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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움 Feb 14. 2023

뮤지컬과 날씨의 상관관계

바람 부는 날이면 뮤지컬을 보러 가야 한다.


이것은 2시간 남짓 임사 체험을 하기 위해  퇴근 후엔 부리나케 대학로로 달려가던 때의 일이다. 

그곳에 가면 죽었다 살아날 수 있었고, 살아있었어도 죽은 것과 같았다. 





그 당시 죽을지 살지 고민하던 나는 마땅한 답을 찾을 수 없어 숨만 붙어 있던 시절이었고,

겉으로 보기에는 아주 반가운 누군가를 만나러 가는 빠른 발걸음으로, 

혼자가 아니라는 듯이 곧은 등줄기로 걸어 익숙한 소극장의 매표소로 찾아가는 것이 습관이었다.


내 이름을 대고, 미리 예매해 둔 표를 찾아들면, 혼자라는 것도 외롭다는 사실도 잠시 잊을 수 있었다.

나는 당당하게 비참할 수 있었다.





사람에게 상처받고 주저앉아 있던 나는 그 누구도 만나고 싶지 않았지만, 내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무작위의 군중 속에 그저 섞여 있고 싶은 모순으로 가득했다.


겉으로는 괜찮아 보였지만, 전혀 괜찮지 않았던 시절의 나는 적지 않은 돈을 쓰고, 피 튀기는 티켓팅에 참가하여, 겨우겨우 힘들게 나 자신과 독대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오히려 집보다 돈을 지불하고 관람 시간 동안 앉기를 허락받은 그 의자 하나가 내 세상의 전부처럼 느껴져 안심이 되었다. 



세상엔 그런 외로움도 있는 것이다. 나 자신도 나중에야 알았지만. 




지하 2, 3층, 좁은 계단을 타고 빙빙 돌아 내려온 지하 벙커 같은 대학로의 소극장 의자에 구겨져 앉아 있다 보면, 여기서 불이 난다면 그 아무도 살아남지 못하리라고 생각했다. 심지어 밖에서 전쟁이 난다고 해도 나는 꼼짝없이 거기 있어야만 했는데,  그 점이 가장 좋았다.

오직 그 자리만이 '지금' 내가 있어야 할 곳이라는 사실이 유일한 위안이던 시절이었다.






연극, 뮤지컬이 올려지는 극장은 영화관과는 다르게 공연히 소음을 내거나, 중간에 나가는 일이 암묵적인 금기였고, TV처럼 내 맘대로 멈추거나, 지루하다고 느낄 때 배속을 빠르게 조정할 수도 없었다. 


공연은 그 순간에 단 한 번만 일어나는 일이었으므로 나는 허투루 시선을 주지 않도록 주의 깊게 무대와 마주하고,  기억 속에 모든 감각을 각인시키려 노력하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전혀 없었다. 


영화처럼 바로 예매해서 바로 보거나, 취소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적은 금액은 더더욱 아니었으며, 취소에도 수수료를 물어야 했기 때문에 들인 공을 생각해서라도 집중이 절로 되었다. 







공연이 시작되기 직전에 하는 나만의 의식이 있었는데, 이미 시력을 모두 잃은 것 같은 칠흑 같은 암전 속에서도 굳이 또 한 번 눈을 감고, 숨을 깊게 한번 들이쉬는 것이었다.


침잠하는 잠수함에서 손 쓸수도 없이 찾아오는 죽음을 맞이하는 기분으로 매번 성스러운 의식을 치뤘다.

의자 아래서 묵직하게 나를 잡아끄는 힘을 느낀다. 어딘가 내가 진정 있어야 할 곳에서 눈을 뜨지는 않을까 하는 착각도 해보지만, 그럴리 없다는 것도 잘 안다. 나는 어둠 속에서도 살아있다. 


이 찰나가 지나면 곧 눈앞에 쏟아질 새로운 세상을 더 극적으로 맞이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면 몇 번을 반복해서 본 공연도 어김없이 처음 보는 진풍경이 되었다. 


순간 이동을 한 것처럼, 그 세상은 오스트리아의 사형장이었다가, 런던의 허름한 이발소였다가, 

시카고의 감옥이 되었다. 


암전 속의 의식 중에는 마취라도 당하는 것처럼 안도감이 들었다.




'나는 여기에 있어도 되는 사람이다'


아무도 나에게 말해주지 않았던 것. 
나 자신도 나에게 허락하지 않았던 것.



그 시간에 꼭 객석 한 칸을 채워야 할 의무가 내게는 있었다.





뮤지컬 상연이 시작되면, 합법적으로 입을 다물 수 있고, 내가 왜 여기 있어야 하는지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이 시작되었다.

나는 그저 미동도 없이 조용히 앉아 있었을 뿐인데, 눈앞에서 시시각각 나타났다 사라지는 모든 소리와 움직임이 내 안으로 들어와  태풍의 눈이 되었다.




심장이 한 점으로 쪼그라드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  문득 내 안에 밖으로 새어 나오지 않게 잠재워두었던 절규가 있었음을 깨닫는다.




나는 각 공연의 주인공이 죽을 때마다 따라 죽었다. 목을 매거나, 불에 타거나, 머리에 권총을 쏘아서.


본래, 따분한 일상다반사는 객석에 있고, 죽음과 슬픔으로 끝맺어지는 비극과 애환이 극장을 채우는 것이 당연한 것이지만, 이상할 것도 없었다. 어쩌면 극적인 결말이 그 당시의 내 머릿속에선 일상다반사였으므로. 



나의 첫 뮤지컬 첫 최애, 스프링어웨이크닝의 모리츠






수도 없이 죽었다 해도, 그것은 지하 세계의 일이었고, 어김없이 시간 여행은 끝나고, 나는 좁다란 계단을 따라 현실로 소환되어야 했다. 같은 좌석이지만, 지하철의 차가운 의자는 '내가 왜 여기 있는지'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반성의 의자같이 느껴졌다. 매일 출근하는 회사의 의자, 부모님과 함께 밥을 먹는 4인용 식탁의 의자, 나만 빼고 번듯한 꿈을 이루고 철든 것만 같은 친구들과의 약속 자리 한 켠, 높은 빌딩숲 사이를 걷는데 목줄인지, 마패인지 모를 사원증의 무게. 





'나는 왜 여기에, 꼭 살아 있어야 하는지'에 대한 변명을 해야 하는 것에 공포가 몰려왔다





상연 시간이 끝나면, 가차 없이 극장은 텅텅 비었지만,
모두가 떠난 객석의 내 발 밑에서 난 내 시체를 본 것도 같았다. 




이미 순간을 흘러 사라져 버린 노래가 가슴속에서 점점 더 크고 강하게 울리기 시작했고,

지상의 찬 바람에 옷깃을 여미며 극장 밖을 나설 때, 나는 어딘가 조금 이상해져 있었다. 




마음속에 심어진 태풍은 없어져야 할 것과 남아야 할 것을 구분하지 않고 쓸어버린다. 

카타르시스에 마음의 병이 씻은 듯 나은 것 같기도 했고, 정신이 욱신거리는 것이 뇌에 멍이 든 것 같기도 했다.




나는 이제, 뮤지컬을 그때만큼 자주 보지는 않지만,  오늘처럼 찌푸린 날엔 이런 문장이 저절로 떠오른다.

"아, <엘리자벳> 보기 좋은 날이네." (엘리자벳이 죽음으로 표현되는 내면의 우울과 싸우다 결국 우연에 의해 피살당해, 죽음과 입을 맞추며 끝난다)

"딱 <스위니토드> 날씨네."(억울하게 쫓겨나 가족을 잃어야 했던 이발사의 유혈이 낭자하는 슬픈 복수극이고, 역시나 그도 죽음을 맞이한다)




그렇게 태풍에 스스로 부딪혀 휩쓸려야 그럭저럭 살 수 있었던 시절을 떠올리면 그 객석 밑에 묻어놓고 나온 내 시신에 애도라도 표현하고 싶은 심정이다. 




그 뒤로도, 태풍은 모습을 바꾸어 나를 매혹하고, 나를 할퀴고, 모든 것을 앗아갔다가, 억지로 힘을 내 일어나면 몇 가지 주울만한 귀중품의 귀퉁이 같은 것들을 놓고 떠났다. 어떻게 사용해야할지 모를 불완전의 조각들을.




멍이 든 심장을 가진 내게 재난은 축복일까, 저주일까. 

나는 아직도 답을 알지 못한다.




 https://youtu.be/EzJAOJ3SYxc

오성민 피아니스트의 Prelude- 뮤지컬 <쓰릴 미>의 서곡이다. 언제 들어도 귓가가 서늘하고 심장이 들끓기 시작하는 피아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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