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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움 Feb 10. 2023

어쩌다, 불법 촬영 피해자

출근길에 별안간 피해자 역할을 떠맡게 된 회사원의 하루에 대해 

그곳은 영화나 드라마에서 범죄자를 취조할 때나 보던 방이었다.

난생처음 경찰차를 타고, 혼자 조용한 방에 앉아 기다리는 말을 듣고, 눈만 굴리고 있을 때였다. 


답답하고 짜증 나는 마음도 잠시, 심각한 상황을 타개하고자 머릿속에선 엉뚱한 생각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이런데 용의자가 앉으면 느닷없이 막 화내면서 의자를 박차고 난동을 부리던데, 나도 그래야 하나?'


평소 같았으면 출근을 하고도 남았을 시간에 사방이 흰 벽으로 막힌 곳에 앉아 있자니 

평범한 내게 일어난 이 전대미문의 사건이 마치 남 일처럼 느껴졌다. 


평범한 나는 안에서는 밖이 보이지 않는 방(진술 녹화실이라고 한다고 한다)에서는 난동을 부리다, 형사에게 더한 폭행으로 참교육을 받는 장면 밖에, 그마저도 영화에서만 본 적 있을 뿐이었다. 

더더욱이나 한참 후에 들어온 수사관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받을 거라고는 상상도 해보지 못했다.


불법 촬영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셨나요?


(알았다면 그것은 '합법' 촬영이었을 테니 당연히) "몰랐다"라고 수사관에게 대답하는데, 동시에 "내가 알고 있었어야 했나?" 하는 겸연쩍은 기분이 들어 괜히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그렇게 수많은 불법 촬영물이 인터넷을 떠돈다는데 내 거 한 두 개 없으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뉴스나 신문 기사를 보면서 어딘가에서 클릭되고 있을 나 자신을 상상하기도 했지만, 평범한 날의 출근길에 내 치마 속이 실시간으로 찍힐 줄은 몰랐다.  


몰랐던 게 꼭 내 잘못인 것 같아 기분이 언짢았지만, 영화처럼 난동은 부리지 않고 잠자코 있었다.



체포 현장에서도 평범하디 평범한 가해자가 형사님께 붙들려 있었을 때, 멍하니 서있던 내 뒤에서, 가해자에게 "왜 그런 짓을 하냐며" 큰 고함으로 일갈했던 것은 다름 아닌 지나가던 아저씨였다.

'그러게 말이에요' 속으로 대답하면서도 난 피해자는 이럴 때 어떤 표정을 하는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연루된 이 '사건'에 대해 머릿속으로 샅샅이 짚어보았다. 

그날도 역시나 출근은 하기 싫었고, 귀찮아서 화장은 생략하고 마스크를 끼고 집 밖으로 나가,

버스를 탔고, 지하철로 갈아탔고, 지하철에서 내렸고, 개찰구로 나가는 에스컬레이터를 탔는데, 불법 촬영을 당했다..?



그 어디에도 내가 이 사건에 대해 알아야 할 특이 사항이나, 이해될만한 인과 관계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아마 나 대신 가해자를 잡아준 '용감한 형제'가 아니었다면, 그날은 여느 날과 다름없이 흘러갔으리라. 

내가 그 사실을 모르기만 했어도, 나는 익숙한 불법촬영 뉴스가 흘러나오는  TV 앞에서 '모두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에 대해 혀를 차며 지나가는 아저씨처럼 말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곤 금방 잊었을 것이다. 



흔히 우리가 뉴스를 볼 때 그러하듯이, 머릿속으로 나의 몸이 찍힌 사진 혹은 영상을 어렴풋이 상상했다가 

이내 "에이 설마, 퉤퉤"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모든 상황은 송두리째 변했다. 나는 한순간에 피해자가 된 것이다. 




지하철에서 조금 기다리고 있자니, 가까운 지구대에서 피해자인 배려한 듯한 여자 경찰관 한 분과 남자 경찰관 두 분이 와주었다. 

진술서를 쓰기 위해 지구대로 가는 경찰차를 향해 걸어가는 도중에, "특정 부위의 클로즈업이라 이건 부인할 수가 없다"라며 중년의 남자 경찰관이 확신에 차서 나에게 말했다.

그러나, 나는 "지금 보는 내 얼굴에 내 팬티가 겹쳐 보일까?" 하는 생각 밖엔 할 수 없었다.  

나도 분개하며 무슨 사진인지 확인하고 싶었지만, 사진 속의 내 몸을 보고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르겠어서 포기했다. 



그러니까 여자들이 뒤를 가리고 타잖아요.



이어, 마치 그런 것도 몰랐냐는 식의 그 남자 경찰관의 말에 뾰족한 가시가 돋쳐있었던 건 내 착각일까.

말투는 무심했지만, 여자들 중 하나에 속하는 내가 더 잘 알만한 얘기를 굳이 하는 저의는 곧, 감히 뒤를 안 가리고 대중교통의 에스컬레이터를 타는 여자들에 속하는 나도 잘못을 하긴 했다는 '멕이는' 말이었다.



모니터와 키보드 없이 면전으로 날아와 박힌 그의 악플에 나도 반격을 가하고 싶었지만, 그런 실랑이를 할 경황이 없어 말을 아꼈다.


그냥 안 찍으면 되는데요? 



일본 드라마 <아타미의 수사관>은 생과 사의 경계를 오가는 자들의 뒤를 쫓는 탐정의 이야기인데,  뿌옇게 안개가 낀 수상한 아타미라는 공간이 배경이다.  <무진기행>의 무진을 연상케 할 정도로 금방 무언가 일어날 것만 같은 냄새를 풍긴다. 오래전에 본 드라마라 기억은 나지 않지만, 딱 한마디 머릿속에 남는 대사가 있었다. <지금, 선을 넘었습니다> 특정한 경계를 넘었을 때, 환한 불빛을 바라보며 여학생이 주인공인 오다기리조에게 한 말이다. 


일개 평범한 시민인 나는 모든 성범죄의 피해자가 된 적이 없어, 나는 안전지대에 있다고 생각해 왔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나는 항상 피해자와의 경계에서 줄을 타고 있을 뿐이었고, 누군가에게 등을 떠밀리면서 줄에서 떨어져 경계를 넘어 피해자의 입장에 가 있기 전에는 모든 사건이 부옇고 뭉특한 안갯속의 일이었다.

안갯속과 밖은 천지차이다. 습기 없이 청량한 공기의 바깥에선 부연 안갯속을 몰라도 된다고 생각하기 쉽다.


나에게 일어날 수도 있었지만, 동시에 나에게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었고, 확률로 따지자면 반반이지만 어쩐지 나에게만은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사건. 그래서 굳이 안개 속을 걷어보려 하지 않을 사건. 이 글을 보는 누구라도 가질만한 사소한 방관. 




그러나, 사람을 가리지 않고 그런 일은 일어난다.

지금 이순간에도, 당신이 아니면 당신의 옆사람에게, 오늘이 아니면 내일, 또 언제라도.


다시 피해자가 된다고 해도 어떤 표정을 지어야할지에 대한 정답은 알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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