은 끝난다. 

필연적으로 끝나야 하기 때문에, 이토록 각자의 영화가 아름다운 것이다. 



+)영화 관람 후, 귀가하는 엘리베이터에서 마지막 장면에서 매니가 웃는 걸 이해 못 하겠다는 사람들이 있어서, 나는 또 한 번 조보아 씨를 부르는 백종원의 미간을 하고 말았다. 아무리 취존이라지만, 왜 몰라, 매니 맘!

+)호라면 극호, 불호라면 극불호가 될 올해의 영화! (너무 이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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